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열린 보아의 세종문화회관 단독 콘서트의 한 장면. <사진 : 트위터 캡처>

‘한류(韓流·Korean wave)’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건 1세대 아이돌 그룹 H.O.T.가 2000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성황리에 단독 콘서트를 마치면서부터다. 이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K팝(K-pop) 스타들이 한류 붐에 일조했다.

K팝 열풍을 주도한 아이돌 스타 중 진출 초기 임팩트로 보면 보아(본명 권보아)와 동방신기(東方神起·TVXQ)에 필적할 경쟁자가 드물다. 특히 음반 시장 규모와 대중음악의 저변에서 독보적인 아시아 1위였던 일본에서의 활약은 후배 아티스트들의 일본 진출과 성공을 돕는 촉매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의 이들 활약상에는 수없이 많은 ‘최초’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보아는 2001년 일본 데뷔 이후 한국 가수 최초로 오리콘 주간 앨범 순위 1위에 등극했다.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그로부터 2년 넘게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후에도 7개 앨범 연속 오리콘 주간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일본에서 보아의 인기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화제였다. 당시 미국 공영방송 PBS와 영국 BBC, 프랑스 일간 르몽드 등이 보아의 이야기를 앞다퉈 보도했다.


동방신기 日 인기, 2인조 재편 후에도 ‘굳건’

기자는 2004년 4월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돔 경기장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열린 보아의 단독 콘서트를 취재했다. 이종격투기 K-1의 주경기장으로도 유명했던 1만3000석 규모의 체육관에는 1만4000여명의 팬들이 운집해 엄청난 열기를 뿜어냈다. 당시 18세였던 자그마한 체구의 보아(프로필상 신장은 160㎝지만 더 작아보인다)는 공연 내내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공연을 보러 온 일본 팬들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구성이 다양했다. 이들은 형광봉을 일정한 패턴으로 흔들며 호응했다. 당시 보아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일본 관객들이 좀 더 시끄럽고 열정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차분한 스타일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 공연은 오사카와 나고야·사이타마 등 10개 도시에서 진행된 투어의 ‘대미(大尾)’였다. 투어의 티켓과 기념품 판매를 통한 매출은 100억원에 달했다.

2003년 5인조로 데뷔한 동방신기는 2009년 유노윤호와 최강창민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멤버들이 팀을 떠나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일본에서 동방신기의 인기는 이듬해 2인조 재편 이후 오히려 상승세를 탔다.

‘남성 듀오’로 거듭난 동방신기는 2012년 일본에서 발매된 싱글 ‘STILL’로 오리콘 주간 차트 정상에 등극, 해외 아티스트 사상 최초로 통산 10번째 위클리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현재 위클리 싱글 차트 12회 1위 기록을 보유 중이다. 2014년에는 일본 골드디스크에서 ‘베스트 아시안 아티스트’ ‘올해의 앨범’ ‘베스트 뮤직비디오’ 등 5개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해외 아티스트 최초이자 최다 기록이다. 2012~2015년 이들이 일본에서 콘서트를 통해 동원한 관객 수는 272만명에 달했다. 이에 앞서 2009년에는 일본 최고의 연말 가요축제인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戦)’에 한국 아이돌 그룹 최초로 출연하기도 했다.

데뷔 14년 차를 맞은 동방신기의 인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난해 나란히 군 복무를 마친 두 멤버는 오는 6월 8~10일 요코하마 닛산스타디움에서 공연한다. 닛산스타디움에서 3일 동안 공연하는 것은 일본 공연 역사상 처음이다. 이들은 지난 2013년 해외 아티스트 최초로 닛산스타디움에서 공연한 바 있다.



동방신기의 최강창민(왼쪽)과 유노윤호. <사진 : SM엔터테인먼트>

일본어 앨범 발표로 친밀도 높여

보아와 동방신기가 일본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현지화와 틈새 전략이다. 해외 진출을 노리는 기업들도 참고할 만한 대목이다.

2000년 국내에서 ‘아이디 피스 비’로 데뷔한 보아는, 2001년 일본으로 건너가 홀로 NHK 방송사 아나운서의 집에 머물며 일본어를 배웠다. 항상 한일사전을 들고 다니며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바로 찾아봤다. 일본 인기그룹 스마프(SMAP) 멤버인 기무라 타쿠야를 좋아해 그가 나오는 방송을 보며 그가 하는 일본말은 통째로 외웠다.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현지인들이 일본 가수로 착각할 수준까지 회화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고, 일본어 앨범을 발표하며 친밀도를 높였다. 한국에서 대스타라는 것을 내세우지 않고 신인 같은 자세로 임한 것이 주효했다.

동방신기도 국내에서 큰 인기를 누리던 2005년 일본에서 신인으로 데뷔해 철저한 현지화 과정을 거쳤다. 요란한 홍보 없이 ‘바닥’부터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동방신기’가 아닌 ‘도호신키(동방신기의 일본어 발음)’로 자신들을 알리면서 일본어와 문화를 익혀 이질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같은 노력은 차별화된 공연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서 선보인 노래나 안무를 배제하고 거의 모든 곡을 일본어로 소화한 것은 물론, 일본 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곡을 중심으로 콘서트를 꾸렸다.

틈새 콘텐츠 공략도 주효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 주류 대중음악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흑인음악적 요소들을 접목해 차별화한 것이 좋은 반응으로 이어진 것. 보아와 동방신기의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 이수만 회장은 당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SM은 스윙과 소울을 결합한 댄스음악을 실험했는데,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얻은 적이 없는 장르였다”고 설명했다.


plus point

日 아이돌 지형도 바꾼 동방신기의 차별화 전략


일본의 인기 아이돌 그룹 ‘아라시(ARASHI)’. <사진 : 트위터 캡처>

2005년 동방신기의 일본 데뷔 이전까지 일본 남자 아이돌의 주류는 아라시와 SMAP, V6 등 대형 기획사인 자니스 출신이었다.

자니스 아이돌은 노래 실력보다는 주로 퍼포먼스와 이미지 메이킹, 외모로 여성 팬을 사로잡았다. 가창력이 떨어지는 아티스트가 적지 않은데도 예능프로그램과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로 엄청난 수의 팬을 확보하며 음반 시장에서 정상을 유지했다.

이에 맞선 동방신기의 차별화 포인트는 가창력과 댄스 실력이었다. 동방신기는 한국 데뷔 시절에도 ‘아카펠라 댄스 그룹’을 표방하며 화음과 라이브 실력을 내세웠다. 또 힙합과 재즈댄스 등 각종 춤에 능숙한 유노윤호를 앞세워 퍼포먼스가 다양하지 못한 자니스계 그룹을 압도했다.

외모에서도 일본 여성들이 좋아한다는 아담하고 마른 체형, 예쁘장한 얼굴의 ‘꽃미남’을 선호하는 자니스계 그룹과 달리 각 멤버의 개성을 살리는 동시에 남성미로 차별화한 것도 주효했다.

이용성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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