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실리콘밸리처럼 대학·연구소·벤처의 산학 연구·개발(R&D) 시스템이 구축돼 있지 않다. 혁신을 주도하는 벤처기업이 아닌 대기업에 정부 R&D 자금이 집중되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 우리의 문화와 산업여건에 맞는 ‘한국형 클러스터’ 정책을 고민할 시기다.”

남기범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산업클러스터학회 회장)는 판교테크노밸리가 지식 공유의 장(場)으로 거듭나야 ‘한국형 실리콘밸리’가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리콘밸리처럼 경쟁 기업과도 협력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혁신이 촉발된다는 것이다. 남 교수는 판교에 이미 성장한 기업만 모여 있다면 클러스터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면서 ‘창업→기술·신제품 개발→성장→투자금 회수’로 이어지는 창업 생태계가 판교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했다. 남 교수를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판교테크노밸리를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형 실리콘밸리를 표방한 클러스터가 국내에 수십 곳인데, 판교가 가장 성공한 사례다. 최근 들어 판교테크노밸리 내 기업 간 교류가 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판교테크노밸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규 창업이 전혀 없다. 다른 지역에 있는 기업이 옮겨온 것일 뿐, 판교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스핀오프(분사)한 사례는 거의 없다. 기업가정신이나 창업 관련 통계를 내놓지 못하는 이유다. 한국형 실리콘밸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상황에 맞게 클러스터를 통해 무엇을 달성할 것인지 목적이 명확해야 한다. 예를 들면 국가적 혁신인지 지역 또는 산업 발전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부의 지원이나 세제혜택은 물론 기업 유치 전략도 세밀하게 짤 수 있다.”

정부가 현 시점에서 판교테크노밸리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지난해 판교에 김앤장 법률사무소 지사가 생겼다. 정부 기관이 2년간 설득한 결과라고 한다. 요즘 벤처기업은 국내 시장만 보고 사업을 하지 않는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고 사업을 하다 보면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국제 소송 등 법무 서비스가 필요하다. 판교에 있는 기업이 서울 강남에 나가 법무 서비스를 해결하고 오면 하루가 걸린다. 클러스터에 기업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기업활동에 필요한 법무·금융·컨설팅 등의 ‘비즈니스 서비스’가 있어야 한다. 특허나 신기술 등 눈에 보이는 지식은 시장에서 거래를 통해 얻으면 되지만, 기업 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 공유가 일어나는 장(場)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클러스터에 입주한 기업의 목표는 혁신이다. 경쟁 기업과도 협력을 할 수 있는 이유다. 미국의 사례를 보면 보스턴 지역에 128번 도로(Route 128) 같은 클러스터가 있고 인근에 하버드·MIT 같은 명문대가 있지만 실리콘밸리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 했다. 보스턴에는 주로 바이오 기업이 많고, 직원들의 이직에 배타적이다. 반면 실리콘밸리에는 IT 기업이 많고 개방적이며, 이직도 활발하다. 기업들이 함께 모여 있으면서 혁신을 위한 시너지 효과가 실리콘밸리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전경. <사진 : 성남시>

판교에선 투자 유치를 못 해 실리콘밸리로 가는 사례도 있는데.
“미국·영국·한국이 자본주의 체제지만 시장 형태는 각자 다르다. 기업을 지원하고 뿌리내리게 하는 자원이 차이가 난다. ‘김기사(스마트폰용 무료 내비게이션)’는 626억원에 카카오에 매각됐다. 한국 벤처기업 중 성공적인 엑시트(exit·투자금 회수) 모델이다. 문제는 김기사 같은 기업이 많아야 하는데, 지금 우리의 생태계에선 벤처가 성공적으로 엑시트를 하기가 어렵다.”

실리콘밸리 성공에는 미 캘리포니아 주 정부의 역할이 컸다. 지자체의 역할은.
“이론적으로 중앙 정부는 기업에 재정적인 지원만 하고 간섭은 하지 말라고 한다. 지자체가 지역 기업의 특성을 잘 알고 있기에 기획부터 자금 집행, 평가 등을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한국 같은 실정에선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 서울과 경기도를 제외하고 국내 지자체 중 기업을 유치하고 제대로 지원할 여력이 있는 곳이 없다. 미국은 주가 하나의 국가다. 주마다 고유의 정책과 법이 있다. 한국에선 지자체가 외국 기업 유치에 성공하면 다른 지자체가 그 전략을 따라한다. 정책의 차별성이 없다.”

실리콘밸리 성공에 스탠퍼드대의 역할이 컸다. 판교에는 스탠퍼드대 같은 대학이 없다.
“판교는 (지리적으로는) 서울·수도권 모든 대학과 연결돼 있다. 대학의 역할은 장기적으로 기업과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실리콘밸리와는 다르다. 한국 이공계 대학의 연구 기능 50%는 국가에, 50%는 대기업에 의존한다. 벤처기업과 관련 있는 프로젝트를 하지 않는다. 정부의 R&D 자금도 여력이 있는 대기업에 집중된다. 판교에 대학이 있다고 해도 인근 벤처기업과 공동 기술개발 같은 협업이 쉽지 않은 구조다. 아직 한국에는 대학·연구소·벤처의 산학 R&D 시스템이 구축돼 있지 않다. 앞으로 실리콘밸리의 생태계를 참조해 개선해 나가야 할 부분이다.”

해외 클러스터 중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곳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을 단시간 내에 성공시켰다. 많은 해외 국가들이 우리를 벤치마킹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해외 사례는 참조할 만큼 했다. 지금은 해외 성공 사례를 좇기보다는 우리의 문화와 산업여건에 맞는 ‘한국형 클러스터’ 정책을 고민할 시기다.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클러스터만 만든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라 실리콘밸리처럼 제도와 여건이 종합적으로 균형을 이뤄야 국가는 물론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 남기범
서울대 지리학과, 캐나다 서스캐처원대 지리학 박사, 한국경제지리학회 회장, 산업클러스터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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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러스터 기업, 연구소, 대학, 기관(벤처캐피털 등)이 한곳에 모여있는 산업집적지를 의미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자율적으로 조성되기도 하며, 중국 중관춘처럼 정부가 기획단계부터 형성을 주도하기도 한다.

설성인 조선비즈 위비경영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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