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기업의 수명은 30년이라고들 말한다. 세대를 구분 짓는 기준이 약 30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한다는 의미다. 1960년 이후 세계 100대 기업의 30년간 잔존율이 38%에 불과하다는 통계는 ‘기업 수명 30년’ 이론을 뒷받침해 준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1965년 국내 100대 기업 가운데 1999년까지 100대 기업으로 잔존한 기업은 13개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상위 10대 대기업 집단 가운데 현재까지 동일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 집단 역시 삼성과 LG 뿐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살아남은 기업이라는, 즉 기업의 생존이라는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오래 살아남아 있으며 현재는 어떠한 모습이냐가 더욱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성장세를 유지하며 대박은 아닐지라도, 단 한 차례의 적자도 기록하지 않고 흑자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기업들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이코노미플러스>는 창업 원년부터 무적자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기업들의 DNA를 분석한다. 40년 이상 창업 무적자 기업으로 한정했다. 79년 무적자 신화의 유한양행을 비롯해 태평양(60년), 샘표식품(59년), LG화학(58년), 대한전선(50년), 한독약품(51년), 신도리코(45년), 한일시멘트(44년)가 그 주인공들이다.

 Part Ⅰ{ “1등의 오만보다 2등의 겸손이 차라리 낫더라” }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국내 최대 규모의 대형 서점 교보문고의 중앙복도 좌측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경제·경영 관련 서적들이 독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당시와 최근 몇 년간 저성장이 계속되면서 이 코너엔 부쩍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특히 주식·부동산 등 투자기법과 성공사례 등을 기술해 놓은, 즉 부자가 되는 방법에 관한 서적은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있다.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기술해 놓은 서적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컨설팅 관련 서적도 그 수가 늘었다. 개인은 물론 기업의 성공사례를 통해 현재의 경기침체를 극복해 보려는 의도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경제·경영 서적 가운데 국내기업과 기업인의 성공사례를 분석해 놓은 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기껏 삼성전자와 포스코 등 몇몇 기업에 한정된 서적이 눈에 띌 뿐이다. 대부분 도요타, GE, 스타벅스 등 다국적 기업과 워렌 버핏, 하워드 슐츠, 잭 웰치 등 외국CEO의 성공사례에 집중돼 있다. 각종 컨설팅 관련 서적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성공적인 경영 혹은 마케팅전략으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는 국내기업이 없기 때문인가? 그것은 아니다. 소위 선진기업, 일류기업, 우량기업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밖으로만 향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규모로 대상을 재단(裁斷)해 버리는 버릇이 개발연대를 거치면서 어느덧 습관처럼 자리 잡아버렸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가 지난해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복사기·복합기 제조업체인 롯데캐논 안산공장을 찾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계의 좋다는 공장은 다 가 봤는데 여기 시스템이 가장 낫다’며 이 상무가 감탄하더라는 게 롯데캐논 관계자의 말이다.

 도요타, 소니 등 세계 최고의 기업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지 못하지만 최고의 시스템으로 최고의 생산력을 발휘하고 있는 기업들은 이처럼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동안 밖에서만 찾으려 했던 벤치마킹의 대상을 이제는 안에서, 우리의 곁에서 찾는 한편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도 바뀌어야 함을 일깨워 준다. 

 오는 3~4월 정기주총을 앞둔 기업들은 지금 막바지 결산준비에 한창이다. 주총에 앞서 이미 2005년 영업실적을 집계하고 발표한 기업들도 있지만 많은 기업들이 그 시기를 주총에 맞추고 있다.



 속으로 썩어 들어가는 1등은 ‘NO’

 2005년 결산에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기업들은 창업 이후 40년이 넘도록 단 한 차례의 적자도 없이 흑자 행진을 이어오고 있는 기업들의 실적이다. 무적자 신화를 기록하고 있는 이들 기업의 실적은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한국경제의 저성장 속에서 많은 기업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수밖에 없다. 특히 유사한 업종의 많은 기업들이 적자의 늪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이들 기업에게는 독특한 DNA가 존재할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창업이래 무적자 40년의 기록은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신화가 아니다. 세계 초우량기업이라고 하는 삼성전자, 포스코도 이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국내 8개 기업이 이 같은 신화를 창조했고, 또 그 신화를 연장해 가고 있다.

 지난 1926년 설립된 유한양행이 79년째 흑자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것을 비롯해 1945년 해방과 함께 창업한 태평양이 꼭 60년째 무적자 신화를 창조해냈다. 태평양보다 1년 늦게 창업한 샘표식품도 지난해 영업결산 결과 59년 무적자 신화의 주인공이 됐으며 LG그룹의 모태가 됐던 락희화학의 후신인 LG화학도 58년째 흑자달성에 성공했다. 또 한독약품이 51년째, 대한전선이 만 50년째 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신도리코와 한일시멘트가 각각 45년과 44년째 흑자로 창업 반세기 무적자 신화에 도전하고 있다.

 이들 기업이 무적자 행진을 지속할 수 있는 데에는 그만한 시스템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기업에게 굳이 1등은 의미가 없다. 밖으로 화려하고 속으로 썩어 들어가는, 허울뿐인 1등은 차라리 2등 혹은 3등보다 못하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꼴찌를 하더라도 탄탄한 내실을 다지자는 게 오너는 물론 임직원들의 공통된 사고방식이다. 그렇다고 이들 기업이 꼴찌를 하고 있는 것은 또 결코 아니다. 무리하게 1등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다보니 오히려 현재 1등 기업이 되어 있다. 



 한때의 영광보다는 지속성장 중요

 김준성 전 경제부총리는 최근 발간한 <한국경제, 무엇이 문제인가>란 저서에서 한국기업의 왜곡된 성장과정 가운데 하나로 덩치 키우기를 들었다.  소위 대마불사로 일컬어지는 개발연대의 덩치 키우기는 기업성장의 척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부에서도 이들 기업에 대규모 정책자금을 집중시켰던 것은 규모가 곧 1등 기업의 첫번째 조건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영재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고도성장기를 통해 기업순위의 평가기준으로 자리 잡은 매출과 자산규모가 외환위기 직전까지 기업판도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지난 1965년 이후 국내 100대 기업 중 현재까지 100대 기업으로 잔존해 있는 기업이 10여 개에 불과할 만큼 부침이 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부환경 변화에 대처하며 경쟁력 강화와 함께 성장했다기보다 정부보호 위주의 폐쇄적 시장경제 하에서 그만큼 파산의 위험 속에서 덩치만 키워왔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불황이 닥치면서 외부자금 의존도가 높고 산업구조에 적응하지 못한 많은 기업들의 도산을 불러왔던 제1차 부실기업정리는 국내기업의 허약한 체질이 드러난 대표적인 사례다. 또 1980년대 중화학투자조정 과정에서 성장한계에 부딪힌 기업들이 몰락한 반면 첨단산업에 진출하는 등 사업구조 변신에 성공한 기업들이 부상한 것 역시 정부보호만으로 성장해온 기업들의 외부환경에 취약한 경쟁력을 대변하고 있다. 30대 그룹 가운데 무려 15개 그룹이 워크아웃 혹은 법정관리, 화의, 협조융자에 들어가고 기아·뉴코아·한일·거평그룹 등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1990년대 후반 재계의 지각변동도 대외여건 변화에 둔감했던 기업들이 근본적인 구조조정과 체질개선에 실패했던 데 기인하고 있다.

 이처럼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 대부분의 기업들은 차입을 통한 공격적인 투자로 고수익 사업기회를 선점하기 위해 외형 부풀리기에 주력했다.

 그러나 창업 무적자 신화를 이룩한 기업들은 경우가 달랐다. 오히려 사업규모는 축소하고 본업에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에 주력한 한편 외부차입금을 줄여나가는 다이어트 경영전략을 구사했다. 이와 함께 신용을 무기로 신제품 개발을 통한 변신을 시도하고 회사의 주인인 주주와 임직원을 중시하는 경영풍토를 정착시키고 있었다.

 1980년 재계서열 9위를 차지했던 대한전선을 가리켜 명맥은 유지하고 있지만 사세는 형편없다고 외부인들은 말한다. 그러나 임종욱 사장의 말은 다르다. “흔히 얘기하는 사세는 크게 위축됐지만 (부실 사업부문을 정리함으로써) 이후 전선사업을 중심으로 내실경영을 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지금도 옳은 판단이었다”고 말한다. 화려한 한때의 영광보다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다.



 part_2 { 창업이래 흑자행진곡을 울린 BEST 8 }



 특히 유사한 업종의 많은 기업들이 적자의 늪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이들 기업에게는 독특한 DNA가 존재할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창업이래 무적자 40년의 기록은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신화가 아니다. 세계 초우량기업이라고 하는 삼성전자, 포스코도 이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국내 8개 기업이 이 같은 신화를 창조했고, 또 그 신화를 연장해 가고 있다.



 유한양행 79년 무적자



 
해로 창사 80돌을 맞이하는 유한양행은 국내기업 가운데 가장 오랜 무적자 신화의 주인공이다. 1926년 고 유일한 박사에 의해 설립된 유한양행의 2005년 매출총액은 3919억8600만 원으로 전년도 3404억500만 원보다 500억 원 이상 신장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당기순이익도 634억9800만 원으로 전년에 비해 100억 원 이상 상승했다. 창업 79년째 흑자행진으로 나이와 함께 무적자 산수(傘壽)를 앞두고 있다.

 유한양행은 당시로서는 시대에 걸맞지 않을 만큼 새로운 경영기법을 도입해 재계를 놀라게 했던 기업이기도 하다. 유 박사 사망 이후 경영을 이어받을 자손이 있었음에도 1971년 전문경영인 제도를 도입,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현재 1200여 명의 임직원 가운데 유 박사의 친인척은 단 한 명도 없다. 차중근 사장을 비롯한 전·현직 최고경영자들은 모두 평사원으로 입사해 사장까지 승진했다. 당연히 외부영입도 없었다.

 유한양행의 최대주주는 공익법인인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으로, 유한양행의 이윤은 양 기관에 의해 사회공익사업에 쓰이도록 경영시스템이 정착돼 있다.

 국내 최초로 사원주주제를 도입한 회사도 유한양행이었다. 창업 10년만인 1936년 주식회사로 전환한 유한양행은 1주당 50원씩 총 1만주의 주식을 발행하며 당시 유일한 사장을 포함한 종업원 77명 가운데 24명을 주주로 등재했다. 그리고 22년 뒤인 1958년 종업원 복지 향상과 노사 협조를 목적으로 종업원에게 자사주를 지급함으로써 본격적인 종업원 지주제를 시행했다.  상장법인의 유상증자시 신규발행 주식의 10%를 종업원에게 우선 배정하도록 한 ‘자본시장 육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 10년 전이었다.

 이 같은 경영시스템과 종업원 지주제는 유한양행의 무적자 신화의 원동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즉 전문경영인에 의한 투명한 경영과 종업원·주주를 중시하는 경영, 그리고 무모한 사업확장보다는 ‘의약품’이라는 한 분야에서 내실을 다지는 견실한 경영이 창업주의 설립이념과 맞물려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한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창사 80주년을 맞는 올해 유한양행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태평양 60년 무적자



 년 대비 6% 증가한 매출 1조1719억 원, 10.1% 증가한 당기순이익 1650억 원. 60여 년 국내 장업계를 이끌어 오고 있는 태평양의 지난해 경영실적이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설립 이래 무려 60년 동안 흑자를 이어오고 있는 경영실적만을 놓고 보면 어느 회사 못지않게 젊다.

 창업 초기 ‘좋은 품질은 모든 역경을 이긴다’는 신념에 따라 좋은 상품 개발에 주력, ‘ABC화장품’ 브랜드를 탄생시켜 품질을 인정받으며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1954년 한국 최초로 연구실을 개설하고 1957년부터는 매년 독일과 일본 등지로 기술자들을 내보내 선진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오늘날 태평양의 밑거름이 되었다.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 역시 1960년 프랑스 코티사 방문을 시작으로 매년 외국에서 선진기술과 경영비법을 도입, 국내 실정에 맞도록 응용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50년대 중반부터 태평양은 국내 화장품업계를 선도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 무리한 사업확장과 시장경쟁 격화로 한때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2세 경영인인 서경배 사장이 주도한 구조조정은 비관련사업 처분과 본업에서의 경쟁력 확보라는 대원칙 하에 강도 높은 군살빼기를 성공적으로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결과 단기차입으로 유동성을 겨우 해결했을 만큼 취약했던 재무구조는 이제 전설이 되고 있다. 해방둥이로 출발한 태평양의 경영철학은 ‘신용제일주의’와 ‘기술제일주의’ 그리고 ‘협동정신’이다. 창업주인 고 서성환 회장이 토대를 마련했지만 지금의 서경배 회장에 의해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즉 고객을 모든 일의 원점으로 삼을 것과 한발 앞서 변화할 것 그리고 구성원의 삶을 존중하고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일에 전념하며 기업의 인격을 쌓을 것 등이 그것이다.



 샘표식품 59년 무적자



 3대째 가업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샘표식품은 59년째 흑자 재무제표를 내놓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충무로공장 전소와 세 차례의 간장파동 등의 위기를 겪었던 샘표식품은 2005년 매출 1100억 원, 순이익 32억 원을 달성, 60년 무적자 기록에 성큼 다가섰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일본인이 소유, 경영했던 삼시장유양조장을 창업주 박규회 사장이 인수해 설립한 샘표식품은 ‘집에서 담가먹는 간장’의 전통을 파괴하고 ‘사 먹는 간장’의 역사를 쓴 기업이다. ‘내 가족이 먹어보지 않은 음식은 결코 만들지도 팔지도 않는다’는 창업주의 장인정신은 오늘날 대기업의 도전에도 국내간장 소비시장에서 절반이 넘는 높은 시장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로 꼽히고 있다.

 1997년 초 취임한 창업 3세 박진선 사장의 외환위기 당시 ‘거꾸로 구조조정’은 창업 60년을 향한 샘표식품에 새로운 기폭제가 되었다. 모든 기업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슬림화에 주력했던 것과는 달리 마케팅과 영업, R&D, 해외사업 등 조직을 확대개편하며 신입사원 공채까지 실시한 것이다.  조용한 간장공장을 역동적이며 고객친화적인 기업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박 사장은 회고한다. 이 결과 2001년 샘표식품은 오랜 창동시대를 마감하고 설립 당시의 공장이었던 충무로본사시대를 다시 열어가고 있다.

 샘표식품 관계자는 “올해 창업 60년을 맞아 국제적 식품기업으로 거듭난다는 목표와 함께 장류 전문기업으로 세계인에게 우리 맛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 장맛은 물론 음식문화까지도 세계로 전파한다”는 사명감을 전한다.



 LG화학 58년 무적자



 업 40년이 넘도록 흑자 행진을 이어오고 있는 기업 가운데 LG화학은 유일한 대기업이다. 때문에 그 규모도 다른 기업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2005년 LG화학의 매출액은 7조4251억 원으로 전년에 비해 3000억 원 상승했다. 순이익도 4003억 원에 달한다.

 주요 석유화학제품의 중국 등 해외 수요에 따른 화성사업(석유화학사업)의 호조, 산업재 제품의 수출증대, 미래 승부사업으로 육성중인 정보전자소재사업의 지속 성장에 따라 최대 실적을 거뒀던 2004년에 비하면 고유가로 인한 원재료 인상, 전지사업의 부진 등으로 수익성은 다소 하락했다. 그러나 고부가 스페셜티 석유화학제품 개발 및 전지사업의 정상화 등으로 점차 실적개선이 이뤄지고 있어 2006년 시장 전망은 밝다고 LG화학 관계자는 전한다.

 LG화학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LG그룹의 모태다.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로 출범한 이래 1950년대 플라스틱가공사업, 1970년대 석유원료사업, 1990년대 정보전자소재사업까지 국내 화학산업을 이끌어온 대표기업으로 58년째 흑자경영을 유지해 오고 있다.

 LG화학은 다른 석유화학회사와는 달리 석유화학, 산업건자재, 정보전자소재부문으로 사업 포트폴리오가 적정하게 분산돼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른 화학업체들이 유화업종의 산업 사이클에 따라 매출과 영업이익 등에서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과는 달리 경기 사이클이 나빠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특히 지난 2001년 기업분할과 함께 3개 사업부문 중심의 화학전문기업으로 새롭게 출범하고, 올해 LG대산유화 합병을 통해 석유화학분야의 수직계열화를 강화함으로써 글로벌 화학기업으로서의 위상을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올해에는 PVC, ABS, 전지 등 승부사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클린에너지, 플렉서블 디스플레이, 고기능 필름, 신촉매 및 신공정 등 미래성장엔진에 R&D역량을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한독약품 51년 무적자



 독약품의 창업주 김신원 회장은 의주상인을 일컫는 ‘만상(灣商)’의 후예다. 국경을 넘나들며 중국 땅 자먼(柵門)까지 나가 무역을 했던 만상은 개방마인드를 갖고 ‘사람을 남기는 장사’라는 확고한 경영철학을 평생 실천한 임상옥의 상인 정신과 기질을 특징으로 한다.

 한독약품은 이 같은 만상의 후예임을 기업문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기업이다. 창업 이후 일관되게 지속되어 온 김 회장의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 사업들은 곧 의주상인 만상의 사업정신으로부터 이어졌다고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지난해 2344억9300만 원의 매출에 순이익 159억5700만 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대비 2.9%가 줄었지만 순이익은 오히려 22%가 증가했다. 흑자 달성 51년째다. 

 한독약품 본사와 충북 음성에 있는 공장의 현관 벽면에는 전 사원 570명의 얼굴이 빼곡히 들어간 큰 사진이 걸려있다. 노사간의 신뢰가 깊고 가족적인 분위기가 강한 기업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주5일 근무제를 이미 20년 전부터 시행한 기업이라는 점에서 한독약품 임직원들의 생산성은 돋보인다.

 지난 1992년 한독약품은 본사사옥을 신축,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 터전을 잡고 1995년에는 충북 음성군에 초현대적 시설을 갖춘 공장을 건립, 새로운 장을 펼쳐나가고 있다. 특히 2000년 한독-아벤티스 출범을 계기로 보다 우수한 제품 경쟁력을 확보하고 선진 경영기법과 마케팅 기법을 도입한 한편 광범위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보유하게 됐다.

 1980년대 제약사간의 과다한 가격경쟁과 금융비용의 증가, 우수한 인재의 고갈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1986년 2세 경영인 김영진 부회장의 경영참여를 계기로 선택과 집중전략을 통해 재도약의 전기를 맞이했다.



 대한전선 50년 무적자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재계 10위권의 대규모 기업이었던 대한전선은 우리나라 전선공업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1955년 설립 이후 대한전선이 개발하는 제품은 거의 모두 국내에서는 최초로 개발되는 제품일 만큼 기술력에서도 선진적인 기업이었다.

 기업규모는 그때만 못하지만 2005년 매출규모 1조5845억 원의 중견기업이다. 특히 당기순이익만도 2249억9700만 원에 달하는 알짜배기 기업이다.

 이 같은 당기순이익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져왔다. 특히 지난해 9월에는 세계 주요 펀드사들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국제자 본시장에서 초과수요를 발생시키며 1억6000만  달러 규모의 해외전환사채(CB)를 성공적으로 발행, 기업의 신용도와 기업가치를 국제시장에서 재확인하기도 했다.

 대한전선은 국내기업 가운데 외형을 포기하고 내실경영을 선택한 대표적인 기업이다. 1960년대 진출했던 가전사업이 30%의 점유율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1970년대 초 삼성전자가 진출, 금성(현재 LG전자)과 함께 3사의 치열한 경쟁구도가 전개되자 사업규모의 절반이 넘는 가전사업을 과감하게 대우로 넘겨버렸다. 전선사업이라는 핵심역량에 사업 포트폴리오를 집중하기 위해서다. 당시의 선택과 집중이라는 사업전략이 주효함으로써 오늘날 대한전선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또 1999년에는 대규모 투자로 경영에 부담을 가중시켰던 알루미늄사업도 분리하는 한편 부실화된 해외투자사업에서도 발 빠르게 철수했다.

임종욱 사장은 “기업의 존재 가치는 이익을 내는 데 있다”며 “이익을 낼 수  있어야 기업가치를 키울 수 있고, 미래발전을 기할 수 있으며, 나아가 주주와 종업원·고객 등 모든 이해관계자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수익성 위주의 경영전략을 구사하고 있음을 밝혔다. 대한전선은 전선과 스테인리스 스틸 분야에서 쌓아온 안정된 재무구조를 바탕으로 경제환경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미래성장을 이뤄가기 위해 지난 2002년 무주리조트 인수에 이어 이듬해에는 쌍방울을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사업다각화를 추진해 가고 있다.



 신도리코 45년 무적자



 도리코는 창업 이래 무적자, 무차입, 무어음이라는 ‘3무(無)경영’으로 부채비율 0%의 자기자본 운영은 물론 현금결제로 협력업체와의 신용이 쌓여 높은 대외 신용도와 탄탄한 재무구조를 자랑하는 기업이다. 신도리코의 역사는 한국 사무기기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불모지였던 사무자동화 산업을 개척해 왔다.

 1960년 창립 이래 지금까지 한 길을 고집해 왔으며 단 한 번도 시장점유율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임직원들은 신도리코의 강점으로 한결같이 전문성을 꼽고 있다. 그러나 무식하게 하나의 방법으로 한 우물만을 파지는 않았다.  복사기 기술력을 근간으로 디지털 복사기를 개발했듯이 시대에 맞도록 우물 파는 방법도 진화시켜왔다. 즉 ‘사무기기’라는 큰 우물에서 복사기를 개발했고, 이어 팩시밀리를 개발했고, 지금은 디지털 복사기와 프린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연구개발, 생산, 영업 및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40여 년 동안 축적된 전문성과 경험이 최첨단, 최고를 만들어냈다는 게 신도리코 측의 설명이다.

 특히 신도리코에서는 내부에 대한 선행투자로 임직원들이 경영진에 대해 높은 신뢰를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업의 확장보다는 직원들의 복지가 항상 우선시되고 있다.

 이처럼 사무기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지켜온 신도리코는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에 발맞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사무기기 전문회사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최적화된 사무환경을 맞춤으로 제공하는 ‘디지털 오피스 컨설팅 기업’으로의 변신을 시작한 것이다. PC, 프린터, 복사기, 팩스, 스캐너 기능을 통합적으로 연계해 사무실 네트워크를 구축, 적합한 솔루션을 제안하는 사무종합서비스가 주 사업분야가 되고 있다.



 한일시멘트 44년 무적자



 일시멘트를 가리켜 금융권에서는 ‘재계의 숨은 진주’라 부른다. 부채비율이 18%에 불과하고 창업 이래 45년 동안 단 한 번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는 우량기업임에도 일반인들에게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1961년 개성상인 고 허채경 창업주에 의해 설립된 한일시멘트는 내실과 수익성에 바탕을 둔 특유의 정도경영과 투명경영, 그리고 경쟁자에 비해 한 발 앞선 경영전략으로 대기업 계열의 시멘트회사들과 경쟁해 왔다. 개성상인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성, 그리고 뛰어난 경영기법을 바탕으로 정도경영을 앞세운 신용과 내실을 중요시하고 있다.

 흔히 한일시멘트의 경영방식에 대해 일부에서는 의사결정이 더디고 보수적인 경영스타일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허동섭 회장은 “시멘트 회사는 최소 10년 후를 내다보고 기업을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치밀하고 심도 있는 검토와 신중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는 말로 일축한다. 빠른 의사결정이 결코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일시멘트는 지난해 매출 4849억1200만 원과 순이익 612억100만 원의 경영실적을 내놓고 창업 반세기 무적자 신화에 도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사내에 신규사업팀을 두고 건설건자재 분야 외에 타 분야의 사업성 검토작업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한일시멘트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건축물과 토목시설물의 보수보강 부문이 사업의 중심축이 될 것이라고 밝힌다.



 part_3 { 핵심역량에 집중한 ‘한 우물 경영’ }



 업 이래 40년 이상 무적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8개 기업은 해당업종과 국내외 환경변화에서 경쟁력을 갖춘 자기들만의 사업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소위 전문기업들이다. 더러 사업다각화라는 이름으로 타 업종에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다시 주력 사업영역으로 되돌아왔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본업에 충실했을 때, 비록 덩치는 왜소하더라도 우량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대한전선이다. 대한전선은 1960년대 후반 전선사업의 막대한 이익금을 기반으로 가전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15년 뒤 사세의 2/3를 잘라내는 결단으로 핵심역량이었던 전선사업으로 복귀했다.

 1982년 11월 대한전선이 설립에 참여한 한미은행의 증자를 위해 대여금 회수차 대우 본사를 방문한 최형규 대한전선 사장은 김우중 회장을 만났다.  김 회장은 “대한전선 가전사업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대우에 협 력 제의를 해 달라”는 의중을 넌지시 전했다. 회사로 돌아온 최 사장은 곧 설원량 회장에게 이를 보고했다. 설 회장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선친 설경동 회장이 마지막 불꽃을 태운 교환기 사업을 모태로 1968년 시작한 사업이 바로 가전사업이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한전선의 주력사업이었던 가전부문이 이제는 쓴 열매로 변질되고 있었다.

 가전 및 통신장비 사업 진출은 사업다각화에 의해 성장전략을 추진하던 대한전선의 외형을 키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예상치 못한 석유파동과 경기부진 등으로 유동성 위기 상황에 내몰려 자칫 그룹 전체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룹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을 위기에서 구출하려면 근본적인 변화만이 살 길이었다.

 매각을 결심한 설 회장은 1982년 12월8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첫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한 달 보름여가 흐른 1983년 1월27일 양사는 이사회를 열고 가전사업 양도 결정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때 대한전선의 임직원은 총 9000여 명. 이 가운데 대우전자에 편입된 임직원은 6000여 명으로 2/3의 임직원이 대한전선을 떠났다.

 가전사업 매각과 함께 발목을 잡았던 부채로부터 대한전선은 자유로워졌다. 재무구조도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이에 대한전선은 전선사업 중심의 내실경영을 표방하고 그룹총수인 설원량 회장과 대표이사로 재선임된 최형규 사장을 사령탑으로 조직 재정비에 나섰다.

 당시 경리과장으로 가전사업 매각 뒤처리를 도맡아했던 임종욱 현 대한전선 사장은 가전사업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하려 했다면 지금 대한전선이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했다. 임 사장은 “전선사업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전사업에 메워 넣는 형국이었다”며 “가전사업 매각으로 흔히 말하는 사세는 크게 위축됐지만 더 나빠지기 전에 양도해 부담을 덜게 됐고, 이후 전선사업을 중심으로 내실경영을 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당시의 판단으로 오늘의 대한전선이 존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본업에서 경쟁력 확보

 태평양도 비슷한 아픔을 겪으며 본업인 핵심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게 됐다.  태평양은 1990년대 초반 ‘Beauty & Heath’라는 핵심역할로의 집중화를 위해 비관련부문을 매각하고 관련 유사업종을 합병하는 ‘경영합리화 전략’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91년 24개였던 계열사가 2006년 현재 5개로 축소되었다. 증권·투자자문회사, 야구단, 농구단, 동방금고, 생명보험 등이 매각되었고, 전자, 물산, 리리코스, 오스카, 프랑세아 등은 합병됐다. 또 시스템과 정보기술 등은 청산절차를 밟았다. 퍼시픽글라스와 장원산업은 지주회사의 전환과정에서 현재 태평양에 합병되었다.

 서경배 사장에 의해 주도된 이 같은 구조조정은 비관련 사업을 처분하고 본업에서 경쟁력을 확보해야만 살아남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 결과 수익성이 대폭 개선되었고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등의 성과를 낳았다. 1995~97년까지 단기차입으로 유동성을 겨우 해결했을 정도로 재무구조가 취약했지만 1996년 51억 원에 불과했던 당기순이익이 2000년엔 847억 원으로 급상승했다. 1996년 평균 1만5700원이었던 주가도 2001년 6월 6만4300원으로 급등한 데 이어 2002년 10만3000원, 2003년 18만7500원, 2004년 25만9500원 그리고 지난해 종가가 31만6000원으로 꾸준하게 급상승하는 효과도 보았다. 소위 증권가에서 ‘태평양칩’이라는 말도 이때 생겨났다.  

 ‘본업에서 세계일류가 되자’,‘돈 되지 않은 사업은 하지 않는다’는 CEO의 경영방침이 조직 내부에 침투해 실천으로 연결됨으로써 구조조정을 성공리에 마친 태평양은 현재 ‘Beauty & Heath’ 전문기업으로 탈바꿈해 있다.

 이상욱 홍보부장은 “인력, 생산설비, 물류, 연구, 마케팅 등 경영자원을 공유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한층 생산성 향상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기업 수익성이 향상되면 CEO는 본업보다는 사업다각화라는 명분으로 사업확장에 나서게 된다. 또 확장사업의 투자비 조달을 위해 차입경영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때 기업에는 위기가 찾아온다.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사업다각화의 성패는 좌우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대부분의 우량기업들은 비관련 사업보다는 핵심 주력사업만을 움켜쥐고 여기에 역량을 집중시키는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한 우물 전략이다. 본업이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유호현 LG경제연구원의 연구원은 “(일류기업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축적한 핵심역량을 기반으로 새롭게 변신했다”고 말한다. 자신에 가장 적합한 사업을 주된 무기로 승부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전선과 태평양이 확장에서 다시 본업에 충실함으로써 예전의 생산성과 수익성을 확보한 것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무적자 성장을 하고 있는 다른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각기 전문성을 앞세워 연구개발비를 높여 제품 다각화에 승부를 걸어왔다. 또 그 결과는 한결같이 성공적이었다.



 우물 파는 방법의 진화

 시멘트업계 최초로 제품의 브랜드화를 시도한 한일시멘트는 재래식 시공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던 우리나라 건설시장에 선진국처럼 전문적이고 기계화된 시공방식이 자리 잡도록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국내 최초의 드라이 모르타르 브랜드인 ‘레미탈’이 그 주인공이었다. 1990년대 초반 건축시장의 새로운 움직임을 감지, 드라이모르타르 사업에 진출한 한일시멘트는 2001년 통합 브랜드로 ‘레미탈’을 출시했다. 

 한일시멘트 매출에서 레미탈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20% 수준에 불과하지만 2004년 한 해 107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드라이모르타르시장에서 70%에 육박하는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미 건축현장에서는 한일시멘트의 레미탈을 드라이모르타르의 보통명사처럼 부르고 있다.

 레미탈은 시멘트와 모래, 그리고 용도에 적합한 특성 강화재가 미리 혼합돼 있어 건축현장에서는 물만 혼합해 손쉽게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생산된 건축자재다. 용도에 따라 전문화된 만큼 품질이 뛰어나며 인건비절감 효과도 클 수밖에 없다.

 유한양행도 제약산업을 중심으로 보건산업이라는 한우물에 집중하고 있다. 무모한 사업확장을 피하고 의약품이라는 한 분야에서 내실을 다지는 견실경영은 기업이윤을 사회에 되돌려야 한다는 기업이념과 맞물려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케 한 동력이 되고 있다. 탄탄한 제품력과 우수한 기업이미지는 이의 결과다. ‘가장 좋은 제품의 생산’이라는 기업이념으로 우수한 약품 개발에 쏟은 열정은 안티푸라민, 삐콤씨와 같이 오랫동안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제품 생산을 가능케 했다. 그 과정에서 ‘신용의 상징, 버들표’라는 이미지도 얻게 되었다.

 외길 전문기업을 가리켜 외부에서는 시대변화를 읽지 못하거나 변화의 속도가 더디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또 아무리 한우물을 파는 기업이라고 해도 한 번쯤 관련 사업에 눈길을 주지 않은 기업이 있겠느냐는 의문도 제기한다.

 그러나 신도리코는 예외다. 알려진 바와 같이 신도리코는 국내 최초로 복사기를 출시한 사무기기 전문업체다. 지금은 ‘디지털 오피스 컨설팅 기업’으로 변신해 있다. 그렇다고 사업영역이 바뀐 것은 아니다. 제품만으로 본다면 사업영역이 확대됐다 할 수 있겠지만 과거 복사기를 통한 사무혁신의 틀이 21세기를 맞아 다양해진 것뿐이다. 궁극적으로는 사무기기 한 길을 고집하고 있다. 

 이와 관련, 신도리코 관계자는 “복사기 기술력을 근간으로 디지털 복사기를 개발했듯이 우물 파는 방법도 진화됐다”는 말로 대신한다. 즉 사무기기라는 큰 우물에서 복사기와 팩시밀리를 개발했고, 이제는 디지털 복사기와 프린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신도리코는 1982년 업계 최초로 기술연구소를 설립, 현재까지 세계적인 수준의 석·박사급 기술연구 인력 200여 명을 투입, 연구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결과는 쉽게 드러났다. 자체 기술보유에 힘쓴 결과 국내 최초로 자체 개발한 디지털 복사기 ‘디지웍스’를 2003년에 출시해 단 두 달만에 디지털 복사기 시장점유율 50%를 달성, 해외로 기술을 역수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영업 및 기술사원들은 두 달이 넘는 전문교육을 이수해야 현업에 배치되며 이후에도 꾸준한 외부교육과 해외파견교육을 진행한다. 특히 최근 들어 ‘불황에 투자는 호황에 대한 대비’라는 우석형 회장의 경영방침에 따라 교육투자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

 신도리코 경영전략과 관련 일부에서는 사무기기 부대사업이라 할 수 있는 복사지 등 소모품 사업을 고려할 만하다 하지만 신도리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한 물이 아니라 옹고집 경영이라는 말까지 등장한다.

 이처럼 본업에 집중하는 것이 구태의연하게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잘 할 수 있는 분야, 핵심역량을 갖춘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기존 사업 구조 안에서도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들 무적자 기업은 잘 보여주고 있다.



part_4 { 개성상인과 만상의 후예 ‘최고 덕목은 신용’ }



 업 경영에 있어 모든 것에 앞서는 덕목을 꼽으라면 단연 ‘신용’이다. 신용을 지키지 못하는 기업이 성공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일찍이 유례가 없다.

 흔히 신용을 말할 때 재계에서는 개성상인과 의주상인 ‘만상’을 떠올린다.  역사적으로 검증을 받은 이들을 통해 오늘날 기업가 정신을 되새기자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8개의 무적자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기업 가운데 개성상인과 만상의 후예 기업은 4개에 달한다. 태평양과 신도리코, 한일시멘트가 개성상인의 피를 받았고, 한독약품은 의주 만상의 후예다.

 지난 1995년 신세계백화점출판부에서 발간한 <한국의 시장상업사>에서는 개성상인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개성상인의 특징은 상업에 있어서 상기(商機)의 포착에 영민하고 신용을 무엇보다 중시하며, 이식(利殖)에 철두철미하였으며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한 점. 일례로서 신용에 대하여 보면 개성상인의 어음표는 산골의 객주와 여각에서도 탈 없이 통용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개성상인은 신용거래를 철저히 지켰던 것이다.



 개성상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용철학과 관련 ‘내 입에 거미줄을 쳐도 돈을 꾸면 제 날짜에 이자까지 쳐서 갚는다’는 말이 있다. 이 같은 신용 철칙은 오늘날 개성상인의 후예라고 하는 기업들에서 공통점으로 엿보인다.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난 서성환 태평양 창업주를 개성상인의 후예로 분류하는 것은 고향이 아니라 사업의 터전이 바로 개성이었던 탓이다. 서 창업주가 일곱 살 되던 1930년 그의 가족은 서울을 거쳐 개성에 정착하게 된다. 부친은 개성에서 조그만 상점을 열어 잡화를 취급했고 1932년부터는 화장품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서 창업주가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33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를 도와 화장품 제조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당시 개성에서 가장 큰 고려백화점에 화장품부를 개설하고 집에서 생산한 제품을 직접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때 서 창업주는 판매 현장경험을 쌓게 되는데 개성상인 특유의 체질도 체득하는 기회를 가졌다.

 자연스럽게 체질화된 개성상인의 특징은 서 창업주 개인의 특징만이 아니라 태평양의 기업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창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신용과 근면을 신앙처럼 신봉한 한편 태평양 성장의 밑거름이 된 품질제일주의도 이러한 개성상인의 정신과 경험에서 응고된 것이었다.



 이익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장사

 우상기 신도리코 창업주는 1919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개성공립상고를 졸업하는 등 학업도 모두 개성에서 마쳤다. 신도리코의 경영스타일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3무(無)경영’에서는 이 같은 개성출신만의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즉 적자, 차입, 어음이 없는 기업문화가 그것이다. 부채비율 0%로 자기자본 운용은 물론이고 현금결제로 협력업체와의 신용이 쌓여 높은 대외신용도와 탄탄한 재무구조를 자랑할 수 있는 것도 개성상인에게서 볼 수 있는 기업가정신이다. 이에 외환위기로 많은 기업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었던 1999~2000년 신도리코는 2000억 원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을 만큼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우직스러우리만치 한우물 경영을 철칙으로 삼았던 개성상인들과 같이 신도리코는 대박신화를 좇지 않았다. 당시 유행했던 벤처열풍을 외면한 채 오직 디지털 광학기기 연구개발에만 지속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우상기 신도리코 창업주보다 4년 앞서 태어난 허채경 한일시멘트 창업주는 개성 인근의 개풍에서 태어났다. 송도중학교를 졸업한 16살 때 일찌감치 사업의 길로 나섰다. 한학자였던 부친은 사업의 성공에 연연하지 말고 실패해도 좋으니 여러 사람을 상대하며 올바른 상술을 터득하는 데 정성을 쏟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허 창업주의 경영철학은 가훈과 함께 인생철학으로 삼았던 ‘정(正)·근(勤)·신(信)’.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한일시멘트 경영의 기본원리다. 신용과 신의를 생명처럼 여기고 분수를 지켜 순리에 따라 정도를 걷자는 정신이 내포돼 있다. 기업이 지향하는 경영이념은 초창기 사훈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첫째는 ‘정직 근면하자’로, 이는 회사 생활의 정신자세를 표현한 것으로 그 무엇보다 건전한 정신을 최고 목표로 삼고자 했다. 둘째는 ‘정화 절약하자’로 조직을 깨끗이 유지하고 절약이라는 미덕을 통해 경제에 있어서의 자본축적을 이룩하자는 의미다.

 이를 종합하면 인간중심의 신의를 주축으로 한 조직원 전체가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며, 목전의 이익에 집착하지 않고 장기적 안목에서 항상 개척자적인 정신자세로 부단한 기술개발을 통해 나라와 겨레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기업활동을 영위시켜 나가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 전통적인 개성상인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개성상인과 달리 의주상인인 ‘만상(灣商)’은 ‘이익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장사’를 강조했다. 여기에서 신용은 기본적으로 전제돼 있었다. 비범한 상재로 많은 재물을 모았으나 이를 아낌없이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만상의 대표적인 인물 임상옥의 휴머니즘은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 잘 나타나 있다.

 김신권 한독약품 창업주는 이 같은 만상의 기질을 그대로 빼닮은 현존하는 기업인이다. 특히 김 창업주의 가계를 더듬어 올라가면 단순히 개성 태생이라는 점과 개성상인의 정신을 어깨너머로 배움으로써 개성상인의 후예로 평가받고 있는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소설 <상도>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 가운데 백홍준이라는 이가 있다. 바로 김 창업주의 친 외조부다. 즉 백홍준의 딸 백관성이 김 창업주의 조부 김관근의 부인인 것이다. 백홍준의 부친은 <한국기독교사>에도 등장하는 의주상인으로, 만상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때문에 김 창업주는 만상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이른바 진골(眞骨) 출신인 셈이다. 

 그러나 김 창업주는 의주에서 기반을 잡지 못했다. 소규모 양말공장을 하던 부친의 사업이 실패하고 행상에 나선 모친이 생계를 책임지는 어려운 형편이 이어졌다. 황해도 은율에 이어 신의주를 거쳐 만주 안둥시의 외곽인 싼도양토우(三道浪頭)라는 곳에서 약방을 개업함으로써 ‘언젠가는 일류 제약회사를 차리겠다’는 꿈을 키우며 오늘날 한독약품의 기틀을 다져야 했다. 그리고 그 꿈은 1954년 부산의 동서약품과 서울의 신한약국을 합병한, 한독약품의 전신인 연합약품주식회사를 발족하며 이뤄냈다.

 만상의 후예로 갖은 고난 끝에 설립한 한독약품의 50년을 지탱해온 경영철학의 중심은 역시 ‘신뢰경영’이다. 만상을 대표하는 ‘사람을 남기는 장사’도 신뢰가 바탕이 돼야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특히 이 같은 신뢰가 있었기에 한독약품은 가장 성공적인 합작기업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 또 흑자경영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비단 개성상인과 만상의 후예가 아니다 하더라도 무적자 기업의 원동력은 모두 신뢰경영에서 빛을 발했다.

 박규회 샘표식품 창업주의 경영철학인 품질 제일주의와 윤리·정도경영은 신뢰경영의 또 다른 표현이다. 더구나 위생과 안전이 중요한 식품제조 분야에서 신용은 필수적인 덕목이 아닐 수 없다는 게 샘표식품 관계자의 설명이다. 때문에 인화, 봉사와 함께 샘표식품의 창립이념에는 신용이 포함돼 있다.



 part_5 { 남보다 앞선 봉사정신, 고객 위한 노사화합 }



 '돈을 쫓으면 돈을 벌지 못한다’는 속설은 무적자 기업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업이념이다. 당연히 기업의 존재가치인 이익을 목적으로 경영을 하고 있지만 그 이익을 주주와 임직원들과 함께 나누겠다는 것이다. 또 더 나아가 사회에 환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김성수죠.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사회를 위해 공익사업을 한 게 참 부럽습니다.”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의 말이다. 유 창업주 지인들은 유한양행의 설립목적이 교육사업에 있었다고 말한다. 교육사업 헌신을 결심한 이후 유한양행을 설립했고, 그 이윤을 모두 교육사업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생전부터 쏟았던 장학·교육사업에 대한 열정은 사후에도 전 재산을 공익재단인 유한재단에 기증했던 것으로도 익히 알 수 있다.

 때문에 현재 유한양행의 최대주주도 공익재단인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이며 양 기관은 유한양행 경영실적에 따른 배당을 통해 받은 이윤을 사회봉사 활동에 사용되도록 시스템적으로 정착되어 있다.

 이윤이 사회로 환원되는 시스템에서 임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열정은 과연 생겨날 수 있을까. 모든 이익이 공익재단으로 빠져나간다면 생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임직원들의 업무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동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한양행은 일찌감치 이를 보완하는 시스템을 또 갖추었다. 종업원 지주제가 그것이다.

 1958년 공로주 배분 및 자사주 취득 허용 등을 통해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한 유한양행은 1973년 12월 제51기 영업결산과 함께 총 2만여 주를 사원들에게 배정했다. 모두 511명의 6급 이상 사원들이 주식을 배정받았다. 이듬해에는 직급 제한 없이 6만7000여 주가 모든 직원들에게 배정됐다. 이로써 총 977명의 임직원이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어 1998년 주주총회에서는 국내 최초로 일정기간 재직한 전 직원을 대상으로 스톡옵션 행사를 결의, 전 직원의 80%가 혜택을 받았다.



 주주·직원 중시한 사회환원

 회사 성장의 열매가 곧 직원들에게 분배된다는 사실을 임직원 스스로 체감하고 있는 경영시스템인 셈이다.

 이 때문일까. 유한양행은 1926년 창업 이래 무적자 신화의 기록과 함께 무분규 신화도 함께 보유하고 있다. 유한양행은 노조가 기업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매 분기마다 개최되는 경영실적 보고와 사업계획 심의회에 노조 간부가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노조의 관심사는 임금인상이 아니라 그들이 정성을 쏟은 제품 판매에 있다.

 주주들에게도 주주보상정책을 통해 가능한 고배당 및 무상증자 등을 통해 실질적인 주주가치 제고에 힘쓰고 있다. 상장 첫해인 1962년 유한양행의 총 배당금은 24억6200만 원, 보통주 배당률은 31%였다. 이 같은 배당은 상장 43년을 맞은 2005년까지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신도리코는 사업의 확장보다 직원의 복지를 우선시하는 회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세심한 부분까지 회사가 신경을 써줌으로써 정서적인 안정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공장 내에 충분한 여유 간을 확보, 쾌적한 근무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세 번이나 수상할 만큼 공장건축이 유명하다. 이는 사원들이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을 보다 아늑하고 편리하게 함으로써 일에 대한 효율이 높아지는 것을 본 우석형 회장만의 경영 노하우다.

 충남 아산공장도 5만여 평 부지 가운데 70%가 사원들의 복지공간이다. 여기에는 노래방부터 카페테리아, 도서실, 의무실, 노천극장, 체력단련장, 실내극장과 함께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장까지 갖춰져 있다. 밖으로 무작위 투자를 하는 것보다 안으로 투자하는 것이 훨씬 성과를 발휘한다는 판단에서다.

 흔히 구내식당에서 식판에 담아 먹는 밥도 신도리코에서는 밥그릇에 담아 뚜껑을 덮어 배식하고 있다.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는 반대가 있었지만 직장에서도 집에서 먹는 밥과 같아야 한다는 경영진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이와 함께 회사 재무상황과 사업실적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설명하고 논의하는 미팅을 매달 개최하는 한편 외환위기 당시에도 인력감축을 하지 않아 직원들의 주인의식과 애사심이 뛰어나는 게 신도리코 관계자의 설명이다.

 당연히 노사분규가 있을 리 없다. 신도리코 역시 창업 무분규 신화를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 한독약품, 한일시멘트, 태평양, 대한전선 등도 창립 이래 노사분규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이들 기업이 무적자 신화와 함께 무분규 신화를 동시에 달성하고 있는 이유는 지난 해 전경련이 사례를 통해 신 노사문화 실천과제로 제시한 7가지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즉 노사이념이나 회사비전에 대한 가치를 노사가 공유하고 있으며 최고경영자가 노사관계에서 상생과 신뢰의 리더십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또 직원들의 자아실현과 잠재역량 개발을 위해 전략적인 인적자원 관리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으며 노사 공동으로 자율적이고 다양한 노사협력 프로그램을 추진함으로써 노사간 일체감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매월 경영설명회를 통한 경영정보 공유 및 온라인을 통한 CEO와의 대화 등 경영자를 중심으로 상호 신뢰를 위한 열린 커뮤니케이션 노력이 전개되고 있으며 이 같은 CEO의 노력과 함께 노조 역시 노사화합과 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동반자적 책임의식을 갖고 실천하고 있다.

 여기에 윤리경영과 노사 공동의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상호신뢰 제고는 물론 수준 높은 노사동일체 의식을 형성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발견되고 있다. 

 한편 한독약품, 한일시멘트, 유한양행, 태평양, 샘표식품 등은 올해까지 30년 이상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연속 흑자배당을 한 기업들이다.

 

 part_6 { 국민의 사랑 듬뿍받는  히트상품 보유 }



 비자의 선택을 혼란스럽게 할 만큼 수많은 상품들이 매일같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어제 광고를 보고 구입한 상품이 오늘은 구식이 되어버리는 미국 애플사의 TV 광고가 아니더라도 신제품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들은 선택의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골목에서 동일한 메뉴로 장사를 하는 식당조차도 손님이 들끓어 길게 줄을 늘어선 식당과 파리가 날리는 식당은 극명하게 구분지어 진다. 수많은 상품 가운데 소비자의 기호를 충족시키며 호주머니를 유혹하는 단 하나의 상품이 존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적자 신화는 앉아서 내실경영만을 한다고 해서 달성되지는 않는다. 끊임없는 신제품 개발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신제품이라고 모두 소비자의 기호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한다. 신제품 개발을 위해 투입한 막대한 자금부담을 이기지 못해 도산하는 기업의 경우도 우리 주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히트상품 개발에 모든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적자 기업들은 모두 이러한 히트상품을 보유하고 있다. 모두가 불황이라고 아우성이지만 단 한 개의 히트상품만으로 이들 기업은 불황을 실감하지 못한다. 기업 전체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 하더라도 불황시기에 히트상품은 기업에게 생명수와 같은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무적자 기업의 히트상품 가운데 수십 년째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상품은 유한양행의 안티푸라민과 한독약품의 훼스탈, 샘표식품의 샘표간장 그리고 태평양의 아모레 화장품을 들 수 있다. 국민적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일시멘트의 ‘레미탈’도 이미 보통명사가 됐을 만큼 업계에서는 히트상품으로 경쟁업체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지난 1933년 출시해 70년이 넘는 나이의 안티푸라민은 지금도 여전히 가정상비약으로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진통·소염제지만 만병통치약으로 애용되고 있다.



 소비자 유혹하는 단 하나의 히트상품

 1958년 발매된 훼스탈은 국민소화제로 아직도 3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며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1980년대까지 한독약품의 흑자행진에서 훼스탈은 30%의 매출을 차지하며 효자역할을 했다. 다이어트 열풍과 소식(小食)문화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현재는 그 비중이 줄어들어 전체 매출에 채 5%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소화제’ 하면 ‘훼스탈’이라는 등식은 유효하다. 때문에 한독약품의 이미지에는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40대 이상의 중년층에게 ‘보고는 몰라요, 들어서도 몰라요, 맛을 보면 맛을 아는 샘표간장’이라는 CM송은 1960년대를 기억하게 한다. 1946년 처음 생산을 시작한 샘표간장은 이 CM으로 인기몰이에 나섰다. 또 1966년 진하고 구수한 맛을 가진 간장이라는 의미의 ‘샘표진간장’을 선보임으로써 샘표간장은 20억 병 판매달성을 앞두고 있다. ‘한국 간장의 대명사’로 이름을 올린 샘표간장은 대상(주) 등 대기업의 시장참여에도 절반이 넘는 시장점유율로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태평양은 1945년 사업을 시작한 이래 수많은 히트상품을 출시하면서 국내 1위 화장품 회사로 성장했다. 흔히 아모레화장품으로 불리는 상품들이다.  1948년 개발한 ‘메로디크림’과 1950년 초 ‘ABC화장품’이 대히트를 쳤다. 또 1960년대에는 ‘오스카’, 1970년대에는 인삼화장품 ‘삼미’, 1980년대에는 ‘순정’, ‘미로’ 등을 히트시켰다. 이후에도 설화수, 마몽드, 라네즈, 헤라 등의 히트상품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여기에 1997년 프랑스 시장에서 출시한 향수 ‘롤리타 렘피카’는 현지 시장에서 3%에 육박하는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Top5 안에 랭크됐다. 태평양은 한류열풍을 타고 중국시장에서 라네즈 돌풍도 일으키고 있다.

 한일시멘트의 ‘레미탈’은 고객 밀착형 시멘트제품으로 업계 최초의 브랜드화에 성공한 히트상품이다. 별도의 골재 없이 물만 부으면 바로 사용할 수 있다. 모레와 시멘트를 용도에 따라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작게는 1회용 커피봉지 사이즈에서부터 크게는 40kg까지 다양하다. 시판중인 제품수만도 60여 종. 2004년 한일시멘트 전체 매출에서 18%를 차지하며 11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드라이모르타르 시장에서 ‘레미탈’은 7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part_7 {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리더십 }



 1976년 한일시멘트는 연산 110만 톤 증설 공장에 설치된 킬른(Kiln:소성로. 석회석을 굽는 가마로 시멘트 제조공정 중 가장 핵심) 시운전에 보름 이상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내자 100억 원, 외자 1800만 달러의 막대한 건설비를 투입해 설치된 이 가마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첨단시설이었다.  그러나 9월30일 첫 시운전 결과 이 최첨단 킬른에서 구워져 나온 클링카(2.5~4㎝정도의 동그란 석회석 덩어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량품뿐이었다. 시운전은 보름 이상 계속됐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도 한일시멘트 설립 이래 최대의 위기로 기록되고 있는 이른바 ‘킬른 시운전 사건’이다. 시운전에 실패할 경우 회사의 운명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모두가 포기하려 할 때 즈음, 창업주 허채경 사장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친 채 킬른대(소성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폭발위험을 무릅쓴 채 화력을 최대치로 높이라고 외쳤다. 죽음을 무릅쓴 최후의 비상수단을 감행한 것이었다.  시운전이 시작된 지 두 시간 후, 마침내 애타게 기다리던 클링카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모하기까지 한 허 창업주의 ‘킬른 시운전 사건’은 한일시멘트의 성장가도에 커다란 분기점을 그었다. 1976년 188억4100만 원이었던 매출은 이 최첨단 킬른이 본격 가동된 1977년 318억2200만 원으로 급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주요 제품에 자원 집중

 최고경영자의 리더십이 극명하게 표출된 이 사건으로 한일시멘트는 경쟁자들이 하지 못하는, 경쟁자들과는 거꾸로 가는 사업전략을 수립하는 등의 기업문화를 가지게 됐다. 승부를 걸만한 일에 모든 것을 집중시켜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힘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외환위기 당시 많은 기업들이 사업영역을 축소하고 경영이 위축되는 가운데 한일시멘트는 사내 정보통신망 확충과 연구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남들이 위기라고 할 때 21세기 정보화 사회를 준비하며 성장의 기회를 만들어간 것이다.

 1980년대 제약산업은 전체산업 가운데 성장률이 가장 낮았다. 과당경쟁, 자금압박, 금융비용 증가에 표준소매가제도 등 제도의 변화와 정부의 저물가 정책 등이 제약업계의 경영에 커다란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한독약품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제품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기존 제품마저 판매부진으로 회사의 분위기는 가라앉고 우수한 인재들은 회사를 떠나고 있었다. 제자리에 멈춰선 매출에 증가하는 부채비율은 한독약품 설립 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이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김영진 현 부회장이 부장으로 입사를 했다. 그는 2년 동안 독일 훽스트 본사 근무를 거쳐 1986년 귀국과 함께 전사적인 경영혁신과 의식개혁을 시도했다.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문제를 뒤로 제쳐두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부터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어 경영혁신의 첫걸음으로 제품 포트폴리오의 개선에 착수했다. 자원을 주요 제품에 집중투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품목수 감소에 따른 매출감소를 우려한 영업부의 반대로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해야야 했다. 동시에 전국의 영업부를 비롯한 모든 부서를 방문,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며 직원들과 호흡하려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80년대 후반부터 차츰 회복의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8년 326억 원의 매출을

한정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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