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끝내고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모유 수유는 포기했어요. 죄인이 된 것만 같아요.’

갓난아기를 키우는 워킹맘이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글이다. 아기를 낳고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워킹맘들에게 모유 수유는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워킹맘이 모유를 포기하고 분유를 선택한다.

아이 셋을 두고 있는 존 장(John Chang)은 모유 수유 문제로 고민하는 아내를 보고 스마트 유축기(미리 모유를 받아 저장하는 수유보조도구)를 만들었다. 그가 개발한 스마트 유축기는 기존의 유축기에 스마트 웨어러블 기술을 결합해 만든 제품이다. 존 장이 만든 ‘윌로(willow)’라는 이름의 스마트 유축기는 브래지어 안에 작은 기기를 삽입해 모유를 짜내는 방식으로, 전기코드나 튜브가 없고 소음도 나지 않아서 일터에서도 착용할 수 있다. 존 장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윌로를 통해 더 많은 여성이 아이에게 모유를 수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기술 발전의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변화의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만큼 인간이 설 자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인간 지성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던 바둑에서마저 인공지능(AI)이 인간을 누르자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산업 트렌드를 분석하고 있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의 조은범 무역동향분석팀장은 “비즈니스 트렌드에서는 AI나 로봇의 차가움이 아닌 인간의 따뜻함, 인간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다”고 말했다. 윌로처럼 첨단 기술이 사람들의 삶을 보다 편리하고 안전하게 바꿔주는 방식으로 활용되는 사례가 계속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코트라에서 매년 발간하는 ‘한국이 열광할 세계 트렌드’의 편저를 맡은 조 팀장을 12월 27일 서울 서초구 코트라 본사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부산의 한 기업 직원 복지시설에서 직원들이 낮잠을 자고 있다. <사진 : 조선일보 DB>

여러 글로벌 트렌드를 꿰뚫는 하나의 키워드를 꼽는다면.
“변화의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쏟아지는 정보량도 엄청나게 많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과연 인간이 설 자리가 있는지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 비즈니스 현장에서 코트라가 목격한 트렌드엔 AI나 로봇이 아닌 인간의 따뜻함과 인간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2018년에 주목해야 할 트렌드를 모아 보니 결국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이템, 사람을 위한 기술이 많았다. 기술이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을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활용되는 사례가 많았다. 그래서 ‘휴머니즘’을 2018년의 트렌드를 아우르는 키워드로 꼽았다.”

휴머니즘을 위한 기술의 사례를 든다면.
“윌로는 웨어러블 스마트 기기를 유축기에 접목해 워킹맘의 모유 수유 부담을 덜어줬다. 네덜란드의 셰이크-온(shake-on)에서 만든 스마트 팔찌는 착용한 사람들끼리 악수만 해도 자동으로 각자의 개인정보가 전달된다. 모두 기술을 활용해 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만든 경우다. 고령인구가 많은 일본에서는 노인들의 건강 관리와 감정 치료를 위해 로봇을 보급하고 있다. 40㎝ 크기의 휴머노이드 로봇 팔로(Palro)는 노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보행과 운동 기능을 갖춘 덕분에 아침 시간에 체조 강사 역할도 할 수 있다.”

기술이 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할 수 있지만, 반대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지 않나.
“맞다. 모든 기술은 양면성이 있다. 기술의 오남용이나 폭주 같은 문제를 고민할 필요도 있다. 휴머니즘을 위한 기술이라고 하더라도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수 있다. 스마트폰을 예로 들어보면 사람들 간의 연결을 촉진하지만 동시에 얼굴을 맞대고 하는 소통을 단절시킬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모든 기술은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항상 오남용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코트라는 기업의 수출을 지원하는 조직인데, 트렌드 분석을 하는 이유는.
“연말에 서점에 가보면 트렌드를 분석한 책이 굉장히 많다. 트렌드 서적을 내는 게 트렌드일 정도다. 그런데 그런 트렌드 분석의 대부분이 국내 사례를 다루고 있다. 반면 코트라는 글로벌 트렌드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글로벌 트렌드 분석은 코트라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86개국 127개 무역관에서 근무하는 코트라 직원들이 각국에서 뜨고 있는 트렌드 사례를 정리해서 보내온다. 이렇게 보고되는 트렌드가 200여 건에 달한다. 이런 정보들이 국내외에서 사업을 준비하는 기업이나 창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앞으로도 코트라의 강점을 살려서 글로벌 트렌드를 계속 발굴할 계획이다.”

코트라에서 발간한 ‘2018 한국이 열광할 세계 트렌드’는 모두 11개의 글로벌 트렌드를 제시했다. △스마트웨어 △퍼스널 피팅 △타임 푸어 △스몰 챌린지 △스페이스 비즈 △플랜트 테크 △드론의 진화 △디지털 넛지 △데이터 예측 △실버봇 △디지털 영생이다.

11개의 글로벌 트렌드 가운데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나.
“사람이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게 의식주다. 의식주를 기준으로 보면 스마트웨어(의), 플랜트 테크(식), 스페이스 비즈(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마트웨어는 기존 의류에 정보통신기술(ICT)을 결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스마트웨어를 활용하면 섬유 산업을 다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육성할 수 있다. 양말에 센서를 부착해서 당뇨병 환자의 염증 여부를 실시간으로 알려주거나 보행 자세를 진단하는 기술이 이미 등장했다. 먹는 것과 관련된 플랜트 테크는 농업의 미래다. 농업에 ICT를 접목해 거실에 작은 농장을 만들 수도 있고 도심 건물 옥상에 대규모 농장을 가꿀 수도 있다. 스페이스 비즈는 버려진 공업지대를 공원으로 만들고, 폐교를 젊은 창업가들의 작업장으로 탈바꿈시킨다. 공유경제의 흐름이 공간 활용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주목한 트렌드 가운데 한국에서도 현실화된 게 있다면.
“2017 글로벌 트렌드로 데일리 디톡스(Daily Detox)를 제시했다. 직장인들이 일상에서 휴식을 찾는 트렌드가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한 건데, 실제로 지난해 한국에서도 데일리 디톡스 열풍이 있었다. 일상에서 피로를 느끼는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휴식을 위해 낮잠카페를 찾는 경우가 늘었다. 반면에 글로벌 트렌드가 한국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은 경우도 있다. 미국에서는 프레퍼족(재난에 대비해 미리 생존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둠스데이 아파트나 개인용 벙커 시장이 커졌다. 한국도 북한의 핵 도발 등 전쟁 위협이 있기 때문에 관련된 트렌드가 있을 것으로 봤는데, 실제 비즈니스에 활용된 경우는 많지 않았다. 또 식용곤충이나 우주식(食) 같은 퓨처 푸드도 한국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전 세계에서 보고되는 글로벌 트렌드를 보면 국가나 지역별로 시차가 있을 것 같은데.
“우리가 분석하는 트렌드의 대부분이 미국, 유럽, 일본 같은 선진국 사례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기술 트렌드를 분석하다 보니 아무래도 선진국과 관련된 사례가 많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경우 글로벌 트렌드를 거의 실시간으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다만 앞에서 말한 대로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거부감을 갖게 되는 트렌드는 어느 정도 시차를 가지고 들여올 수밖에 없다.”


▒ 조은범
연세대 법학과, 하와이대 국제경영학 박사, 코트라 칠레 산티아고 무역관, 이집트 카이로 무역관 근무

이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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