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1월, 마흔셋의 산부인과 의사였던 신창재는 18년간 함께 했던 흰 가운을 벗고 경영자의 길에 나섰다. 당시 암투병 중이던 선친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가 “이제 그만 가업을 이으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천직으로 알았던 의사의 길을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은 컸지만 결단은 빨랐다. 1993년 선친이 담도암 진단을 받았을 때 대산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일종의 ‘경영수업’을 했다.
그때 경험이 CEO직에 대한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줬다. 생명을 다루는 업(業)은 의사나 생명보험이나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올해는 신창재 회장이 의사에서 경영인으로 변신한 지 20년이 되는 해다. 신 회장은 1996년 교보생명 부회장으로 경영에 참여한 뒤 2000년 5월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다.
2000년 당시는 교보생명이 2540억원의 적자와 2조4000억원에 이르는 자산손실을 내는 등 말 그대로 파산 직전이었다. 스스로 “보험업에 무지했던 게 축복”이라고 말하는 신 회장은 20년간 교보생명을 한국 금융회사 중에서 가장 신용등급이 높은 회사로 발전시켰다.

취임 당시 3500억원 수준이던 교보생명의 자기자본은 최근 7조원으로 20배 가량 불어났다. 대표적인 수익성 지표인 자기자본이익률(ROE)은 작년 말 기준 11.06%로 2004년 이후 생명보험사 빅3(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중 1위를 지키고 있다.
<이코노미조선>은 저금리와 저성장, 저출산의 3저(低) 파고를 넘어설 새로운 성장 전략을 모색 중인 신 회장을 단독 인터뷰 했다.
인터뷰는 유필화 성균관대 경영학과 교수와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신창재 회장은 “IMF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등 두 번의 위기를 헤쳐오면서 회사의 성장기반을 마련한 것과 새로운 보험문화를 선도해 온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신창재 회장은 “IMF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등 두 번의 위기를 헤쳐오면서 회사의 성장기반을 마련한 것과 새로운 보험문화를 선도해 온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2월 12일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본사 3층 회의실에서 유필화 교수를 맞이한 신 회장은 아들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재계에서는 신 회장의 장남 중하(35)씨가 지난해 교보생명 자회사에 입사한 것을 두고 경영승계 수업에 돌입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다. 신 회장은 이에 대해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CEO는 기업 경영에서 가장 큰 권한과 책임을 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경영능력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 회장은 “경영을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CEO를 맡기겠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며 “자식도 충분한 경영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후보가 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또 아들 중하씨가 충분한 경영능력을 갖추려면 오랜 시간과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경영자가 된 지 벌써 20년이 됐습니다. 2000년 회장 취임 당시 교보생명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회장 취임 이후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고 오늘날 교보생명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회장 취임 당시 교보생명은 IMF 외환위기 여파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업계에서 관행처럼 여기는 허울뿐인 시장점유율 경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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