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야 하는 타이밍 같습니다.”

“위험하지만 들어갈 만합니다.”

“실험실과 양산은 다르니까 신중합시다.”

“기술이 뛰어나니까 지금 더 투자해야죠.”

2020년 3월의 어느 날, 서울 성수동에 있는 벤처캐피털(VC·Venture Capital) ‘DSC인베스트먼트’ 회의실. 투자 논의를 위해 모인 심사역들 사이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투자하자는 의견과 하지 말자는 의견이 반으로 갈려 치열한 공방을 이어 갔다. 심사 대상에 오른 스타트업은 2차전지 소재 개발사인 ‘에스엠랩(SMLAB)’. 삼성SDI 책임연구원 출신으로 2차전지 소재 분야에서 세계적 석학으로 인정받는 조재필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에너지화학공학부 교수가 2018년 7월 창업한 회사다.

에스엠랩의 기술력을 알아본 투자사들이 이미 세 번의 투자를 진행한 상태였다. DSC인베스트먼트도 초기 투자에 참여했고, 이날 회의는 소재 양산을 앞둔 에스엠랩에 70억원 규모의 후속 투자를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가장 큰 걸림돌은 당시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갔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많은 VC가 경기 상황이 안정되길 기다리며 투자 대신 관망을 택하던 때였다. 여기에 양산 소재의 퀄리티를 실험실 수준으로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도 추가 투자를 반대하는 근거로 쓰였다. 투자 찬성파는 곧 만개할 전기차 시대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점, 어려울 때일수록 기술력이 확실한 스타트업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점 등을 이유로 댔다.

고심 끝에 DSC인베스트먼트는 추가 투자에 참여하기로 했다. 한국투자파트너스, 스틱벤처스, SV인베스트먼트, 뮤렉스파트너스 등도 투자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약 반년이 지난 현재 에스엠랩은 전 세계 전기차 기업들이 러브콜을 보내는 스타트업으로 한 단계 도약했다. 윤건수 DSC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VC의 숙명”이라며 “유망 스타트업의 질주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시총 상위 싹쓸이한 美 VC 우등생들

VC는 용어 그대로 ‘벤처기업에 자본을 공급하는 존재’다. 비상장 스타트업에 투자해 기업 성장의 과실을 함께 누리는 존재이며, 달리는 말보다는 달릴 준비를 하는 말에 올라타 가속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존재다. 고위험(high risk)을 감수해 고수익(high return)을 추구하는 모험 자본의 전형이 VC다. 스마트폰 시대를 연 애플도, 그 스마트폰을 두드려 온갖 배달음식을 즐기게 하는 배달의민족도, VC가 없었다면 지금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

성공 사례 위주로 접하다 보니 VC 생태계가 폼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쟁터다. 미국 유명 VC인 앤드리슨 호로비츠는 연간 약 3000개의 스타트업을 검토한다. 그중 향후 연 매출 1000억원 이상 규모로 성장하는 회사는 평균 15개에 불과하다. 나머지 2985개는 간신히 연명하거나 조용히 사라진다. 프랑스 경영대학원 인시아드(INSEAD)에 따르면 VC가 집행하는 투자액 가운데 65%는 손실과 함께 공중분해된다. 앞에서 본 DSC인베스트먼트 심사역들의 갑론을박이 현실 속 VC의 진짜 모습이다.

2018년 미국 증시의 시가총액은 3경7000조원(세계은행 기준)이고, 미국 채권 시장의 시가총액은 12경원(미국증권업금융시장협회 기준)이었다. 그리고 미국 VC의 운용 자산은 484조원, 투자 가능 자산은 120조원이었다. 정리하면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미국 VC 시장도 상장 주식의 1.7%, 채권의 0.5% 규모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미국 증시 시가총액 상위 5개 기업인 애플·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알파벳(구글)·페이스북은 모두 VC의 도움을 받고 작은 스타트업에서 거대 공룡으로 성장한 승자다. 이렇듯 VC가 추구하는 모험 자본주의는 치열하고 살벌하지만, 동시에 달콤하다.

재벌 기업 위주로 산업 경쟁 구도를 만들어온 우리나라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유가증권 시장 시가총액 상위 5개 기업(2020년 8월 26일 종가 기준) 가운데 스타트업 출신은 네이버(NAVER) 한 곳에 불과하다. 물론 국내 VC 산업도 매년 성장세를 보인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019년 신규 벤처 투자액은 4조2777억원으로 역대 최고치였던 2018년의 3조4249억원보다 25% 증가했다.


일자리 창출 능력도 뛰어나

올해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으로 벤처 투자가 잠시 주춤한 상태이긴 하나 VC의 스타트업 육성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멈추면 혁신 기업의 탄생도 요원해진다는 걸 정부도, 투자 업계도 안다. 꼭 구글이 아니더라도 잘 키운 스타트업은 우리 사회에 어떤 형태로든 기여할 수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 벤처기업 일자리는 지난해 6월 말보다 2만7319개(4.3%) 늘어난 66만7699개였다. 고용 정보 제공에 동의하지 않은 기업 3485개의 추정 일자리까지 더할 경우 약 73만 개의 일자리를 벤처기업이 맡은 셈이다. 이는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그룹의 상시근로자 69만여 명보다 많은 수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국내외 경기가 침체된 요즘 같은 시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코노미조선’이 VC 산업에 관한 커버 스토리를 기획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코로나19가 재확산하며 국민의 절망감이 커졌지만 우리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산책조차 두려운 요즘 같은 시기일수록 창업가와 VC의 모험 정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어두운 터널은 언젠가 끝날 테고 새로운 기회는 찾아올 것이다. VC 생태계에서 무럭무럭 자란 한국의 혁신 기업들이 국내외의 많은 기회를 선점하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이코노미조선’은 VC 세계가 움직이는 방식을 살피고 그 안에서 투자사와 스타트업이 만드는 하모니를 소개한다. 스타트업이 원하는 VC와 VC가 바라는 스타트업의 모습도 각자 입장에서 들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진정성과 열정을 이야기했다. 물론 실력은 기본이다. 또 VC 시장의 진화 양상을 점검하고 정부의 관련 정책 동향을 들여다봤다. 5명의 VC 대표이사가 다양한 주제로 지상 대담을 했다. 잘 자란 스타트업 하나가 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는 매일 목격한다. 이번 기획을 접하는 독자 중에도 미래의 일론 머스크가 있길 바란다.

전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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