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기업이 몰려 있는 판교테크노밸리는 늦은 밤에도 불 켜진 건물들이 많다. <사진 : 조선일보 DB>

“판교는 공기부터 다르다.”

판교테크노밸리에서 일하는 지인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정말 그럴까. 지난 8일 판교테크노밸리를 직접 방문해봤다. 오전 7시 50분쯤 집 근처의 문래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이 시간대의 지하철 2호선, 특히 신도림역에서 강남역까지는 ‘지옥철’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많은 사람이 붐빈다. 실제로 지하철이 구로디지털단지역을 지나자 사람들이 지하철 안에 옥수숫대처럼 빽빽하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쯤 간 끝에 간신히 강남역에 도착했다.

판교는 공기부터 다르다는 말은 강남역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같은 강남역이지만 신분당선은 출근 시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산했다. 판교역까지 가는 내내 자리에 앉아서 갈 수 있을 정도였다.


“판교 출근 시간은 10시가 피크”

카카오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은 “판교의 출근 시간은 10시가 피크”라며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기업이 많고 개발자들은 그마저도 자유롭기 때문에 출근길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판교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50분. 뒤에서 밀치는 사람 한 명 없이 여유있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번 출구로 나오자 지인들이 입 모아 말했던 ‘맑은 공기’가 느껴졌다.

판교테크노밸리에 입주한 기업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1306개에 달한다. 2011년 처음 판교테크노밸리가 조성됐을 때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성장세다. 조성 첫 해에만 해도 입주 기업이 80여개에 불과했다. 매년 200여개의 기업이 판교테크노밸리를 찾아온 것이다.

판교테크노밸리 입주 기업의 총매출액은 77조4833억원에 달하는데, 전국 광역 지방자치단체 지역내총생산(GRDP)으로 따지면 7위 수준이다. 부산광역시(78조3920억원)보다는 조금 적고, 인천광역시(76조2060억원)보다는 조금 많다. 부산시의 면적이 765.82㎢로 판교테크노밸리(66만㎡)보다 1150배 정도 큰 것을 감안하면 판교의 경제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기업으로 치면 삼성전자·현대자동차에 이어 세 번째로 매출액이 많은 수준. 판교테크노밸리 그 자체가 한국 IT 산업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잡은 셈이다.

숫자로 보면 판교테크노밸리가 거창해보이지만, 내부 분위기는 여느 오피스 타운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유로웠다. 게임회사들의 공개채용 광고가 붙어 있는 판교역을 나와 코트야드바이메리어트서울판교호텔을 지나자 비로소 판교테크노밸리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판교테크노밸리의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 엔씨소프트 연구·개발(R&D)센터와 안랩 사옥이 제일 먼저 보였고, 그 뒤로 한글과컴퓨터 같이 익숙한 IT 기업의 로고가 이어졌다. 개나리교를 건너 판교테크노밸리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H스퀘어 광장으로 향했다. 오전 9시가 지난 시간이었지만 광장은 한산했다. 흡연구역에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지나가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흡사 주말 아침의 여의도를 보는 기분이었다. 판교에 입주한 기업들은 대부분 유연근무제나 자율출근제를 도입했기 때문에 다른 오피스 타운처럼 일정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이 몰리는 경우가 없다.

출근길을 서두르는 몇 안 되는 직장인들의 모습도 낯설었다. 정장을 차려 입은 사람은 열에 한 명이 될까 말까했다. 판교테크노밸리에서는 구둣방이나 양복점 찾기가 어렵다는 말을 실감했다. 출근길에 보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청바지에 후드나 잠바를 입은 편안한 차림이었다. 모자를 쓰거나 전동휠을 타고 오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여의도에서 일하다 두 달 전에 판교에 있는 회사로 이직했다는 한 직장인은 “이직하고 처음 며칠은 정장을 입었는데 오히려 너무 튀어서 옷차림을 바꿨다”며 “늘 정장만 입다가 편안하게 입으려다 보니 초반에는 옷값이 평소보다 더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판교테크노밸리의 분위기가 자유로운 건 젊은층이 많기 때문이다. IT 기업이 많다 보니 20~30대 비중이 다른 지역보다 높다.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에 따르면 판교테크노밸리 종사자 7만4738명 가운데 20대가 19.6%, 30대는 51.5%를 차지하고 있다. 판교테크노밸리에서 일하는 직원 열 명 중 일곱 명이 20~30대인 셈이다. 김동찬 엔씨소프트 매니저는 “판교에는 젊은 사람들이 일하고 싶어 하는 기업들이 많이 입주해 있다”며 “근무 분위기나 지역 문화 자체가 젊고 자유롭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카카오는 전체 직원의 3분의 1 정도가 스탠딩 데스크에서 업무를 한다. <사진 : 카카오>

핵심인력 유출 막으려 복지경쟁

카카오 판교오피스는 H스퀘어 N동에 있다. 이 건물 3층과 7~10층을 카카오가 쓰고 있다. 재미있는 건 같은 건물 4층을 카카오의 경쟁사인 네이버가 쓴다는 점이다. 이 건물 4층에는 네이버의 R&D 자회사인 네이버랩스가 있다. 가뜩이나 IT 분야는 이직이 잦은데, 비슷한 업종의 기업들이 한 지역에 밀집해 있다 보니 이직이 쉬울 수밖에 없다. 판교에서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면접을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윤승재 카카오 매니저는 “실수로 4층에 내렸다가 다시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동료 직원이 보고는 ‘면접 보고 왔냐’고 농담처럼 물은 적도 있었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이직이 잦다 보니 판교테크노밸리에 입주한 기업들은 핵심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 복지 제도를 앞다퉈 늘리고 있다. 예컨대 카카오는 수평적인 조직 문화와 자유로운 업무 환경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카카오는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위해 직급을 없애고 영어 호칭을 도입해 쓰고 있다. 김범수 의장은 브라이언(Brian), 임지훈 대표는 지미(Jimmy)라고 부른다. 카카오는 주요 이슈가 있을 때마다 ‘T500’이라는 전체 미팅을 개최해 임 대표가 직원들과 의견을 나누는데, 이때도 영어 호칭으로 서로를 부른다.

판교테크노밸리 조성 초기에 사옥을 옮긴 엔씨소프트는 20~30대 직원이 많은 것에 초점을 맞췄다. 엔씨소프트의 사내 어린이집인 ‘웃는 땅콩’은 영유아 교육기관으로는 세계 최초로 2개 부문의 국제표준기구(ISO) 인증을 획득했다. 200명의 임직원 자녀가 동시에 교육받을 수 있는 시설로 영어·중국어 같은 외국어 교육까지 제공한다. 판교에서 근무하는 삼성물산 직원도 “어린이집은 엔씨소프트가 판교에서 최고”라고 말할 정도다.

판교의 게임회사에 근무 중인 한 개발자는 “게임이나 인터넷 서비스나 사람이 하나하나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며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좋은 복지 제도와 사내 문화를 만들려고 노력하다 보니 판교 전체의 분위기도 좋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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