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 하이바쯩 거리에 있는 뚜레쥬르 베트남 1호점 매장. 사진 이용성 차장
호찌민 하이바쯩 거리에 있는 뚜레쥬르 베트남 1호점 매장. 사진 이용성 차장

2월 24일 늦은 오후(현지시각) 베트남 최대 경제도시 호찌민의 관문 떤선녓국제공항에 도착해 입국 수속을 마쳤다. 수화물을 찾으러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서 시선이 멈춘 곳은 전면에 나란히 걸린 두 개의 대형 광고판이었다.

베트남의 ‘국민 영웅’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미드필더 르엉쑤언쯔엉 선수를 모델로 한 신한베트남은행(신한은행 베트남 법인) 광고와 ‘항상 당신 곁에(Always by your side)’라는 문구가 들어간 효성그룹 광고다. 대(對)베트남 외국인 직접투자(FDI) 1위(누적 기준) 한국의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블루오션’일 것 같았던 베트남 시장의 물빛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26.8%를 차지하는 중국에서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보복’과 미·중 무역전쟁 여파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국내 기업들이 앞다퉈 베트남 시장에 발을 들여놓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신남방정책’을 앞세워 이 같은 움직임을 부추겼다.

이에 따라 2002년 약 300개에 불과했던 현지 진출 국내 기업 수는 어느새 7000개를 넘어섰다. 호찌민에서 만난 국내 중견 제조업체 주재원은 “솔직히 (국내 기업이) 이제 그만 들어왔으면 좋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노이에서 만난 국내 금융사 직원은 “국내 은행 중 베트남에 안 들어온 곳은 혈액은행뿐”이라고 농을 쳤다.

하지만 베트남만큼 국내 기업에 유망한 미래 시장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1억을 바라보는 인구의 60% 이상이 35세 미만의 젊은층이란 것도 매력적이지만, 다른 동남아 국가와 달리 일본 기업의 진출 역사가 짧고 1979년 국경분쟁(중·월 전쟁)의 여파로 중국에 대한 견제심리가 강하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호찌민에서 만난 30대 초반의 베트남 여성은 “베트남 정부가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중·월 전쟁 승리를 크게 홍보하지 않는다”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1986년 3.35㎢(335㏊)였던 베트남 산업단지 전용 토지 면적은 지난해 800㎢로 20여 년 만에 230배 넘게 늘었다.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에 비례해 아직은 파이도 커지고 있다. 물론 철저히 분석하고 준비한 다음 진출을 고민해야 한다. 베트남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국내 기업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CJ│M&A와 프리미엄 전략으로 독보적 입지 구축

베트남의 1인당 GDP는 3000달러에 못 미치지만, 호찌민은 7000달러(약 790만원)가 넘는다. 경제 성장 속도가 빨라 내년에 1만달러를 찍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노이의 1인당 GDP는 5000달러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득이 증가하면 여가 활동에 대한 관심도 늘게 마련이다. 엔터테인먼트와 외식 산업이 주목받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CJ는 베트남 경제 성장의 주요 수혜기업 중 하나다.

2007년 호찌민의 상업지역인 하이바쯩 거리에 1호점을 낸 뚜레쥬르는 현재 베트남에 총 34개 매장(호찌민 22개, 하노이 12개)을 직영으로 운영 중이다. 국내 최대 경쟁사인 파리바게뜨의 베트남 매장 수는 15개다.

매장 수만 늘어난 것은 아니다. 진출 초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프리미엄’ 전략을 고집해 고급 베이커리 카페로 자리매김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의 무료 발레파킹 서비스를 처음 시작했고, 인근 지역 배달 서비스도 도입했다.

하이바쯩 매장에서 만난 축 응우옌이란 이름의 베트남 여대생은 “다양한 종류의 신선한 빵을 매일 맛볼 수 있어 좋다”며 “에그타르트를 특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뚜레쥬르가 한국 브랜드라는 걸 아느냐”고 물으니 “프랑스 브랜드인 줄 알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뚜레쥬르를 운영하는 CJ푸드빌의 나상천 베트남 법인장은 “한국 브랜드라는 걸 굳이 홍보하진 않는다”고 했다. 아쉽긴 하지만 프리미엄 브랜드로 입지를 다지려면 프랑스 브랜드라고 믿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 입맛에 맞는 메뉴 개발도 성공 요인이다. 나 법인장은 “베트남에서는 단팥이나 크림이 들어간 빵보다 식사 대용으로 먹을 수 있는 조리 빵(소시지와 치즈, 달걀 등이 들어간)이 인기”라고 귀띔했다. 우리나라 이상으로 생일파티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케이크 매출 비중이 높고, 대형 케이크가 주를 이루는 것도 특징이다.

국내 최대 멀티플렉스인 CJ CGV와 CJ제일제당은 현지 업체 인수·합병(M&A)을 통해 현지화 과정을 앞당기며 압축 성장한 케이스다.

호찌민의 대형 쇼핑몰 반한(Van Hanh) 몰 6층에 입점한 CGV는 국내 여느 CGV 상영관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레트로 빈티지’로 불리는 CGV 특유의 복고적인 디자인 콘셉트를 전 세계 상영관에 일괄적으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20~30대 젊은 커플이 주를 이루는 풍경도 비슷했다. 심준범 CJ CGV 베트남 법인장은 “베트남의 1인당 영화 관람 횟수는 연간 0.5회로 우리나라(4.3회)의 8분의 1 수준”이라며 “젊은층이 영화를 많이 보기 때문에 평균 연령이 낮은 베트남 영화 시장의 성장 잠재력은 매우 크다”고 말했다.

CGV는 2011년 7월 현지 1위 멀티플렉스인 ‘메가스타’를 인수하며 베트남에 진출했다. 7년여 만에 베트남에서만 총 73개 상영관을 운영하며 스크린 수 기준 45%의 점유율로 현지 1위 멀티플렉스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지난달 베트남 관객 319만 명으로 역대 최고 월 박스오피스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CGV는 배급 업무도 겸하고 있다. 배급 시장 점유율은 65%로 독보적이다.

CJ제일제당은 생산시설과 유통망을 갖춘 현지 유력업체를 잇달아 인수해 현지화를 앞당겼다. 2016년 현지 1위 김치 업체인 킴앤킴과 냉동식품업체 까우제를 잇따라 인수한 데 이어 2017년엔 수산가공식품업체 민닷푸드를 사들였다. 까우제가 생산하는 ‘짜조(스프링롤)’는 지난해 베트남 짜조 시장에서 점유율 50%로 1위를 차지하는 등 급성장했다. 또 까우제 생산공장을 통해 ‘비비고 만두’를 선보이는 등 현지식 만두(스프링롤, 딤섬)와 한국식 만두의 ‘투트랙 전략’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


호찌민 시내의 신한은행 지점. 사진 이용성 차장
호찌민 시내의 신한은행 지점. 사진 이용성 차장

신한은행│현지인 직원 97%…차원이 다른 현지화

국내 기업 중 ‘박항서’ 효과 덕을 가장 톡톡히 본 곳은 신한은행이다.

신한은행은 지난해 글로벌 부문에서 3215억원의 영업이익으로 KEB하나은행(2855억원)을 제치고 국내 은행 중 1위를 차지했다. 1년 전과 비교해 36.8% 증가한 규모다.

신한은행이 글로벌 시장에서 빼어난 성적을 거둔 것은 베트남 덕이다. 신한베트남은행이 지난해 964억원의 순이익을 올리며 2017년 같은 기간보다 두배 성장했다. 이에 따라 글로벌 순이익에서 베트남이 차지하는 비중도 2017년 20%에서 지난해 30%로 커졌다.


신한베트남은행은 120만 명의 현지 고객을 확보해 베트남 외국계 은행 가운데 1위를 달리고 있다. 여기에는 ‘박항서 효과’도 한몫했다. 신한베트남은행의 광고모델인 박항서 감독은 지난해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4강, 스즈키컵 우승을 이끌며 베트남의 국민 영웅이 됐다.

한호성 신한베트남은행 부행장은 “뱅킹 고객이 작년에만 20% 늘었다”며 “베트남에서 박항서 감독님의 인지도와 호감도가 유명 연예인을 능가하기 때문에 큰 도움을 받은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항서 효과보다 본질적인 성장의 원동력은 1990년대부터 시작된 현지화 노력이다.

신한베트남은행의 현지 직원 비중은 지난해 말 현재 97%까지 늘었다. 30개 점포 가운데 17곳에서 베트남인이 지점장을 맡고 있다. 현지 금융사를 인수해 덩치를 키우는 데도 집중한다. 지난 1월에는 업계 4위인 베트남 푸르덴셜소비자금융(PVFC) 지분 100% 인수에 대해 현지 금융당국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

베트남 정보기술(IT) 기업들과 제휴해 젊은 세대를 공략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이를 위해 현지 1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잘로’, 가입자 500만 명 이상을 확보한 전자금융 플랫폼 ‘모모’, 부동산 플랫폼 ‘무하반나닷’ 등과 해외 송금, 간편 대출 등 핀테크 상품을 공동 개발해 현지 플랫폼에서 제공하고 있다.


고무나무 숲에 둘러싸인 동나이성 연짝공단의 효성 베트남 공장. 사진 이용성 차장
고무나무 숲에 둘러싸인 동나이성 연짝공단의 효성 베트남 공장. 사진 이용성 차장

효성│독자 기술 개발과 세제 혜택

호찌민에서 차로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동나이성 연짝공단의 효성 베트남 공장은 축구장 80개를 합쳐놓은 것과 비슷한 엄청난 규모(57만4564㎡)부터 범상치 않았다.

공장에서 제일 높은 고상중합탑에 오르니 주위를 둘러싼 빽빽한 고무나무 숲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고상중합탑은 폴리에스테르칩을 녹여 타이어 섬유 코드용 폴리에스테르 섬유를 만드는 거대한 장비다.

이 공장은 2개 품목에서 ‘글로벌 넘버원’ 기록을 갖고 있다. 타이어의 핵심 부품인 섬유 코드와 고탄력 합성섬유인 스판덱스에서 단일 공장 생산량으로 세계 1위다. 효성의 타이어 코드는 글로벌 시장 점유율 45%로, 피렐리·미쉐린·한국타이어 등 글로벌 타이어 업체에 납품된다. 2017년 기준으로 전 세계 자동차 타이어 2개 중 1개에 효성 제품이 들어가는 셈이다.

효성은 이곳에서 생산하는 제품 70%를 수출한다. 항구와는 거리가 있지만, 공단 근처를 흐르는 강의 수심이 컨테이너 선박이 다닐 만큼 깊어 운송이 쉽다. 인근 롱탄국제공항 조성이 예정대로 2025년 개항하면 접근성이 더욱 좋아질 전망이다.

타이어 코드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대의 방사기와 연직기가 굉음과 열기를 뿜어내며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방사기가 수천 가닥의 실을 돌돌 감아 실타래를 만들면, 연직기가 베틀로 짜듯 실을 가로 세로로 엮어 직물 형태를 만든다.

효성 베트남은 공단 신설 다음 해인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11년 연속 흑자를 기록 중이다. 2014년부터는 매년 1조원 이상 매출과 20%가 넘는 영업이익률을 내고 있다. 2017년 기준 효성 전체 매출 12조5464억원, 해외 법인 매출 6조1169억원 가운데 베트남 법인(동나이법인 포함)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14%, 29%에 달했다.

효성 베트남 법인의 김남기 차장은 “효성은 오래전부터 타이어 코드 분야의 앞선 기술을 사오는 대신 독자 기술 개발에 주력했다”며 “이로 인해 신속한 고객 대응이 가능해진 것은 물론 개발 단계에서부터 선제적인 영업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베트남 정부의 친기업적 세제 혜택도 큰 역할을 했다. 효성 동나이 공장의 경우, 설립 후 15년간 법인세 감면 혜택을 적용받고 있다. 첫 4년은 법인세율 0%, 이후 9년은 5%, 마지막 2년은 10%를 낸다. 설립 16년 이후에야 정상 법인세(20%)를 낸다. 15년 동안 한국 법인세(최고세율 25%)의 20~40% 수준만 내고 공장을 가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노이 롯데호텔 38층 스카이리셉션에서 바라본 하노이 시내. 사진 이용성 차장
하노이 롯데호텔 38층 스카이리셉션에서 바라본 하노이 시내. 사진 이용성 차장

롯데│한국인과 한류 팬을 위한 모든 것

롯데센터 하노이는 지난 2014년 완공된 초고층 복합빌딩이다. 지하 5층, 지상 65층인 이 건물은 높이가 272m에 달하는 하노이의 야경 명소로 자리 잡았다. 건물 디자인은 베트남 전통 의상인 ‘아오자이’를 모티브로 했다. 롯데센터 하노이 내부에는 롯데마트와 백화점, 레지던스 및 호텔이 들어 서 있고, 최상층인 65층에는 전망대와 투명한 바닥 위에 서서 아찔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스카이워크도 있다.

미·북 정상회담이 열렸던 지난달 27일 하노이 롯데호텔에는 빈방이 없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기업의 출장 관련 수요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만, 건물 전체가 관광명소로 알려진 데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외국인 투숙객의 비중도 꾸준히 늘고 있다.

임성복 롯데호텔 하노이 총지배인은 “세련되고 세심한 한국식 서비스가 가장 큰 장점”이라며 “짜장면과 해물라면, 치킨 등 한국식 메뉴도 맛볼 수 있다”고 말했다.

건물 지하 롯데마트에는 베트남 커피와 조미료 등 귀국 선물을 사러 온 한국인 여행객과 장을 보러 온 현지인들로 북적였다. 지난해 베트남 중부 다낭 여행 중 현지 롯데마트에서 본 것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하노이의 한국인 인구는 7만 명을 헤아린다. 호찌민은 10만 명을 넘긴 지 오래다. 참고로 뉴욕과 로스앤젤레스(LA)에 이은 미국 3위 대도시 시카고의 한인 인구는 약 5만 명이다.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는 유동인구도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데다 현지 ‘한류 팬’ 수요까지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접근법이다. 롯데마트는 베트남에서 총 13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150억원으로 1년 전보다 두 배 가까이 성장했다.

이용성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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