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비리에 따른 낙마인가, 친정체제 강화를 위한 현정은 현대회장의 회심의 카드인가.

 이른바 ‘김윤규 스캔들’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그가 ‘옥류관 금강산 분점 유치 때 리베이트를 챙기다 들통이 났다’부터 ‘평소 현 회장과 대북사업 추진에 있어 갈등이 많았다’까지 온갖 ‘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일각에선 이번 현 회장의 ‘결단’에 정씨 일가의 암묵적 지원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까지 내놓고 있다.

 그러나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 낙마 원인은 이번 사건을 읽는 핵심이 아니다. 이는 내부 감사를 맡았던 그룹 감사팀이나 알아낼 일이다. 아무리 큰일이 터져도 ‘B형 남자’처럼 무덤덤한 현대그룹 홍보팀은 “김 부회장이 남북경협 추진과정에서 일부 문제가 있었다”고만 말한다.

 중요한 건 이번 일로 현대의 대북사업 창구가 김 부회장에서 현 회장에게로 완전히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실제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정은 체제 출범 후 첫 내부감사였다”며 “타깃은 현대아산(김윤규 부회장을 지칭)에 맞춰져 있었다”고 그의 2선후퇴를 귀띰했다.

 그렇다면 현 회장은 왜 칼을 뽑았을까. 시아버지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양아들’ 대접을 받았고 남편인 고 정몽헌 회장이 ‘피를 이은 자식보다 더한 자식’이라고 두둔했던 김 부회장을 내친 진짜 이유는 뭘까.

 정답은 ‘친정체제 구축 강화’에 있다. 2003년 10월21일 취임 당시 현 회장은 사실 갑작스레 주인을 잃은 현대의 ‘대타 경영자’에 불과했다. 곧이어 터진 시삼촌 회사 KCC의 반란을 천신만고 끝에 막아냈을 때 재계에선 ‘현다르크’란 별명을 붙여줬지만 이는 ‘타이틀 방어’ 성격이 짙다. 재계 서열 21위 그룹을 이끌어갈 카리스마를 갖춘 ‘강력한 챔피언’으로 인정받은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는 10월이면 회장 취임 2년이 되는 현 회장은 사실 오너 경영자로서 운이 따르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취임 전후해서 안 좋았던 살림살이가 크게 나아졌다. 실제 취임 첫해인 지난해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은 ‘관리종목’의 악몽에서 벗어나 사상 최대 순익(4279억원)을 올렸다. 올 들어서도 1분기 매출액만 1조2300여억원에 영업이익도 1500억원이 넘어 호조세를 보이고 있다.

 그룹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도 마찬가지다. 2003년 3581억원 매출액에서 지난해 4408억원(순이익 839억원)이라는 A급 성적을 올렸다. 4408억원 매출액은 회사 설립 이래 최대치였고 올 1분기에도 140억원 영업이익을 내 전년동기 대비 77% 증가세를 보였다.

 물론 이 같은 실적 증가를 100% 현 회장의 공으로 안 보기는 어렵다. 한 예로 현대상선 호조는 해운 경기가 살아난 측면이 더 강하다. 뿐만 아니라 취임 2년이 가까워오는데도 ‘고 정몽헌 회장의 부인’이란 꼬리표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지난 7월 초복 때 모든 임원의 자택에 삼계탕용 닭을 택배로 보낸 ‘감성 경영’도 좋지만 진정 그에게 요구되는 건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조직 장악력이다. 이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마지막 가신으로 평가받아온 김윤규 부회장을 ‘읍참마속’의 제물로 삼았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내 색깔’을 내려고 하는 현 회장이 ‘더 이상 나를 MH의 아내로 보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라는 해석이다.

 이 같은 초강수는 지난 7월16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 백두산과 개성 관광을 따낸 게 결정적 계기였다는 게 그룹 안팎의 분석이다. 당시 김 위원장이 “금강산은 정몽헌 회장에게 줬는데, 백두산은 현정은 회장에게 줄 테니 잘해보라”며 그를 현대그룹 대북사업의 공식 파트너로 인정하자 현 회장이 자신감을 얻었다는 해석이다.

 실제 김 부회장의 2선 후퇴는 지난 3월17일 인사에서 이미 예견됐다. 당시 현대아산 이사회에서 예상을 뒤엎고 윤만준 상임고문이 대표이사 사장에 전격 선임됐던 것. 반면 당시 김윤규 사장은 직급은 부회장으로 올라갔지만 대외업무에 국한된 임무로 활동 반경이 제한됐고 신임 윤 사장과 대표 타이틀을 공동으로 써야만 했다. 이를 주도한 게 현 회장이었다는 점에서 숨겨놓았던 ‘칼’을 마침내 빼든 것이라는 말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최용묵, 김병훈, 윤만준 사장 등 신 측근 부상

 현재 주총과 이사회를 제외한 현대그룹 최고 의사결정 과정은 매주 월요일 열리는 회의다. 현 회장이 주재하는 이 회의는 첫째 주엔 계열사 상무급 이상이 참가하는 ‘동향보고회의’, 둘째 주 ‘영업본부장회의’, 셋째 주 ‘사장단 회의’, 넷째 주 ‘관리본부장 회의’로 구분돼 있다. 그런데 지난 3월부터는 윤만준 현대아산 대표가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고 김윤규 부회장은 일절 참가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위 ‘김윤규 스캔들’로 대북사업을 장악한 현 회장의 그룹내 친청체제는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현대그룹은 ‘현정은 사람들’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그룹 계열사를 움직이고 있다.

 ‘포스트 김윤규’ 시대 그룹내 최고 실세로 관심 받는 인물은 최용묵(57) 사장이다. 그는 그룹내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경영전략팀 사장으로 타그룹으로 치면 구조조정본부장이다. ‘그룹 월요 회의’에 매주 참석하는 유일한 인물로 알려진 그는 계열사 현대엘리베이터 사장과 함께 지난 7월 발족된 현대U&I 대표이사 사장도 겸직하고 있다.

 최 사장과 함께 2003년 6월 부국증권서 스카우트돼온 김지완(59) 현대증권 사장도 소위 ‘숙부의 난’ 때 경영권 방어 전략을 제공, 현 회장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소문나 있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1년 선배란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이력이다.

 윤만준(60) 현대아산 사장은 과거 정몽헌 회장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를 일궈낸 인물로, 고문으로 물러나 있다 사장으로 전격 재기한 현 회장의 신측근으로 꼽힌다. 7월 김정일 위원장이 내놓은 ‘선물’인 백두산 관광사업을 위해 8월말 사전답사를 떠나는 인물도 그다.

 이밖에 정몽헌 회장의 보성고 동기동창인 김병훈(56) 현대택배 사장도 현 회장이 취임 직후인 지난해 1월 직접 낙점한 현정은 사람으로 분류된다. 현 회장 취임 1년 전인 2002년 9월 현대차그룹 소속 현대캐피탈 부사장에서 현대그룹으로 ‘귀화’한 노정익(52) 사장은 현대상선을 재건한 경영자로 꼽힌다. 지난 연말 이미 현정은 회장으로부터 재신임을 받아놓은 상태다. 이렇게 보면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상선, 현대아산, 현대택배, 현대증권 등 그룹 유력 계열사 CEO 모두가 현 회장 사람들로 짜여진 셈이 된다.



 대북사업 능력 백두산 관광사업서 평가날 듯

 그룹 밖으로 눈을 돌리면 가장 관심이 가는 대목은 ‘김윤규 없는 현대의 대북사업 앞날’에 대한 전망이다.

 실제로 현 회장은 최근 틈만 나면 경영 최우선 순위를 대북사업에 두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난 8월4일 경기도 하남시 창우리 묘소에서 열린 고 정몽헌 회장 2주기 추모행사 때도 전 계열사 CEO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북사업 최우선 원칙을 밝힌 바 있다. 신중한 성격에 웬만큼 자신이 없으면 말하지 않는 성격인 현 회장 특성상 ‘문제없다’는 판단을 내린 듯하다.

 현대그룹측은 “(김 부회장이 빠지더라도) 현 회장이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대북사업의 새로운 파트너로 인정받은 만큼 큰 차질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미 금강산 사업 경험도 풍부한 데다 백두산과 개성 관광 관련 밑그림이 대부분 그려져 있어 큰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얘기다.

 그러나 일각에선 ‘김윤규 공백’을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대북사업의 핵심은 무엇보다 양측간 신뢰관계에 있는데, 한 번 만났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볼 때 현 회장의 대북사업 홀로서기는 일단 목전에 다가온 백두산과 개성 관광의 원활한 추진여부에 따라 성패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친정체제 강화로 제 색깔을 내기 시작한 현 회장의 경영능력은 지난해 8월 자신이 힘주어 강조했던 ‘2010년 매출 20조원 달성을 통한 재계 10위권 달성’ 여부에서 판가름 날 전망이다.

박인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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