올해는 일본 만화 열풍을 이끌어온 잡지 ‘주간 소년점프(週刊少年ジャンプ)’의 창간 50주년이다. 1968년 창간 당시 10만 부로 시작한 ‘주간 소년점프’는 1990년대 한때 650만 부의 발행 부수를 기록했던 일본 최대 만화잡지다. ‘드래곤 볼’ ‘북두의 권’ ‘슬램덩크’ ‘원피스’ 같은 연재물이 ‘주간 소년점프’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도쿄 곳곳에서는 ‘주간 소년점프’의 창간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올해 초부터 계속되고 있다. 지난 4월 방문한 도쿄 롯폰기힐스에서도 ‘드래곤 볼’과 ‘슬램덩크’의 캐릭터를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롯폰기힐스를 대표하는 고층빌딩 모리타워에서는 3월부터 ‘창간 50주년 기념 주간 소년 점프전’이 열리고 있다. 4월 16일에는 롯폰기힐스에 있는 영화관인 도호시네마에서 ‘주간 소년점프’ 창간 기념 행사도 열렸다.

일본 최대 만화 잡지의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인 만큼 떠들썩한 분위기를 기대했지만, 막상 만화 캐릭터들을 둘러보는 일본인들은 차분한 모습이었다. 주간 소년 점프전의 부제인 ‘1990년대 발행 부수 653만 부의 충격’에서 알 수 있듯 과거의 추억에 잠기는 듯했다.

뜨거운 열기는 50주년을 맞은 ‘주간 소년점프’보다 2주년을 맞은 ‘픽코마(Piccoma)’ 행사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4월 17일 도쿄 롯폰기힐스의 도호시네마 7관에서 카카오재팬의 웹툰 플랫폼인 픽코마 출시 2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다. 바로 전날 ‘주간 소년점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레드카펫이 깔렸던 자리에 이번에는 픽코마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줄을 섰다. 이날 행사에는 일본의 만화, 콘텐츠 업계 관계자 500여 명이 참석했다.

카카오재팬은 이날 행사에서 올해 1분기 픽코마로 8억2400만엔의 매출을 올렸다고 발표했다. 서비스를 시작한 2016년 2분기 매출은 114만엔이었다. 불과 2년이 지나기 전에 매출을 800배나 키운 것이다. 김재용 카카오재팬 대표는 “서비스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동시 접속자 수를 확인했는데 6명이 나온 적이 있었다”며 “2년 전만 해도 카카오재팬 직원들만 보던 플랫폼에 지금은 하루 120만 명이 접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행사 말미에는 일본의 원로 만화가인 로쿠다 노보루(六田登)가 단상에 올라 만화가 지망생들과 함께 웹툰에 도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로쿠다 선생이 “청년들에게 젊을 때 모험에 나서야 한다고들 하는데, 나는 지금 모험에 나서기로 했다”고 말하자 500여 청중이 박수로 화답했다.

일본 만화 시장을 이끌었던 만화 잡지는 발행 부수가 줄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 만화 시장 규모가 예년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출판만화가 줄어든 만큼 웹툰 시장이 커지고 있어서다. 슈에이샤, 고단샤 등 일본의 대형 출판사들이 웹툰 시장의 출현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 네이버의 일본 자회사인 라인(LINE), 카카오재팬, NHN엔터테인먼트 같은 한국 정보기술(IT) 기업이 빈틈을 공략했다. 일본 메신저 서비스를 선점한 라인이 웹툰 애플리케이션(앱) 시장에서도 1위를 지키고 있고, 카카오재팬의 픽코마(2위), NHN엔터테인먼트의 코미코(4위)가 뒤를 따르고 있다. 매년 10% 이상 빠르게 성장하는 일본 웹툰 시장을 한국 기업들이 이끌고 있다.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는 “IT 산업은 시장을 선점하면 네트워크 효과 덕분에 승자독식이 가능하다”며 “한국 IT 기업들이 한국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일본 웹툰 시장을 선점하면서 제조업에서 불가능했던 승자독식이 가능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4월 17일 도쿄 롯폰기힐스 도호시네마에서 픽코마 2주년 행사가 열렸다. / 이종현 기자

북미 웹툰 시장 선점한 타파스미디어

이런 현상은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세계 콘텐츠 시장을 이끄는 미국이 대표적이다. 마블코믹스와 DC코믹스가 양분하고 있는 미국 만화 시장에서 한국 기업인 타파스미디어(이하 타파스)가 웹툰 플랫폼으로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김창원 대표가 구글을 나와서 2012년 설립한 타파스는 한국형 플랫폼을 내세워 북미 웹툰 시장을 선점했다. 지금은 타파스의 플랫폼에 작품을 올리는 작가가 3만5000명에 달하고, 월 방문자 수는 200만 명에 이른다. 한국에서 유료 웹툰 시장을 개척한 레진코믹스도 미국 시장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제2의 중국으로 불리며 전 세계 IT, 콘텐츠 업계의 관심을 받고 있는 동남아시아에서도 한국 웹툰 플랫폼이 시장을 선점했다. 인도네시아, 태국, 대만 같은 나라에서 코미코와 레진코믹스, 라인웹툰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경쟁하고 있다. 카카오페이지 운영 업체인 포도트리의 차상훈 최고전략책임자(CSO)는 “동남아 시장은 아직 매출 자체는 크지 않지만, 인구가 굉장히 많고 모바일 환경이 잘 갖춰져 있어서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중국은 텐센트, 콰이칸 같은 현지 플랫폼이 강세지만 한국 웹툰 플랫폼이 작품을 제공하거나 운영 노하우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파이를 나누고 있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세계 웹툰 시장 규모는 2012년 4억6000만달러에서 올해 처음으로 10억달러를 넘어서고 2021년에는 13억달러까지 커질 전망이다. 전체 만화 시장에서 웹툰이 차지하는 비율도 2012년 6.1%에서 2021년 18.1%로 10년 만에 세 배나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급성장하는 웹툰 시장을 한국 기업이 만든 플랫폼이 이끌고 있다. 어떤 비결이 숨어 있는 걸까.



지난해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북미 최대 만화 축제 ‘애니메 엑스포’에서 현지 여성 팬들이 레진코믹스 부스에 몰려 있다. / 레진엔터테인먼트

비결 1│ 한국엔 있지만 해외엔 없는 사업 모델

4월 2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2018 세계웹툰포럼’이 열렸다. 200여 명의 참석자가 준비된 자리를 꽉 채운 가운데 웹툰 업계의 리더들이 한국 웹툰 플랫폼의 성공 비결을 공유했다. 포도트리의 황현수 부사장은 가장 중요한 비결로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을 꼽았다. 황 부사장은 “게임에서는 이용자가 접속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이용권이나 캐시를 주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이 모델을 웹툰에도 적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탄생한 비즈니스 모델이 ‘기다리면 무료’였다. 기다리면 무료는 만화책 한 권을 여러 편으로 나눈 뒤에 한 편을 보고 일정 시간을 기다리면 다음 편을 무료로 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기다리기 싫은 사람은 유료로 결제하면 된다. 김재용 대표는 “기다리지 않고 다음 편을 보려면 요금을 지불해야 하고, 무료로 보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우리 플랫폼을 방문해야 하기 때문에 이용자의 충성도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카카오재팬은 2016년 일본에서 픽코마를 론칭하면서 기다리면 무료 모델도 함께 가져갔다. 그전까지 일본에서는 웹툰도 만화 단행본처럼 한 편 한 편 돈을 내고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용자가 시간을 투자하면 무료로 볼 수 있게 하는 방식에 일본 출판사들의 거부감은 컸다. 이용자가 마지막까지 기다려서 전 편을 무료로 보면 손해가 난다는 반응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일본 출판사가 픽코마에 작품을 제공하는 걸 꺼렸다.

김재용 대표와 황현수 부사장은 한국에서 웹툰을 서비스하며 쌓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출판사 한 곳 한 곳을 일일이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황 부사장은 “출판사들은 끝까지 기다려서 무료로 보는 독자의 비율이 50% 정도는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데이터를 보면 1~2% 정도에 불과했다”며 “이런 데이터를 보여주면서 출판사를 설득하고, 동시에 반드시 유료로 결제해야 하는 회차도 만드는 등 보완 장치를 두는 식으로 절충했다”고 말했다.

픽코마가 기다리면 무료로 성과를 내자 다른 웹툰 플랫폼도 비슷한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고 있다. 김재용 대표는 “기다리면 무료는 매일매일 만화를 보는 습관을 만들기 위한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말했다.


비결 2│ 출판만화와 전혀 다른 독자층 발굴

일본의 인기 만화 중에는 소년물이 많다. ‘우정·노력·승리’를 내세운 ‘주간 소년점프’의 표어가 보여주듯이 젊은 남성 독자를 겨냥한 작품이 많았다. 하지만 웹툰 시장은 전혀 다른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

픽코마의 경우 전체 이용자의 59%가 여성이다. 픽코마에 연재 중인 2000여 개 작품 중 ‘액션’과 ‘판타지’ 비율은 각각 13%에 불과하다. 반면 ‘연애·러브 스토리’가 30%, ‘드라마’는 14%에 달한다. 이런 수치는 다른 웹툰 플랫폼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단행본이나 주간지를 통해서 만화를 접하지 않던 새로운 독자층이 웹툰 시장에 있는 것이다. 일본 출판사 후타바샤(双葉社)의 사이토 마사나오 부장은 “처음 웹툰을 출시했을 때 가장 놀랐던 부분이 여성 독자의 비율이 굉장히 높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마블코믹스와 DC코믹스의 코믹북 독자는 남성이 많았는데, 타파스와 레진코믹스의 웹툰 플랫폼 독자 중에는 여성이 많다. 마블코믹스와 DC코믹스의 남성 독자 중심 콘텐츠를 외면하던 여성 독자들이 웹툰에는 마음을 연 것이다. 국경님 타파스 PD는 “타파스에서 열독률이 가장 높은 작품들을 보면 여성 작가가 여성 독자를 겨냥해서 쓴 것이 많다”고 말했다.


비결 3│ 현지 작품 비율 97%, 검증된 기술력

픽코마와 타파스처럼 해외 시장에서 성과를 내는 한국 웹툰 플랫폼은 거의 현지 작가들의 작품을 싣고 있다. 픽코마에 연재되는 작품 중 한국 작가의 웹툰 비율은 2.5% 정도에 불과하고, 타파스는 그보다 적다. 한국 웹툰을 그대로 가져다 쓸 수도 있었지만 철저한 현지화가 중요하다고 보고 현지 작가의 작품을 늘린 것이다.

NHN재팬 시절부터 일본에서 한국 플랫폼을 운영해온 김재용 대표는 현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겨울연가’로 시작된 드라마 한류 붐을 예로 들었다. 김 대표는 “일본에서 한류 붐이 생기니까 한국 드라마를 있는데로 가져와서 양으로 승부를 했다”며 “그러다 보니 질이 떨어지는 작품이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서 한류 붐이 사그라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웹툰 시장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한국 작품은 엄선해서 가져오고, 나머지 대부분의 작품은 현지 작품으로 채운다는 것이다. NHN코미코의 장현수 대표도 “한국식 플랫폼에 일본 작가의 오리지널 작품을 탑재하는 방식으로 현지화에 주력했다”고 말했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같은 첨단기술도 한국 웹툰 플랫폼의 비밀 무기가 됐다. 네이버, 카카오는 콘텐츠 기업이기 전에 IT 산업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일본 출판사들과 달리 첨단기술 활용에 능숙하다. 예컨대 카카오재팬은 픽코마에 연재 중인 작품별 이용자 데이터를 분석해서 철저하게 개인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김재용 대표는 “앱 홈 화면에 노출되는 추천 작품에 AI 시스템을 도입해서 개인화된 서비스를 제공했더니 클릭률이 1.5배 높아졌다”며 “카카오가 수년에 걸쳐 축적한 기술 노하우를 웹툰 서비스에 접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plus point

“웹툰, 영화·드라마로 가는 출발점”


“인기 웹툰 ‘신과 함께’는 영화로 제작돼 14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신과 함께- 죄와벌’은 제작 기간 6년에 4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영화다. 네이버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하지 않았다면 이런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웹툰의 원작에 달린 댓글들을 출력해 보여주면서  투자자들을 설득한 것이 효과를 봤다.”

‘신과 함께’를 영화로 제작한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는 “네이버웹툰에서 이미 검증받은 스토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신과 함께’는 한국에서만 14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지옥, 환생 등 아시아에서 익숙한 내세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원 대표의 말대로 웹툰은 지식재산권(IP·Intellectual Property)을 활용한 콘텐츠 비즈니스의 중추 역할을 맡고 있다. 국내 콘텐츠 생태계에서 웹소설과 웹툰은 영화나 드라마에 원작 스토리를 제공하고 있다. 황현수 포도트리 부사장은 “웹툰은 IP 비즈니스에서 트리거(trigger·방아쇠) 역할을 한다”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웹소설을 웹툰으로 만든 다음에 이를 활용해 영화, 드라마, 캐릭터 상품을 만드는 식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네이버 웹툰사업팀의 이희윤 리더도 “웹툰 시장 규모만 놓고 보면 굉장히 작다고 볼 수 있지만, 웹툰은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산업으로 가는 출발점”이라며 “웹툰은 수많은 이야기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는 원작의 팬덤을 안고 가기 때문에 실패할 위험이 적다. 카카오페이지에 연재 중인 ‘김 비서가 왜 그럴까’는 유료 독자만 480만 명에 달하는 인기 웹툰이다. ‘김 비서가 왜 그럴까’를 드라마로 제작하고 있는 본팩토리의 오광희 대표는 “한동안 드라마 한류가 시들했는데 ‘김 비서가 왜 그럴까’를 드라마로 만든다고 했더니 해외에서 굉장히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원작 웹툰의 팬덤이 워낙 강하다 보니 부담도 되지만 그만큼 기대치도 큰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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