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은 서울의 노른자위다. 전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상위 10곳 모두가 이 일대다. 그만큼 서울에서도 가장 번화한 지역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소비문화를 주도하던 명동은 한때 쇠퇴를 면치 못했다. 첨단 유행을 좇는 젊은 소비자들이 강남, 압구정, 신촌 등 서울의 신흥상권으로 몰리면서다. 이제는 다르다. 명동이 쇼핑의 중심지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그간 명동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확 바뀐 명동의 ‘쇼핑 지도’

패스트패션·화장품 쌍두마차 앞세워

글로벌 ‘쇼핑 메카’로 화려한 부활

10·20대 방문객 급증 … 보세가게·노점상 대호황

일본·중국 등 외국인 관광객들 VIP 고객 부상

8월12일 낮 12시 서울 중구 명동의 명동중앙길. 인파가 밀려든다. 평일인데도 골목마다 북새통이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과 점심시간을 틈타 거리로 나온 직장인들이다. 대부분 20·30대 여성들로 부지런히 쇼윈도를 살피며 신상품을 점찍어둔다. 패션 업계의 주력 소비자들답게 찜통더위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최근 명동을 찾는 여성들 사이에서 쇼핑의 필수코스로 자리매김한 곳들이 있다. 명동중앙길에 자리한 복합쇼핑몰 엠플라자의 자라(ZARA), 명동길(유네스코길) 눈스퀘어의 H&M, 충무1가 유니클로 단독매장이다. 지난 2~3년 사이 명동 핵심상권에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한 패스트패션의 대표주자들이다.

자라 매장에서 만난 김은지씨(22, 대학생)가 요즘 부쩍 명동을 자주 찾는 것도 패스트패션 매장들 때문이다. “친구들이나 선후배들 사이에서 자라, H&M 같은 브랜드들이 엄청나게 인기예요. 서울 시내에서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이 한꺼번에 몰려 있는 곳은 명동밖에 없어요.”

자라·망고·H&M 등 대형 쇼핑몰 ‘접수’

패스트패션이란 한 의류 업체가 기획에서 유통까지 모든 제품 공급 과정을 담당하는 브랜드다. 평균 2주마다 한 번씩 신상품을 쏟아낼 정도로 트렌드에 빠르게 반응한다. 가격도 일반 의류 브랜드의 절반 정도라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다. 글로벌 패션 업계에서 패스트패션 업체들의 입김이 날로 거세지는 이유다.

명동이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의 격전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가장 먼저 진출한 것은 유니클로다. 2007년 12월 한때 명동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명동의류’ 건물 전 층을 전용매장으로 꾸몄다. 뒤따라 GAP, 포에버21, 자라, 망고, H&M 등 패스트패션계의 글로벌 주자들이 엠플라자, 눈스퀘어, 영플라자 등 명동의 대표적인 쇼핑몰들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엔 국내 패션 업체인 이랜드도 자사의 패스트패션 브랜드인 스파오 명동 1호점을 개설했다.

소비자들의 반응도 폭발적이다. 올해 2월 H&M 오픈 행사에선 1500명의 방문객이 한 줄로 늘어서서 입장을 기다렸다. H&M을 비롯한 자라, 유니클로 매장은 하루 평균 1만~1만5000명의 쇼핑객들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다.

명동이 패스트패션 업체들의 경연장으로 부상한 것은 어마어마한 유동인구 덕분이다. 명동의 유동인구는 평일에도 대략 150만 명을 기록한다. 전국 상권을 통틀어 최고 수준이다. 특히 밸런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 등 대목이 돌아오면 발을 떼기 힘들 정도로 쇼핑객이 운집한다. 

유동인구의 연령대는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다. 멀티플렉스, 공연장 등 문화공간들이 속속 들어서며 볼거리와 놀거리가 확보되자 10·20대들의 발걸음도 잦아진 것이다. 패스트패션 업체들은 유행에 민감한 이들 10·20대를 정면 겨냥하고 있다. 이동희 명동관광특구협의회 사무국장은 “예전엔 주로 직장인들이 명동을 지나다녔다면 최근엔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등 10·20대 인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명동은 그러나 좀처럼 매장을 열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전국 최고 수준의 땅값 때문이다. 명동에서도 목 좋은 곳은 실거래가로 평당 2억원을 호가한다. 반면 의외로 매출은 높지 않다고 한다. 10·20대의 구매력이 낮은 데다 쇼핑과 무관한 단순 통행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패스트패션 업체들을 비롯한 명동의 대형매장들은 상당수 안테나숍(판매보다 소비자 반응· 경쟁사 동향을 탐지하는 데 치중하는 점포)이나 플래그십스토어(특정 브랜드의 성격과 이미지를 극대화한 단독매장) 형태를 띤다. 말하자면 명동 중앙 상권에 ‘전초기지’를 마련하는 것이다. 

한동안 명동 패션은 서울의 강남이나 압구정동, 신촌에 비해 인지도에서 밀렸다. 이동희 사무국장은 “트렌드 변화에 느린 일반 의류 브랜드와 30·40대 소비자들을 겨냥한 정장, 구두, 명품 등이 주류를 이뤘기 때문”이라며 “패스트패션 업체들의 진출 이후 명동의 소비 중심이 10~30대 소비자들로 빠르게 옮겨 가고 있다”고 말했다.

화장품 매장들 외국인 고객 유치 혈전

명동의 충무1가 24-2번지. 전국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이다. 어느 정도일까. 지난 5월 국토해양부의 발표에 따르면 공시지가로만 1㎡당 6230만원(평당 2억560만원)으로 6년째 전국 1위다. 이곳에 들어선 것은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 네이처리퍼블릭. 5층 건물 전체를 전용매장으로 활용 중이다. 명동 패션 업계에서 화장품이 지닌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명동이 대한민국 최고의 ‘화장품 특구’로 떠올랐다. 2008년까지만 해도 20여 개에 불과하던 매장들이 현재 60여 개로 대폭 늘었다. 규모도 커졌다. 과거 여러 브랜드 제품을 소량 취급하던 점포들이 모두 중대형 브랜드의 단독매장으로 변신한 상태다. 네이처리퍼블릭, 더페이스샵, 미샤, 아리따움 등 화장품 브랜드들은 명동에만 4~5개의 자사 단독매장을 운영하며 치열한 판촉전을 거듭한다.

명동의 화장품 시장을 일으켜 세운 일등공신은 최근 몇 년 사이 급증한 외국인 관광객들이다. 특히 일본, 중국, 동남아 등 한국 드라마와 영화, 대중음악을 즐기는 아시아 국가 관광객들이 주역이다. 한류 열풍에다 한류 스타를 광고모델로 기용한 효과가 크다는 분석이다. 국내 중저가 화장품들이 가격에 비해 높은 품질을 자랑하는 것도 한 이유다.

명동의 화장품 매장들은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불꽃 튀는 접전을 벌이고 있다. 명동만의 풍경이다. 일례로 명동에선 한류 스타 배용준, 비 등을 등장시킨 입간판과 포스터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세요)”, “셰셰, 환잉짜이라이(고맙습니다, 또 오세요)” 등 일본어나 중국어로 호객하는 매장 직원들의 목소리도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몇몇 매장에선 아예 일본인이나 중국인 등 외국인을 직접 고용하기도 한다.

명동 화장품 매장의 매출에서 실제 외국인들이 기여하는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명동을 통행하는 외국인들의 수는 하루 평균 3만여 명. 내국인에 비해 숫자는 적지만 지출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화장품 매출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는 설명이다. 일례로 충무2가의 네이처리퍼블릭 월드점은 많을 땐 매출의 80%가 외국인 방문객들로부터 나온다.

명동을 찾는 외국인의 70%가량은 일본인들이다. 화장품 소비도 실질적으론 대부분 이들 손에서 이뤄진다. 명동의 화장품 시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킨 주역인 셈이다. 한 화장품 매장의 관리인은 “일본인들에게 비비크림, 에센스 등 기초화장 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렸다”며 “비비크림 한 품목만 몇 박스씩 사가는 일본인 주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의 ‘한국행 러시’가 촉발된 것은 무엇보다 2008년 하반기부터 엔고 현상이 불거지면서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 위기로 엔화가 안전자산으로 부각되며 급속히 화폐 가치가 뛰어오른 것이다. 2007년까지 700원(100엔 기준)대에 머물던 원-엔 환율은 2009년 2월엔 1600원을 뛰어넘었다. ‘일본에서 한 끼니를 때울 돈이면 한국에선 이틀을 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인 관광객들의 지갑이 두툼해진 것이다.

현재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쇼핑 열기가 한풀 꺾인 상태다. 원·엔 환율이 다시 떨어지면서 일본인들의 구매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한국 관광 붐’이 다소 시들해진 탓도 있다. 대신 중국인 관광객들이 공백을 메워줄 것으로 기대된다. 세계 관광 업계의 ‘큰 손’으로 부각될 만큼 씀씀이가 큰 데다 한국 화장품에 대한 수요도 일본인 못지않게 많기 때문이다. 롯데백화점 명동본점의 관계자는 “중국 관광객 중엔 부유층들이 많이 섞여 있다”며 “100만원 수준의 설화수 등 고급 화장품을 세트로 구매해 가는 일이 예사”라고 말했다.

명동 자체가 거대한 쇼핑몰로 진화 중

유네스코길 명동CGV 오른편의 좁은 골목길. 명동1가다. 대기업 브랜드 위주의 중심상권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 반대편 명례방길과 함께 명동의 터줏대감격인 보세점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의류, 액세서리, 신발, 가방 등 무명 브랜드 제품들이 팔리는 곳이다.

언뜻 보면 중심상권의 브랜드숍에 밀려 골목으로 물러난 분위기다. 그러나 이 가게들을 가벼이 보면 오산이다. 장사가 잘 되는 곳은 하루 매출만 400만~500만원을 거뜬히 넘긴다. 어지간한 브랜드숍보다 훨씬 많은 매출을 올리는 곳도 있다. 이유가 뭘까. 이곳에서만 40년째 향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위영순씨(69)의 설명이다. “쇼핑에 관심 있는 젊은 사람들은 오히려 골목 쪽으로 더 많이 몰립니다. 중심가의 브랜드숍이나 쇼핑몰에서 취급하지 않는 싸고 독특한 품목들이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죠. 중심가가 대규모 매장들로 들어차도 손님을 빼앗길 일은 없는 셈이죠.”

퇴근시간과 주말, 공휴일 등 명동 유동인구가 최고조에 이르면 노점들도 속속 등장한다. 명동 상권 전역에 퍼져 영업하는 노점들은 대략 300여 곳. 의류, 액세서리, 모자 등 보세품목에서 짝퉁명품, 공예품, 길거리 음식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다. 비공식적으로 자릿세가 1억원에 이를 만큼 성황인 곳도 있다고 한다. 웬만한 인기 매장의 권리금을 연상시키는 금액이다. 노점 특성상 다른 매장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쇼핑, 관광객이 대거 몰리는 명동의 쇼핑 지형도를 풍성하게 하는 중요 요소로 꼽힌다.

쇼핑지구로서 명동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역동적인 다양성’으로 요약된다. 최첨단 패션이 오가는 복합매장과 브랜드숍, 전통적인 보세점과 노점 등이 어우러져 독특하고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동희 사무국장은 “명동지구 전체가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갖춘 거대한 쇼핑몰로 진화 중”이라며 “전국 최대 규모의 유동인구가 왕래하면서 국내 상권 중 가장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곳이 바로 명동”이라고 강조했다. 이곳 상인들 사이에서 ‘명동에 한 번 들어오면 다른 곳으론 절대 못 간다’는 말이 도는 이유를 알 법하다.

조석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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