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 스타트업’ 데모데이 행사에서 크리스틴 차이 500 스타트업 CEO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 박원익 기자>

“흩어져 있는 마케팅 데이터를 통합해 한곳에서 확인하세요. 여러분의 비즈니스가 달라집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Mountain View) 컴퓨터 역사 박물관(Computer History Museum) 대강당. 기업용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임프로바도(improvado)’의 최고경영자(CEO) 대니얼 크랍초프는 “우리는 매월 24%씩 성장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미국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 주인공인 존 스노 복장을 한 그가 열정적인 발표를 마치자 박수가 쏟아졌다. 글로벌 톱 액셀러레이터(창업 투자·보육 업체) ‘500 스타트업(500 Startups)’이 최근 개최한 데모데이(demoday·투자 유치 목적 사업 아이디어 발표회) 현장이다.


초기 스타트업 발굴‧투자 시스템 형성

시중 생수의 10분의 1 가격에 정수 필터를 판매하는 ‘폴리아워터(Folia Water)’, 건물이나 상점의 유리창을 디지털 광고판으로 만들어 주는 ‘루모튠(Lumotune)’ 등 28개 스타트업이 이날 발표했다. 이 중 43%는 인터내셔널(이스라엘·대만·러시아·우크라이나·이탈리아·스페인·터키·캐나다 등에서 온 창업가)팀이었고, 25%는 유색인종 멤버가 포함된 팀, 30%는 여성 멤버가 한 명 이상 있는 팀이었다. 크리스틴 차이(Christine Tsai) 500 스타트업 CEO는 “재능 있는 기업가를 찾아 투자하는 것은 우리의 미션”이라며 “함께 변화를 만들어 가자”고 했다.

실리콘밸리에선 1년 내내 스타트업 투자 유치 행사가 열린다. 훌륭한 인재와 기술, 사업 아이디어가 넘치는 만큼 벤처 투자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다. KPMG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 투자된 글로벌 벤처 투자금 401억달러(45조원) 중 56.4%인 226억달러(25조 3000억원)가 미국에 투자됐으며, 그중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서부(West Coast)가 55%를 차지했다.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글로벌 액셀러레이터들의 역할이 크다. 와이콤비네이터(Y Combinator·YC), 500 스타트업, 알케미스트(Alchemist) 등 내로라하는 액셀러레이터의 본사가 모두 실리콘밸리에 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실리콘밸리에서 초기 단계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시드(Seed) 투자를 집행해 스타트업이 빠르게 성장하도록 돕는다.

액셀러레이터들은 자체 네트워크, 데모데이 행사 등을 활용해 스타트업과 대형 벤처투자사(VC)를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스타트업 성장주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후속 투자가 이뤄지도록 돕는 것이다. 성과를 입증한 액셀러레이터들이 좋은 스타트업을 발굴해 소개해 주기 때문에 VC 입장에서도 훨씬 편하게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다.

에어비앤비·드롭박스·스트라이프·인스타카트·레딧·코인베이스는 YC가 발굴해 키운 대표적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이다. YC는 2005년부터 1464개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500 스타트업 역시 2010년부터 1800개 스타트업에 투자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유명 벤처투자자, 수천억원 단위로 투자하는 대형 벤처투자 회사들도 즐비하다. 페이스북 초기 주요 투자자로 유명한 엑셀 파트너스(Accel Partners), 구글·애플·시스코 등 실리콘밸리 테크 자이언트에 투자해 벤처투자업계의 전설로 불리는 세쿼이아 캐피털, 그루폰·인스타그램·스카이프 등에 투자한 앤드리슨 호로비츠(Andreessen Horowitz), 구글의 벤처투자 회사인 GV 본사가 실리콘밸리 핵심 도시인 멘로파크, 팰로앨토, 마운틴뷰에 몰려 있다. 한국계 투자자들이 이끄는 굿워터 캐피털, 포메이션 그룹, 트랜스링크 캐피털, 알토스벤처스 등도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두고 있다.


계약서 표준화, 투자 협상 쉬워

시드 단계에서 투자 결정이 빠르게 이뤄지는 것도 장점이다. 수익이 발생하지 않은 초기 스타트업의 경우 필요한 시기에 투자받는 게 중요한데, 투자 결정 과정이 길어지면 시기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YC의 투자를 받은 김동신 센드버드 대표는 “실리콘밸리에선 투자자가 커피숍에서 얘기 나눈 후 그 자리에서 투자하는 일도 많다”며 “계약서가 표준화 돼있기 때문에 따로 협상할 게 많지 않다. 투자금액과 기업가치(밸류에이션)만 맞추면 된다”고 했다. 시드, 시리즈 A, 시리즈 B, Pre-IPO(기업공개 전 투자), 엑시트(투자회수)가 물 흐르듯 이어지고 돈을 번 창업가들이 재투자에 나서 ‘투자 선순환’이 이뤄진다는 점도 실리콘밸리의 특징이다.


plus point

interview 에릭 킴 굿워터 캐피털 매니징 파트너
“회사 매출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본다”


에릭 킴 굿워터 캐피털 매니징 파트너가 실리콘밸리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 박원익 기자>

실리콘밸리 창업 생태계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연구, 창업, 투자 경험을 바탕으로 실리콘밸리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에릭 킴 굿워터 캐피털 매니징 파트너를 지난 2일 샌머테이오 오피스에서 만났다.


실리콘밸리 창업 생태계의 특징은 무엇인가.
“스탠퍼드대에서 공부하며 공동 창업자를 만나 창업했고 투자를 받았다. 인재, 투자, 인프라 등 창업에 필요한 모든 것이 실리콘밸리 안에 있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거나 회사를 세우기 좋은 환경이다. 스탠더드(기준), 리쿠르팅, 프로덕트 퀄리티 등 모든 것이 글로벌하다.”

실리콘밸리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실리콘밸리 생태계를 자세히 보면 가상의(virtual) 사이클이 있다. 시드, 시리즈 A, 그로스 캐피털(growth capital), 엑시트, 재투자 혹은 재창업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이 사이클이 잘 돌아가는 이유는 규제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2012년에 만들어진 잡스법(JOBS Act·Jumpstart Our Business Startups Act)이 대표적인 예다. 이 법으로 초기 단계 회사의 IPO가 아주 쉬워졌다. 그 이전에도 항상 규제 완화가 있었다. 회사 설립이 쉽고 세금 혜택도 많다.”

한국 창업 생태계에 필요한 것은.
“창업 생태계에 꼭 필요한 것이 좋은 멘토다. 실리콘밸리엔 ‘다음 세대에 더 좋은 세상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좋은 멘토가 많다. 나도 그런 멘토들에게 배웠다. 훌륭한 철학은 지치지 않는 열정과 창의력을 뒷받침한다. 실리콘밸리엔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라’는 말이 있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면 거기에 공감하는 인재도 모인다. 마크 저커버그를 보면 알 수 있다. 오너십보다 스튜어드십(stewardship·청지기 정신),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한국 스타트업을 위해 조언을 해준다면.
“투자할 때 ‘이 회사가 정말 중요한 회사가 될 것인가’를 본다. 매출이나 이익도 중요하지만, 이 회사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 회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더 많이 본다. 2011년 카카오에 투자했는데, 당시만 해도 메시징 앱이 거의 없었다. 카카오는 가장 먼저 나온 메시징 앱 중 하나였고 관련 업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모든 사람이 창업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을 하든 기업가(entrepreneur)처럼 생각하는 게 좋다. 그로스 마인드 셋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Or가 아니라 And’로 생각하는 거다. 팰로앨토에 톱해터(Tophatter)란 회사가 있다. ‘성장률에 집중할지 이익에 집중할지(Or)’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결국 ‘둘 다(And)’ 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 회사의 올해 매출은 3500억원에 이른다.”


▒ 에릭 킴
예일대 인지과학 전공, 스탠퍼드대 MBA, 굿워터 캐피탈 설립, 뮤지컬리·카카오·쿠팡·미미박스 투자 주도.

박원익 조선비즈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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