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 고려대 경제학, 외교통상부 기획조정실장, 청와대 외교비서관, 주베트남 대사 사진 한·아세안센터
이혁
고려대 경제학, 외교통상부 기획조정실장, 청와대 외교비서관, 주베트남 대사 / 사진 한·아세안센터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인은 ‘쉽게 친해지기 어렵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런데도 호감도와 신뢰도에서 일본을 따라갈 나라는 없다.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물건만 잘 만들어선 안 된다. 상대국과 서로 도와가며 시장의 파이를 키워가야 존경받을 수 있다.”

이혁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은 한국이 베트남 시장에서 롱런하는 방법을 묻는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외교부의 브레인이자 대표적인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전문가로 꼽힌다. 지난해 4월 임기 3년의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에 부임하기 전까지 주베트남·주필리핀 대사, 외교부 기획조정실장과 아시아·태평양 국장, 청와대 외교비서관 등을 역임했다. 주일 대사관 공사 출신으로 베트남을 비롯한 아세안 지역에서 일본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이해도 깊다.

외교부 산하 국제기구인 한·아세안센터는 지난 2009년 출범해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한국 기업의 아세안 진출을 돕고 역내 투자와 인적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사무총장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8층 한·아세안센터에서 인터뷰했다.


1년 전까지 베트남 대사를 역임하다 한·아세안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베트남 경제에 대해 달리 보이는 부분이 있나.
“아세안 국가 중에서 한국이 단연 선전하고 있는 나라가 베트남이다. 인도네시아와 태국 등 동남아 다른 나라에서는 일본과 한국에 대한 인식의 격차가 매우 크다. ‘후쿠다 독트린’을 앞세워 40년 넘게 동남아 시장에 공을 들여온 일본과 우리나라의 위상이 같을 수는 없다. 베트남은 1975년까지 베트남전쟁을 치르고 1986년에 ‘도이머이((Doi Moi·새로운 변화라는 뜻)’ 개혁·개방정책을 시행하는 등 일본 진출 역사가 짧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많았다.”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는 1977년 동남아 6개국 순방의 마지막 국가였던 필리핀에서 “일본은 군사 대국이 되지 않을 것이며 아세안 회원국들과 정치·경제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마음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진정한 친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은 이 같은 내용의 ‘후쿠다 독트린’을 바탕으로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와 투자를 크게 늘렸고 대중음악과 애니메이션, 패션 등 ‘소프트 파워’로 동남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베트남의 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나.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는 모습만 봐도 경제 활력이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다. 수도 하노이와 최대 경제도시 호찌민의 도시철도 공사도 한창이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생산기지 역할에 머물러 왔지만, 최대 민간기업인 빈그룹이 부동산과 유통은 물론 자동차와 스마트폰 사업에도 손을 뻗으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고무적인 변화다.”

베트남이 ‘제2의 중국’이 될 수 있을까.
“그러기엔 사이즈가 아쉽다. 동남아시아에서 큰 나라긴 하지만 인구가 1억명이 안 된다. 기술력이나 물적·인적 자원에서도 중국처럼 성장하기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의사 결정 속도에서도 중국과 차이가 크다.”

어떻게 다른가.
“중국에선 모든 결정이 중앙집권적으로 빠르게 이뤄진다. 자연히 사업 진행 속도도 빠르다. 예를 들어 지도부에서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기로 했다면 그걸로 끝이다. 반대 의견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아마 속전속결로 6개월이면 공사가 마무리될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은 다르다. 만장일치 제도를 기본으로 해서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진행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또 전쟁으로 오랜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주민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문화가 있다. 끝까지 교섭하고 타협해가며 진행하기 때문에 진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베트남을 6억명 아세안 시장의 진출 교두보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아세안 국가 간 경제통합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유럽연합(EU) 수준의 통합을 당장 기대하긴 어렵다. EU의 경우 회원국이 경제통상 정책에 대한 주권을 상당 부분 이양했지만 아세안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아세안은 1967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등 5개국으로 출발했다. 1984년 브루나이에 이어 베트남(1995년), 라오스·미얀마(1997년), 캄보디아(1999년)가 차례로 가입하면서 10개국 체제가 됐다. 이후 꾸준히 역내 경제 통합을 추진해 2010년 아세안자유무역지대(AFTA)가 탄생했고, 2015년 말 아시아판 EU를 지향하는 아세안경제공동체(AEC)가 출범했다. 민감 품목을 제외한 상품 교역의 역내 평균 관세율을 0%에 가까운 수준으로 낮췄고, 2025년까지는 단일 경제권을 구현한다는 계획이다.

반대로 한국과 아세안의 교역에서 ‘베트남 쏠림’ 현상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정부는 국가 간 협의를 통해 투자와 교역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투자 결정은 기업이 하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 베트남 투자 환경이 낫다고 판단해 그쪽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면 막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큰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베트남에서 우리 기업 투자가 늘어난 것은 긍정적으로 봐야 할 것 같다.”

290억달러(약 32조6600억원)에 달하는 대(對)베트남 무역흑자가 한-베트남 관계에 악재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무역 구조가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숫자만으로 무역수지의 건전성을 판단할 수는 없다. 베트남 최대 수출 기업은 삼성전자로, 전체 수출의 25%를 담당한다. 삼성전자가 한국산 부품을 수입해 베트남 수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면 베트남 경제에도 나쁠 것은 없다. 현재 한-베트남 무역 기조는 건전성 면에서 나쁘지 않아 보인다.”

베트남을 비롯한 아세안 시장에서 우리 기업이 더 성장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한국 관련 이미지가 모든 면에서 수준 높게 자리 잡아야 한다. 아세안 지역에서 한류 드라마와 K-팝의 인기는 여전히 뜨겁지만, 한국에 대한 신뢰가 일본만큼 높진 않다. 한국도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아세안 시장에서 파이를 키워가며 함께 성장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에 아세안 국가 출신 유학생 2만 명이 공부하고 있는데 앞으로 더 늘려야 할 것이다. 지난해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스즈키컵(2018 동남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십) 결승에서 일부 말레이시아 교민이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을 응원해 현지인에게 비난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국익을 생각한다면 그래서는 안 된다.”

이용성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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