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 액셀러레이터 스타트엑스가 스탠퍼드대 시멕스 오디토리엄에서 ‘왜 기업가 정신인가’라는 주제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 스타트엑스>

“우리가 찾는 것은 단 하나, ‘열정(fire)’입니다.”

10월 1일 오후 미국 스탠퍼드대 시멕스(CEMEX) 오디토리엄. 법률 스타트업 ‘리걸(Legal.io)’의 설립자이자 비영리 액셀러레이터(창업 육성 기관) ‘스타트엑스(StartX)’의 자문역인 토니 라이(Tony Lai) 변호사는 “꾸준한 열정만 있다면 누구나 창업할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스탠퍼드대 학생 대부분은 향후 인생의 10년 정도를 투자해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데, 그 정도 열정이면 창업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왜 기업가 정신인가(Why Entrepreneurship)’란 주제로 진행된 이날 행사엔 800여 명의 재학생이 모여 스탠퍼드 출신 선배 창업가들의 경험을 공유했다. 스타트엑스가 육성 중인 스타트업 CEO들이 무대에 올라 각자의 비즈니스 모델을 설명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기업용 소프트웨어, 커머스, 헬스케어 등 다양한 분야 창업가들이 각자의 문제 해결 방식, 사업 노하우를 설명했고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흥미로운 점은 스타트엑스가 스탠퍼드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액셀러레이터라는 사실이다. 2011년 설립된 스타트엑스는 스탠퍼드대와 관련 있는 스타트업을 선발해 사무실, 네트워킹·투자유치 노하우, 법률 자문 등을 무료로 제공하고 스탠퍼드대가 출자한 펀드(Stanford-StartX Fund)의 투자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모바일 메신저 ‘스냅챗(Snapchat)’을 만들어 최연소 억만장자가 된 에번 스피겔, 애플에 인수된 위치정보 스타트업 ‘와이파이슬램(WiFiSLAM)’을 창업한 조셉 황 등이 스타트엑스 출신이다.


미국 벤처 투자금 55% 실리콘밸리에 몰려

‘인재, 투자, 창업 문화’라는 스타트엑스의 성공 방정식은 실리콘밸리 전역에서 확인된다. 스탠퍼드대뿐 아니라 UC버클리, 카네기멜론대(실리콘밸리 캠퍼스) 등 세계 정상급 대학이 인재를 공급하고 있다. 구글·페이스북·애플 등 글로벌 테크 기업은 세계 각국 최정상급 엔지니어를 실리콘밸리로 불러모은다. 올해 상반기 기준 미국 벤처 투자금의 55%가 실리콘밸리에 투자됐다. 우버·에어비앤비·리프트 같은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스타트업)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도 실리콘밸리다.

그중에서도 창업 문화는 실리콘밸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가장 큰 특징이다. 어디에서든 스타트업 종사자를 만날 수 있으며 구글·애플·페이스북 등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형 기술기업(테크 타이탄)에 근무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스타트업을 창업한 CEO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비큐 파티, 가벼운 미트업(meet-up) 행사 등을 통해 스타트업 정보를 공유하거나 공동 창업 멤버를 찾는 사례도 흔하다.

실리콘밸리 터줏대감인 시스코에서 일하다 공기 상태 측정 스타트업 ‘어웨어(Awair·법인명 비트파인더)’를 창업한 노범준 대표는 “큰 그림을 보며 꿈꾸는 사람이 많고, 펀딩받을 기회도 많다. 투자, 인재, 성공을 돕는 문화가 어우러져 있다”고 했다.



제리 볼드윈(오른쪽) 스타벅스커피 설립자가 창업 교육 기관인 ‘드레이퍼 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 : 박원익 기자>

다른 사람 성공 돕는 문화 형성

실리콘밸리에서 지내다 보면 ‘페이 잇 포워드(Pay it forward)’란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다른 사람의 성공을 도우라는 의미다. 실제로 적극적으로 타인을 돕는 특유의 행동 양식과 문화가 널리 퍼져 있다. 무일푼이었던 스티브 잡스가 전화번호부만 보고 연락해 당시 인텔의 CEO였던 밥 노이스(Bob Noyce)를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 버클리에서 교육 스타트업 ‘에누마’를 운영하는 이수인 대표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주변에서 이끌어주고 더 큰 꿈을 가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 준다”며 “이것이 실리콘밸리의 힘이다”고 했다.

창업을 먼저 경험한 멘토를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실리콘밸리의 강점이다. 콘퍼런스, 테크 토크(tech talk), 노변담화(fireside chat), 미트업 등 다양한 형식의 행사가 1년 내내 열린다. 행사를 통해 스타트업을 먼저 경험한 창업 선배의 성공 비결과 노하우가 자연스럽게 후배 창업가에게 전달, 유통되는 셈이다. 노범준 대표는 “창업 후 가장 중요했던 순간은 MIT 미디어랩 교수,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총장을 지낸 존 마에다를 멘토로 만났을 때”라고 회고했다.

한국과 달리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창업가·CEO들은 적극적으로 대외 활동을 펼친다. 10월 2일 레드우드 시티에선 사티아 나델라(Satya Nadella) 마이크로소프트 CEO가 링크드인 설립자인 리드 호프만과 대담을 나누는 행사가 열렸고, 지난 3일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VC)인 ‘트랜스링크 캐피털’이 개최한 행사엔 구글의 자율주행차 프로젝트를 이끈 크리스 엄슨, 에버노트의 창업자 필 리빈이 등장했다. 지난 9월 창업 교육 기관 ‘드레이퍼 대학’을 방문한 제리 볼드윈 스타벅스커피 설립자는 강연 후 찾아온 학생들과 일일이 대화를 나누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구글·애플·페이스북·링크드인 등 테크 공룡들의 적극적인 인프라 투자도 창업 생태계를 풍성하게 한다. 구글은 본사가 있는 마운틴뷰에 무료 셔틀버스를 기증해 운영하고 있으며, 1.9㎿(메가와트) 규모의 태양 전지 패널을 설치해 300만㎾h(킬로와트시)의 친환경 전기를 자체 생산한다. 애플은 최근 본사가 위치한 쿠퍼티노에 초대형 신규 오피스인 애플파크를 지었다. 애플 본사에 근무하는 직원은 2만3000여 명에 달한다.

마운틴뷰에선 구글 맵 제작을 위해 특수 카메라 장비를 메고 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 자율주행 기술 업체 웨이모의 시범 주행 차량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쿠퍼티노의 경우 애플의 자율주행차(프로젝트 타이탄) 관련 차량이 자주 목격된다. 실리콘밸리 어디에서든 차량공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대신 장 봐주는 스타트업 ‘인스타카트’ 직원, 배달 대행 스타트업 ‘도어대시’ 직원도 자주 눈에 띈다. 새로운 서비스, 기술, 스타트업이 넘치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창업 생태계가 번성하는 선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plus point

샌프란시스코 ‘제2의 골드러시’

실리콘밸리 인근 광역 도시권(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에서 가장 큰 도시인 샌프란시스코는 최근 몇 년 사이 몰려드는 스타트업으로 제2의 골드러시를 맞고 있다.

화려한 대도시 생활을 즐기는 밀레니얼 세대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본산인 팰로앨토에서 차로 30분~1시간(50㎞) 거리에 있는 지리적 이점도 누리고 있다.

2012년 트위터 본사가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에 입주했고 그 후 우후죽순으로 스타트업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우버·에어비앤비·핀터레스트·드롭박스·리프트·스트라이프·슬랙·인스타카트·카밤 등 유명 유니콘은 물론 한국 창업가가 이끄는 미미박스·어웨어·에스이웍스·굿타임 등도 샌프란시스코에 사무실이 있다. 유니언스퀘어 근처를 걷다 보면 모든 연령, 피부색, 종교, 성별(성소수자 포함)의 사람과 마주할 수 있다.

스타트업이 몰리면서 생긴 문제점도 있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기존 거주민들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 중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주거비는 방 1개짜리 원룸의 평균 월세가 3400달러(약 380만원)로 상상을 초월한다. 세계 최고 수준 임대료를 버티지 못하고 노숙인으로 전락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작년 말 기준 샌프란시스코의 노숙인은 6686명(노숙인연합 추산 1만4000명)에 이른다.

샌프란시스코=박원익 조선비즈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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