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연구·개발(R&D)과 인수·합병(M&A)을 통해 중견기업들이 새로운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조언이 봇물 터지듯 나온다. 하지만 정작 중견기업의 움직임은 뜸하다. 몇몇 기업을 빼고는 관련 신규 투자도 찾아보기 어렵다. 국제 시장에서 한국 중견기업이 머지않은 미래에 경쟁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요새 기업인들 만나 ‘투자 좀 하고, 고용 좀 늘리세요’라고 말하면 뭐라고 답하는 줄 아나? ‘내 나이가 몇인지 모르나? 얼마나 덕을 보겠다고 신경 쓸 일을 더 만들겠어’라고 한다.”

반원익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은 ‘중견기업의 4차 산업혁명 대비와 미래’를 묻는 질문에 답답함을 호소하며 이같이 말했다. 반 부회장은 “지금 많은 중견기업이 승계 장벽과 직면해 있다. 일흔을 넘긴 기업인 입장에서는 ‘어차피 물려주지 못할 기업, 애써서 키울 이유가 없다’는 해명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투자가 없으니 당연히 새로운 일자리 창출도 요원하다. 승계 문제를 그대로 놔두고선 한국 산업의 활력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상속세 내고 나니 빈 호주머니

반원익 부회장은 현행 상속 관련 세제 문제를 꼬집었다. 한국의 경우 상속세가 최고세율 50%에, 최대 주주 주식에 대한 할증까지 더하면 많게는 65%에 달한다. 이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 최고 세율 26.3%보다 두 배를 훌쩍 뛰어넘는다. 물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반 부회장은 “승계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갑자기 오너가 사망하면 상속세를 내기 위해 보유 주식을 팔 수밖에 없다. 대량의 주식이 시장에 나오니 주가는 급락하고, 회사가 흔들리니 인력도 그대로 유출된다. 채권자들로부터 압박을 받고 그렇게 흔들리다 사라지는 기업이 한둘이 아니다”고 우려했다.

그는 “독일처럼 가업을 승계할 경우, 상속세를 면해주는 승계 제도를 고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이 가업 승계의 문을 열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한국도 경쟁력 있는 중견기업의 탄생을 위해서는 “독일식 가업 승계 제도를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5월 2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중견기업 일자리 박람회. <사진 : 중견련>

4차 산업혁명시대, 중견기업의 역할은.
“한국 중견기업은 국가를 대표해 글로벌 경쟁 무대에 출전한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으로 국가 간 장벽은 더욱 얇아졌고 앞으로는 장벽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무한 경쟁 시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기업군이 바로 중견기업이고 견실한 성장의 역사를 일궈 온 ‘혁신가’로서의 DNA도 보유하고 있다.”

중견기업의 미래 대비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R&D 역량이 부족하다.
“4차 산업혁명은 기술개발과 융·복합이 핵심이다. 그런데 2016년 226개 중견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자체 R&D 조직을 보유한 중견기업은 전체의 46.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4차 산업혁명에 걸맞은 기술 재도약을 위해서는 개별 기업 차원을 넘어선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중견기업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정부 정책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서 이번 정부의 정책 공약집에선 ‘중견’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대-중소기업의 이분법적 시각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대기업 ‘규제’와 중소기업 ‘지원’이라는 일반화된 사고방식이 문제다. 현재 중견기업 정책이라고 할 만한 내용도  중소기업을 갓 졸업한 초기 중견기업에 국한돼 있다.”

새 정부는 중견기업 정책을 중소기업청에서 산업부로 이관할 예정인데.
“중견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고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에 이르는 ‘성장 사다리’가 원활히 작동하는 건강한 산업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시혜적 지원’ 중심에서 ‘산업정책적 육성’으로 정책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 중소기업청이 중견기업 정책을 주관하는 동안 중견기업 관련 정책에 계속 시혜적으로 접근하더라. 중견기업 입장에서 몇 천만원 대출 지원 이런 정책은 필요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산업 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는 산업부로 간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새 정부가 일자리를 강조하고 있다. 양질의 일자리라는 차원에서 중견기업의 역할이 커질 듯 하다.
“정부의 노력에 맞춰 민간에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근무환경을 개선해 사회 안정과 통합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자리는 기업의 성장에서 파생되는 산물이라는 기본 원리를 고려할 때, 장기적으로는 기업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 중견기업은 전체 기업의 0.1%에 불과하지만 전체 고용의 5.5%, 매출의 17%를 차지한다. 대기업 못지않은 근무환경을 제공하는 좋은 일자리 창출의 핵심 기업군인만큼 중견기업이 잘 성장할 수 있는 산업생태계를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둬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중견기업의 미래는.
“중견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선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 중견기업인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하는 말이 바로 가업 승계다. 한번은 중견기업인을 만나 ‘투자 좀 하고, 고용 좀 늘리세요’라고 했는데, ‘내 나이가 몇인지 모르나? 얼마나 덕을 보겠다고 신경 쓸 일을 더 만들겠어’라고 하더라. ‘어차피 물려주지 못할 기업, 애써서 키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고령의 기업인들이 투자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투자가 없으니 새로운 일자리 창출도 요원하다. ”

상속과 관련해서는 반기업 정서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정부 주도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일어난 일부 기업들의 불법, 탈법 행위를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업이 쌓은 ‘부’를 전적으로 백안시하는 왜곡된 이해와 이념적인 접근은 지양해야 한다. 가업승계도 독일 등 해외 선진국에서는 ‘경영 노하우의 전수’로 오히려 장려하는 일이지만, 한국은 ‘부의 대물림’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본다. 국가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경제 혈류를 건강하게 회전시키는 핵심 주체로서 기업에 대한 건강한 인식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각계가 노력해야 한다.”


▒ 반원익
고려대 경영학과, 이탈리아 시마파크 CEO, 한국경영학회 부회장, 한국생산성본부 이사

윤희훈 조선비즈 성장기업센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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