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온 줄 알았더니 갑작스럽게 꽃샘추위가 찾아오고 서울에 많은 눈이 내린 지난 21일 오후 3시, 결혼 2년차 가정주부 노모(30)씨의 서울 관악구 봉천동 신혼집을 찾았다. 오래된 아파트지만, 주방에서 손님을 반긴 건 1902년 세워진 이탈리아 명품 주방가전 브랜드 ‘드롱기(De’Longhi)’의 전기주전자였다. 옆엔 드롱기의 토스터가 있었다. 요즘 신혼부부의 ‘드롱기 3종 세트’ 중 에스프레소 머신을 뺀 두 가지를 갖췄다. 1950년대 느낌의 레트로(복고풍) 디자인의 주전자로, 곡선이 부드럽고 색감이 우아하다.

노씨는 드롱기의 전기주전자로 물을 덥혀 차를 끓여 냈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몸을 녹이며 노씨는 “결혼하기 전 친정에서 쓰던 테팔 전기주전자보다 물이 끓는 속도는 조금 느리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아침에 남편과 마주 앉아 드롱기로 만든 토스트와 커피를 먹고 있으면 이탈리아에 온 듯하다”라고 했다.

노씨의 신혼집엔 요즘 많이 보급된 다이슨의 무선진공청소기도 있었다. 선이 없어 청소할 때 거추장스럽지 않고, 독특한 디자인이 눈길을 끄는 제품이다. 눈에 잘 안 보이는 붙박이장 안이나 베란다에 보관하는 일반 진공청소기와 달리, 거실에 세워두어도 이상하지 않다. 80만원이나 되는 가격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노씨는 “흡입력이 좋고, 다양한 헤드 툴이 있어서 창문 틈이나 이불을 헤드 툴만 바꿔 청소할 수 있다. 무선이고 배터리를 이용하기 때문에 들고 나가 자동차 시트도 청소할 수 있다”고 했다.



LG전자가 제안하는 빌트인 가전이 설치된 가정. 식기세척기, 와인셀러, 세탁기, 스타일러, 인덕션 등이 갖춰져 있다. 사진 LG전자

LG전자 가전 부문, 매출 20조원 눈앞

가전이 달라지고 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가전은 최근 재발견됐다. 하나는 전에 없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새로운 기능의 측면에서, 다른 하나는 인테리어의 측면에서다. 이 변화는 가전업체가 수익성 측면에서 한 단계 뛰어오르게 했다.

가전제품은 오랜 기간 수익성이 낮아 정체된 시장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냉장고·세탁기·에어컨’이라는 3대 가전은 이미 대부분의 가정에 다 보급됐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가전산업의 성장은 인구 증가율과 경제 성장률에 연동돼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컨설팅 업체 맥킨지는 1999년 LG그룹에 “가전사업은 수익을 내기 어렵다. 제너럴일렉트릭(GE)에 매각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했을 정도다.

그러나 LG전자는 이런 편견을 깼다. LG전자 가전사업 부문(H&A사업본부)의 매출액은 지난 3년간 연 16조~17조원 수준이었으나, 작년엔 19조원 수준으로 껑충 뛰었다. 영업이익률은 2014년 3.7%에서 지난해 7.7%로 높아졌다. 작년 1분기엔 영업이익률(매출액 대비 영업이익 비율)이 11.2%에 달했다.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LG전자는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가전제품을 고급화시켜 시장에 내놓았다. 이는 판매대수와 매출액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런 프리미엄 가전은 일반 가전보다 매출액은 물론 영업이익 증가에 크게 기여한다. 일반 제품보다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지만, 가격 상승분만큼 제조원가도 올라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아래로 드럼과 통돌이 세탁기를 결합한 ‘트윈워시’ 세탁기가 대표적이다. 가격이 일반 세탁기의 두 배가 넘지만, 지난해 1~10월 전 세계 판매량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30% 증가했다. 출시 국가가 40여개국에서 80여개국으로 늘어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미국에서 판매량이 20% 증가하는 등 소비자 호응이 뜨겁다. 한국은 판매된 드럼 세탁기 중 절반이 트윈워시일 정도다. 글로벌 백색가전 시장에선 연간 판매량이 5%만 늘어도 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전자나 수입 브랜드의 프리미엄 가전 판매도 물론 늘었다. 유진투자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 롯데백화점에서 프리미엄 가전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매출액이 66.7% 늘었지만, 일반 가전제품은 15.8% 증가하는 데 그쳤다.

물론 트렌드 변화는 소득수준이 향상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 국가의 가전제품 보급률은 국민소득과 깊게 연관돼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에서 냉장고와 세탁기는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94년부터 100%에 가까운 보급률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에어컨은 1994년엔 10% 수준에 그쳤고, 그 이후 꾸준히 상승했다. 냉장고가 없으면 음식이 쉽게 상하고 세탁기가 없으면 크게 불편하지만, 더운 건 참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소득이 1만달러, 2만달러를 돌파하자 참지 않고 에어컨을 사게 됐다.

LG전자와 삼성전자 가전사업 부문의 실적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빨래 건조기도 이런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빨래는 널어서 말릴 수 있지만, 건조기를 쓰면 더 편하게 빠른 시간에 더 좋은 촉감의 옷을 느낄 수 있다. 아직 한국에서 빨래 건조기 보급률은 낮은 편이지만 곧 ‘1가구 1건조기’ 시대가 올 것으로 전망된다. 가전업계에 따르면 지금은 세탁기 10대가 팔리면 건조기는 8대쯤 판매된다. 미국은 세탁기를 사면 빨래 건조기도 사는 경향이 있다.

소셜미디어가 확산돼 보통 사람들이 일상을 공유하는 것도 인테리어 역할을 하는 고가 프리미엄 가전이 확산된 배경이다. 예전엔 고가의 외제차를 타거나 명품 가방을 들어야 부(富)를 과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전은 집 안에 있기 때문에 자랑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는 소셜미디어에 사진을 한 장 올려 ‘이렇게 예쁘고 비싼 가전을 샀다’는 걸 과시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20~30대가 많이 이용하는 소셜 미디어 ‘인스타그램’에서 ‘(이탈리아 가전 브랜드) 스메그’로 검색하면 이용자들이 ‘#스메그’라고 검색할 수 있게 해시태그를 달아 올린 사진이 1만8369개 뜬다(3월 22일 기준). 유통업체가 마케팅하려고 올린 사진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집에서 ‘스메그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걸 자랑하려고 올린 것이다. 한 사람은 하늘색 스메그 블렌더(믹서)에 방울토마토와 주스용 샐러리, 꿀을 넣은 사진을 올리고 “오빠는 샐러리 넣는 건 싫어하지만 이렇게라도 야채를 먹이고 싶어. 대신 꿀도 넣으니깐 달달해요”라는 글을 올렸다.



지난 1월 CES의 삼성전자 부스에서 관람객들이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기능이 접목된 ‘셰프컬렉션 패밀리허브’ 냉장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사진 찍어 올리고 #스메그

인스타그램에서 ‘스메그’로 검색해 나온 게시물.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스메그의 강점은 디자인이다. 용량 300ℓ짜리 냉장고의 가격은 약 300만원으로 국내 가전업체 대용량 냉장고의 2~3배 수준이지만, 판매량이 많다. 토스터·전기주전자 등도 인기가 높다. 스메그는 연간 매출액의 7%를 디자인 R&D에 투자한다. 신혼부부의 필수품 ‘드롱기 3종 세트’를 만드는 드롱기도 소셜미디어에서 젊은층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21일 오전 11시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있는 ‘삼성디지털플라자’ 매장. 한쪽 구석에서 남성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의 히트곡 ‘피 땀 눈물’이 흘러 나왔다. 이곳에 진열된 TV에 뮤직비디오가 틀어져 있기 때문에 음악이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분명히 어딘가 이상했다. ‘내 피 땀 눈물 내 마지막 춤을 다 가져가 가’라는 가사가 나오는 기계가 TV나 오디오가 아닌 냉장고였기 때문이다.

이 냉장고는 삼성전자가 만든 신개념 냉장고 ‘셰프컬렉션 패밀리허브’다. 패밀리허브는 냉장고 본연의 기능인 식재료 보관 외에 간단한 인터넷 검색부터 음악·라디오 감상, 요리 레시피 확인, 쇼핑까지 주방에 최적화된 기능을 제공하는 스마트 가전이다.

올봄 결혼을 앞두고 이곳을 찾은 이승현(30)씨는 패밀리허브의 ‘푸드알리미’ 기능에 푹 빠졌다. 푸드알리미는 냉장고 내부에 설치돼 있는 3개의 카메라로 냉장실에 보관 중인 식품을 외부 스크린과 스마트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다.

이씨는 “냉장고 안에 어떤 게 있는지 문을 열지도 않아도 확인할 수 있고, 유통기한이 짧은 유제품이나 야채 등을 외부 스크린으로 터치하면 언제 샀고 언제 버려야 하는지 메모할 수 있어 매우 유용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이 보편화될 미래엔 스마트 가전이 성장을 주도할 것으로 전망된다. 가전이 완전히 우리의 삶에 녹아들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음성을 인식해 노래를 들려주는 냉장고처럼, 벌써 음성인식 기술을 탑재한 스마트 가전이 프리미엄 가전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스마트홈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11조원이었던 스마트홈 시장은 2019년엔 21조원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스마트홈에 대비해 구글과 같은 IT 기업, SKT·KT 같은 통신사, 아마존 같은 전자상거래 기업이 가전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스마트홈이 보편화될 미래에도 가전업체는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IT 기업이 가전제품에 들어갈 플랫폼은 만들 수 있지만, 직접 가전제품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방가전·소형가전에 주력하는 중견 가전업체도 스마트홈에 대비하고 있다. SK매직은 국내 최초로 IoT 기능을 탑재한 가스레인지를 출시했다. 스마트폰 앱을 통해 집 밖에서도 버너의 작동 상태를 확인하고 가스 불을 끄고 가스도 차단할 수 있다. 쿠쿠의 IoT 밥솥은 외출 시 절전모드 전환 등의 기능을 제공한다. 같은 제품을 사용하는 다른 사용자가 많이 지어 먹는 밥 정보도 제공한다.

주방가전에 IoT가 결합된 스마트홈 제품이 출현하고, 디자인 수준이 높은 제품을 선호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시장조사기관 NPD그룹의 조 디로초우스키 애널리스트는 3월 10일부터 13일까지 시카고에서 열린 ‘시카고국제가정용품박람회(IHHS)’에 참석해 오늘날의 소비자가 원하는 주방은 △건강한 식생활을 도와주는 식재료 △빠르게 요리할 수 있는 조리도구 △이용자와 소통하는 스마트홈 가전 △세련된 디자인의 주방가전 △조리를 돕는 주방 혁신이라고 정리했다.

디로초우스키는 “스마트홈 기술은 점점 대중화되고 더 더 많은 주방 제품에 진출하고 있다”라며 “‘콜드린 파이어(Cauldryn Fyre)’ 텀블러는 음성 비서 ‘구글 어시스턴트’와 협업해 재미와 기능을 모두 잡은 제품이다. 배터리를 이용해 텀블러 안의 음료를 덥힐 수 있는 이 제품은, 이용자가 음성으로 원하는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주방가전 업체는 혁신적이고 스타일리시하면서 디자인이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 전체 산업의 인기를 높이고 수요를 확대한다”라며 “가장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제품은 스메그와 패션 업체 돌체&가바나가 협업한 제품”이라고 했다. 최근 두 업체는 협업을 통해 독특한 디자인의 전기주전자와 토스터, 전기 착즙기 제품을 내놓았다.


Plus Point

가전 매장서 찾아보기 힘든 美·日 기업 제품

가전 산업이 재평가되고 있지만, 가정에서 미국이나 일본 브랜드 제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생산은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하더라도 브랜드 파워 자체는 강력한 다른 산업과 다르다.

미국 생활가전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은 삼성과 LG 등 한국 기업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랙라인(Traqline)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미국 내 냉장고·세탁기·가스레인지 등 생활가전 시장에서 전체 점유율(금액 기준) 19.5%로 2016년(17.3%)에 이어 1위를 기록했다. LG전자는 2016년과 같은 15.7%를 기록했으나, 순위는 3위에서 2위로 한 계단 올랐다. 월풀이 15.4%로 전년보다 1.2%포인트 하락하며 2위에서 3위로 떨어졌다. GE와 켄모어는 각각 0.1%포인트와 1.3%포인트 떨어진 13.5%와 9.1%로 집계됐다.

만족도 기준으로는 LG전자가 우세하다. JD파워의 지난해 7월 발표에 따르면 생활가전을 구입한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품목별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LG전자가 총 11개 부문 가운데 드럼세탁기, 전자동 세탁기, 건조기, 일반 냉장고, 프렌치도어(문이 3개 이상인) 냉장고, 프리스탠딩(필요에 따라 이동해 사용할 수 있는) 레인지, 식기세척기 등 7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보쉬는 쿡탑(가스레인지, 전기레인지 등), 월오븐(붙박이 오븐), 후드 겸용 전자레인지 등 3개 분야에서 1위에 올랐고, 삼성전자도 양문형 냉장고에서 선두를 차지했다. 미국 회사는 1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월풀이 소비자에게서 외면받는 이유는 제품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월풀도 기술 개발을 소홀히하고, 신흥국 매출을 늘리기 위해 다른 기업을 인수하는 데만 중점을 뒀다. LG전자는 스마트폰에서 적자를 보면서도 연구·개발(R&D)에 꾸준히 투자를 늘려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 비율이 2016년 7.0%까지 상승했다. 월풀은 3.0% 미만이다. 노 연구원은 “아직 월풀이 세탁기 자체는 많이 팔지만 중저가 모델이 대부분이고 프리미엄 모델은 삼성·LG가 압도적이다”라고 했다. 미국 정부가 지난 1월 수입 세탁기에 대해 세이프가드(긴급 수입제한조치)를 단행한 것도 이런 경쟁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단면일 수 있다.

일본의 가전 업체 상황은 더 심각하다. 과거 압도적 기술력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중국 기업에 넘어가 브랜드만 유지하고 있는 업체들이 적지 않다. 산요는 하이얼에, 도시바의 백색 가전부문은 메이디에 인수됐다. 일본 브랜드는 인지도가 낮고 소비자들이 선호하지 않는 중국 업체들이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하이얼은 산요를 인수하면서 얻은 ‘아쿠아(AQUA)’ 브랜드를 글로벌 시장 진출에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세탁기에만 사용되던 이 브랜드를 냉장고로 확대했다. 중국 제품의 인기가 낮은 인도네시아에서 소비자 브랜드를 ‘아쿠아’로 통일했다. 일본 색채를 강화하기 위해서인지, 하이얼의 영문 홈페이지엔 아쿠아 브랜드의 콘셉트에 대해 ‘사용하는 느낌도 소중하다(使い心地もprecious)’라고 일본어를 넣어 소개하고 있다. 산요의 일본 기술력으로 제품을 만들었다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일본의 가전 산업은 어쩌다 이렇게 쇠퇴했을까.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가전업계 전문가는 “과거 성공했던 방식에 지나치게 매달려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 기존 시장 점유율에 집착하다가 인터넷 시대에 적극적으로 변하지 못했다”라며 “생산 체제도 그룹 내 수직계열화돼 있어 국제적인 분업이라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가지 못했다”라고 했다.

손덕호·장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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