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정보기술(IT) 업계가 대요동치고 있다. 초대형 인수합병(M&A)이 잇따르고 있고, 피아(彼我) 구분 없는 특허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신사업·신기술 선점을 위한 속도경쟁이 불을 뿜고 있다. 나아가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기업들끼리는 제휴와 동맹을 맺어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애플, 구글 등 글로벌 강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IT 세계대전’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만큼 총성과 포연이 난무하고 있다. IT산업 역사상 가장 긴박하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전쟁 양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워낙 이슈가 많은 데다 역학관계도 미로와 같아 IT업계 관계자들조차 정세를 가늠하기 힘들다는 푸념을 할 정도다. 도대체 지금 세계 IT업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글로벌 IT산업 유례 없는 대격랑

IT 신세계 주도권을 잡아라

공격…반격…전선이 타오른다

최근 세계 IT업계에 빅뉴스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IT업계의 이단아이자 혁명가인 스티브 잡스가 애플 CEO에서 사임했고, 구글은 한때 이동통신 단말기의 선두주자였던 모토로라 모빌리티(휴대전화 사업부)를 인수했으며, 세계 최대 PC 제조업체인 휴렛팩커드(HP)는 PC사업 분사(혹은 매각)를 발표했다. 글로벌 IT산업에 메가톤급 파장을 미칠 만한 사건들이 불과 한 달 안에 일어난 셈이다. 이 사건들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는 있다. 세계 IT업계에서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HP가 PC사업을 접고, 모토로라가 휴대전화 사업을 판다는 사실은 IT업계의 변화무쌍한 속성을 잘 보여준다. 다른 어떤 산업보다 변화 속도가 빠른 IT산업에서는 어제의 성공이 오늘의 성공을 결코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흐름을 타면서 시의적절하게 비즈니스 구조를 바꿔나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기존 사업을 내다팔고 새로운 사업을 품에 안는 유연한 사업 리모델링은 필수다. 지금 글로벌 IT업계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사업매각과 인수합병 러시는 그런 교훈을 웅변한다.

HP가 PC사업 분사 혹은 매각 방침을 세운 것은 이유가 딱 하나다. 돈이 안 벌리기 때문이다. 한국HP 관계자는 “HP의 다른 사업들은 영업이익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 중인데 PC사업은 5%에 불과하다. PC시장의 경쟁이 워낙 치열해 이익을 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HP의 PC사업은 전체 매출액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핵심사업이다. 하지만 이익이 나지 않는 사업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게 HP의 판단이다. HP는 2002년 컴팩을 인수하면서 세계 최대 PC업체에 등극했지만 불과 10년도 안돼 PC사업에서 손을 떼게 된 셈이다. 대신 HP는 기업용 IT서비스 및 소프트웨어 사업에 역점을 둔다는 계획이다.

특히 세계 IT업계의 새로운 조류로 부상한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 사업을 강화해나갈 것이라고 한다. 클라우드 컴퓨팅은 소프트웨어나 데이터를 컴퓨터가 아닌 데이터센터(클라우드)에 저장해뒀다가 필요할 때마다 인터넷을 통해 접속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면 언제 어디서든 소프트웨어와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최근 IT업계가 큰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다.

사업을 매각하는 쪽이 있으면 인수하는 쪽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선지 최근 몇 년 사이 IT기업들의 M&A가 아주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특히 글로벌 강자들의 식욕이 매우 왕성한 것으로 나타난다. IT업계의 한 관계자는 “구글, 애플, MS 등 글로벌 IT기업들은 사업확장 과정에서 M&A를 통해 자신들이 못 가진 기술을 많이 확보해왔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후반까지 IT업계의 ‘M&A 대왕’은 마이크로소프트(MS)였지만 최근 몇 년간은 구글이 그 바통을 이어받고 있다. 구글은 2009~2010년 검색, SNS, 광고, 모바일 플랫폼, 클라우드 컴퓨팅 분야의 기업들을 대거 인수했다. 올해 역시 18개의 기업을 인수했는데, 눈에 띄는 건 주로 미디어 콘텐츠 관련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을 사들였다는 점이다.

 - HP의 레오아포테커 사장. 세계 최대 PC업체인 HP는 PC사업 분사 또는 매각 계획을 발표했다.

구글, MS의 무서운 M&A 행진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이기훈 연구원은 “미디어 콘텐츠를 강화·관리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하는 시도는 결국 ‘구글TV(스마트TV)’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구글TV와 모바일 기기를 중심으로 한 ‘N-스크린(여러 단말기에서 동일한 콘텐츠를 끊김 없이 즐길 수 있는 서비스)’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구글에 왕좌를 내준 듯하지만 MS의 M&A 행보도 여전히 과감하다. 최근 가장 눈길을 모은 M&A는 세계 최대의 무료 인터넷 전화업체 스카이프 인수일 것이다. 스카이프는 MS의 주력사분야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 구글이 모토로라 모빌리티를 인수하기 전에도 두 회사는 스마트폰 분야에서 협력관계를 이어왔다. 2010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스마트폰 드로이드X 공개 행사에 참석한 구글과 모토로라의 최고경영진.

최근 글로벌 IT 거인들의 M&A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기존 주력사업과 다른 분야의 기업을 차례차례 쇼핑하고 있다는 점이다. IT산업은 크게 콘텐츠, 플랫폼, 단말기라는 3단계의 밸류체인을 형성한다. 그런데 요즘 IT기업들의 M&A를 보면 이 밸류체인을 스스로 수직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IT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세계 IT업계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M&A 러시는 기존 사업 울타리를 넘어 연관 사업을 모두 ‘내재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며 “문제는 서로 밸류체인 통합에 나서면서 기업들의 충돌과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서로 다른 영역을 향한 IT기업들의 M&A 러시가 새롭고 거대한 ‘전쟁터’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풀이다.

사실 M&A 러시는 IT업계의 전쟁 요인 가운데 표면적인 부분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M&A 러시의 이면에 있는 본질적인 원인이 ‘IT 세계대전’을 촉발하는 진짜 배경이라는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

그건 바로 IT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 개인용컴퓨터(PC)가 처음 등장한 이래 정보화 물결은 PC에서 휴대전화, 인터넷을 거쳐 이제 스마트기기 시대에 도달했다. 디지털 혁명이 집과 사무실을 벗어나 ‘모바일’ 단계까지 이르렀다는 뜻이다.

사실 애플 아이폰 등장 이전까지는 세상 사람들에게 PC와 인터넷, 휴대전화가 디지털 혁명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 3가지를 한데 묶은 스마트폰, 태블릿PC가 출현하면서 새로운 디지털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말하자면 ‘모바일 컨버전스(Mobile Convergence)’ 시대의 도래다. 모바일 컨버전스는 IT산업의 ‘게임의 룰’을 근본적으로 바꿔나가는 핵심 동인이다. 그러다 보니 IT산업 자체의 구조까지 뒤흔들어놓고 있다. 당연히 새로운 질서를 주도하려는 IT기업들의 야망이 넘실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1~2년 사이 스마트폰, 태블릿PC에 적용되는 기술과 디자인을 놓고 세계 주요 IT기업들 사이에 ‘특허전쟁’이 불을 뿜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거대한 시장을 먼저 장악하고 미리 경쟁자들을 배제하려는 전략인 것이다.

부품공급업체와 완제품업체로서 끈끈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오던 삼성전자와 애플 사이의 특허분쟁은 IT업계에서 전개되고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대결 양상을 여실히 입증하는 사례다. 물론 애플이 스마트폰, 태블릿PC 시장에서 삼성전자 제품의 추격이 거세지자 아예 협력관계까지 끊을 요량으로 나섰기 때문에 벌어진 분쟁이다.

최근 모바일 시장의 특허소송에 가장 많이 연루돼 있는 기업은 다름아닌 애플이다. 아이폰, 아이패드가 잇달아 대박을 치면서 모바일 시장의 기린아로 부상한 게 결정적인 배경이다. 애플은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고 당하기도 한다. 유수의 IT기업들이 애플과 얽히고 설킨 특허 난타전을 전개하고 있다. 애플은 2009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특허소송에 휘말린 기업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 IBM의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많은 IT기업들이 클라우드 컴퓨팅에서 미래를 도모하고 있다.

전쟁에는 적군도 있지만 동맹군도 있는 법이다. 서로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IT기업들은 IT 전쟁의 거센 파고를 전략적 제휴와 동맹 결성으로 헤쳐나가는 중이다. 스마트폰 운영체제(OS) 분야에서 구글 진영과 반(反) 구글 진영이 대결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자체 스마트폰 OS를 갖고 있는 애플과 MS 등 반 구글 진영은 구글 OS(안드로이드)를 무상으로 사용하는 구글 진영을 맹공격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애플, MS, 림, 소니, 에릭슨이 6000여개의 모바일 관련 특허를 보유한 세계 유수의 통신장비업체 노텔을 공동으로 인수하기도 했다. 노텔의 통신기술 특허를 활용해 구글 진영을 공격한다는 복안에서 이뤄진 일이다.

‘동맹군’ 결성해 IT 파고 넘는 모습도

구글 진영의 맹주인 구글도 곧장 반격에 나섰다. 지난 8월 모토로라 모빌리티 인수가 바로 카운터펀치였다. 모토로라 모빌리티는 1만7000여건의 특허를 보유한 기업이다. 애플 진영이 인수한 노텔보다 3배나 많은 특허를 갖고 있다. 3G(3세대), 4G(4세대) 통신기술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는 모토로라 모빌리티는 반 구글 진영의 특허공세로부터 구글 진영을 보호하는 방어막 구실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핵심 원천기술을 다수 보유한 IT기업간에는 서로 특허를 교차 사용하는 특허동맹도 맺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삼성전자와 IBM의 동맹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 IBM과 양사의 특허를 교차 사용하는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미국 특허등록 건수에서 지난 수년간 나란히 1, 2위를 차지해온 IBM과 삼성전자의 특허동맹은 그야말로 사상 최강으로 주목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외에도 샌디스크, 도시바, 퀄컴, 코닥, 샤프 등 글로벌 유수 IT기업들과 크로스 라이선스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글로벌 IT 전쟁은 향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상당수 전문가들은 현재 세계 IT산업이 모바일 컨버전스, 클라우드 컴퓨팅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초기에 들어선 상황이어서 앞으로의 업계 판도를 쉽사리 예단하기는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다만 한발 앞서 시장을 내다보고 대처하는 혁신 역량을 보유한 기업이 결국 신(新)질서의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김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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