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뮤다의 데라오 겐 사장은 “이 회사의 강점은 자유로움에 있다”고 말했다. 사진 발뮤다

발뮤다(BALMUDA)는 자연에 가까운 바람을 내는 3만5000엔(약 35만원)짜리 선풍기, 겉은 바삭하게 속은 촉촉하게 만들어 ‘죽은 빵도 살린다’는 2만5000엔(약 25만원)짜리 토스터 등을 만드는 프리미엄 가전업체다. 고가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고 세련된 디자인과 본연의 성능을 무기로 히트 가전을 연발,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주목을 끌어왔다.

비 내리는 도쿄의 아침, 신주쿠 전철역에서 주오센(中央線)을 타고 서쪽으로 30분간 달렸다. 발뮤다의 데라오 겐(寺尾玄·45) 창업자 겸 사장(CEO)을 인터뷰하러 가는 길이었다. 도착한 곳은 무사시노(武蔵野) 무사시사카이(武蔵境)역. 발뮤다 본사가 있는 무사시노는 유명 미술대학인 무사시노 미대 발상지이자, 도쿄 중산층의 주거 선호도에 항상 최상위권에 있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주택가가 있는 곳이다. 제2차세계대전 때 전투기를 만들던 나카지마(中島)제작소가 있던 곳으로 과거엔 정밀기계 산업도 발달, 지금도 정밀 금형·가공 업체 일부가 남아 있다. 무사시사카이역 남쪽 출구를 나와 15분쯤 한적한 주택가 골목을 곧장 걸었다. 3층짜리 흰색 건물이 보였다. 발뮤다 본사다. 빗길을 걷는 동안 바지가 흠뻑 젖어 불편했지만 로비에 들어서고는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전시된 발뮤다의 멋진 제품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직원 안내를 받아 3층으로 향했다. 3층은 데라오 사장과 그가 이끄는 디자인팀이 일하는 곳이었다. 공간 안 오른쪽 구석에 사장 책상이 보였다.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와 허먼밀러의 에어론 의자, 책상 옆으로 일렉트릭 기타와 앰프가 놓여 있다. 인터뷰는 사무실 한가운데 회의용 목재 테이블에서 이뤄졌다. 그는 후드 티에 점퍼 차림이었다.


발뮤다는 어떻게 만들었나.
“2003년 혼자 창업했다. 첫해 매출은 600만엔(약 6000만원)이었다. 지금은 직원 85명, 작년 매출 90억엔(약 900억원)이었다. 15년간 매출이 1500배 정도 증가했다. 2010년 선풍기를 발매하고 나서부터 매출이 크게 늘었다. 그리고 공기를 순환시키는 서큘레이터, 가습기, 히터 등 냉난방 가전을 지난 몇 년간 만들어 왔다. 한국 전통 디자인에 관심이 많다. 발뮤다 가습기는 항아리 모양인데, 박물관에서 봤던 조선백자에서 영감을 받았다. 2015년부터는 주방용품 시장에 들어갔다. 스팀을 이용해 식빵을 맛있게 하는 토스터, 전기 포트도 있고, 전기 밥솥도 있다. 작년 가을에 발매한 오븐레인지도 있다.”

발뮤다 제품은 디자인이 좋아 보인다.
“‘발뮤다는 디자인이 참 예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우리를 스마트한 디자인을 하는 회사로 많이 생각하는데, 오해다. 우리는 근성 있는 회사다. 용기와 열정이 있는 회사다. 디자인과 기술도 중요하지만 뛰어넘어야 할 어려운 장벽들 앞에서 필요한 것은 열정과 용기다.”

그런 열정과 용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991년 열일곱 살 고교 2학년 때였다. 나는 (이른바 일류대) 진학률이 꽤 높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어느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 어떤 대학, 어떤 과를 갈 것인지와 이과·문과를 선택하는 설문지였다. 절대 작성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재산도 경험도 없었지만 내 가능성을 믿고 싶었다. 열일곱 살의 어정쩡한 상황에서 직업란에 뭔가를 써놓고 장래를 결정한다? 내 가능성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했다. 이런 설문조사를 하는 어른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순순히 쓰고 있는 친구들도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설문을 작성하지 않고 제출 당일에 대신 자퇴서를 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렸나.
“부모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모님 메시지는 단순했다. ‘세상은 자유로운 곳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든 네 자유다’였다. 자유란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결단이 곧 자유의 행사인 것이다. 열일곱 살 때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처음 자유로워졌다. 결단은 인생에서도 비즈니스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스스로 납득하는 결단을 내리며 살아가려면 인생의 큰 방침을 정할 필요가 있다. 내 인생의 방침은 ‘완전히 타오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힘차게 불꽃을 내고 타다가 숯이 되고 나중에 재가 되는 것. 에너지가 될 만한 것은 모두 다 써서 마지막에 재가 되는 것에서 미(美)를 느낀다. 그래서 나는 되든 안 되든 내 모든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도쿄 서쪽 무사시노에 위치한 발뮤다 본사 입구 사진 최원석 에디터

이야기 속에 죽음에 대한 생각이 서려 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사고로 어머니를 갑자기 잃었다. 그때 ‘사람은 다 죽는다. 죽으면 아무리 원해도 다시 만날 수 없다. 고마움도 미안함도 전할 수 없고 정말로 사라지고 만다’는 것, 다시 말해 내 인생도 유한하다는 것을 배웠다. 2000년쯤 살 수 있다면 매일 치열하게 보내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몇십 년밖에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 힘을 내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살려니 매일이 너무 피곤하다.(웃음) 하지만 최고로 즐거운 인생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싫은 것으로 즐거워질 수는 없다. 재미있는 일이라 해도 하면 할수록 그 일은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재밌고 즐거운 일이어야만 힘들고 어려워도 극복할 수 있다. 상사에게 퇴짜만 맞는다면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일을 만들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보면 어떨까. 그래도 안 된다 싶으면 이직하거나 창업하면 된다고 생각하라.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그 정도 각오는 필요하다.”

자퇴한 뒤 무엇을 했나.
“그 후 1년간 스페인, 이탈리아, 모로코, 프랑스 등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첫날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리타 공항에서 마드리드까지 직항으로 갔다. 스페인어는 전혀 몰랐다. 젊었기 때문에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집을 떠나 40시간 만에 겨우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론다에 도착했다. 존경하는 소설가 헤밍웨이가 사랑한 땅, 절벽 위의 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그곳까지 가는 데 정말 고생했다. 도착 후에도 불안하고 힘들고 외로웠다. 배도 많이 고팠다. 작은 빵집이 앞에 있었는데 빵이 나오고 있었다. 작은 빵을 하나 사 한입 먹었는데 진심으로 눈물이 났다. 그때 느낀 것이 있다. 빵은 먹어버리면 없어지지만, 빵에 담겨진 에너지는 내게로 옮겨지는 것이라고. 지금처럼 편리한 현대사회에서는 느끼기 힘든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1년 뒤 자신감을 얻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소설가가 되려고 했다. 문학상을 받는 10대 소년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록스타가 되는 게 더 멋지지 않나 생각했다. 기타를 사고 가장 좋아하는 록밴드 노래를 연습했다. 만든 노래를 녹음해 기획사에 보냈더니 계약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천재는 다르구나’라고 처음엔 생각했지만 그렇게 10년 고생이 시작됐다. 쭉 고생했다. 내 안의 오만함과 무지함, 무례함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음악 인생은 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음악을 접고 무엇을 했나.
“그때쯤 내 음악 팬 가운데 한 명의 집에 놀러가게 됐다. 그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려고 노력 중이었는데, 그의 집에서 ‘프레임(Frame)’이라는 네덜란드 잡지를 봤다. 잡지를 보고 ‘인테리어도 정말 창조적이고 멋진 일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게 내가 디자인 회사를 세우게 된 계기다(발뮤다의 처음 이름은 ‘발뮤다 디자인’이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꿈꾸던 그는 디자이너가 되지 못하고 내 아내가 됐다. 아내의 꿈까지 이어받아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밴드를 그만두고 파친코에서 일하면서 다음 꿈을 찾고 있었다. 물건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음악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아키하바라에 가서 전자부품에 대해 물어보고, 생활도구 파는 프랜차이즈 매장 도큐핸즈에 가서 매장에 전시된 스푼을 들고 ‘이건 뭘로 만들어졌나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라며 집요하게 질문했다. 그리고 전화번호부에서 공장을 찾아 ‘이런 물건을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전화했다. 하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작전을 바꿨다. 직접 캐드(CAD)를 배워 도면을 가지고 공장에 찾아갔다. 점차 사람들이 마음을 열었고, 어느 날 내 도면대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공장에서는 ‘돈이 없으면 만들어줄 수 없다. 하지만 기계를 빌려줄 테니 직접 만들어 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장에서 제조기술 기초를 배웠다. 1년 반쯤 걸렸다. 그 후 ‘이건 좀 팔리겠다’ 싶은 제품을 만들었고 회사까지 차리게 됐다.”

창업하고 큰 위기를 겪었는데.
“창업 7년째 되던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가 터졌다. 한 달 동안 주문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엔 팩스가 고장났나 싶었다. 직원은 나를 포함해 3명, 연매출은 4500만엔이었는데 그해 적자가 1400만엔, 빚이 3000만엔이었다. 씁쓸했다. ‘음악도 성공하지 못했고 사업도 안되는구나. 나란 사람은 성공과는 거리가 멀구나’라고 생각했다. 항상 다니던 교차로가 있는데 거기에 패밀리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레스토랑 안에서 맛있게 식사하는 사람들을 보니 화가 났다. ‘우리는 도산 직전인데, 세계적으로 이렇게 힘든데, 이 집은 왜 이렇게 잘되는 걸까?’ 하지만 순간 깨달았다. 계속 고민했던 질문 ‘이렇게 멋진데, 왜 우리 제품이 안 팔리는 걸까. 비싸서 그런가? 멋진 제품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에 대한 답을 얻었다.”

답이 뭐였나.
“우리 제품이 별로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운했지만 사실이었다. 3~6개월 안에 도산할 것이 명확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라도 만들어보고 죽자’라고 생각했다. 선풍기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기존 선풍기 바람을 쐬다 보면 피곤했다. 그래서 이중 구조의 ‘그린팬’ 기술을 개발해냈다. 이것이 3개월 만에 재기하는 계기가 됐다. 6000만엔만 있으면 제작·판매가 가능했지만 연간 매출보다 많은 액수였다. 도산 직전이었기 때문에 자금 조달이 어려웠다. 여러 은행을 다니며 요청했다. 한 은행 지점장은 나를 비웃기까지 했다. 궁지에 몰렸던 나는 시제품 선풍기 한 대를 400만엔을 들여 만들었다. 그것을 들고 판매점을 다니며 ‘내년(2010년) 5월 발매할 제품’이라고 소개했다. 예약을 미리 받았는데, 2000대 정도 됐다. 제품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던 공장에 가서 주문서를 보여주고 6000만엔만 빌려달라고 했다. 사장님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음, 뭐 어쩔 수 없지. 한번 해볼까?’라고 말했다. 2010년 첫해 목표는 6000대였는데 실제 판매량은 1만2000대였다. 이듬해에는 2만5000대, 3년째는 5만 대를 판매했다. 연 4500만엔의 회사 매출이 2010년 2억5000만엔, 이듬해엔 8억5000만엔으로 뛰었다. 작년엔 90억엔이 됐다.”

고객은 ‘물건’이 아닌 ‘체험’을 사는 것인가.
“세상에는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크기·속도·무게·거리·성능은 수치로 표현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수치로 나타낼 수 없다. 첫사랑의 느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아이들에 대한 애정, 아내에 대한 감사 등이다. 디자인이라는 건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것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내가 하고 있는 제조업에는 원가도 있고, 공장 라인도 있고, 설계도도 있고, 여기저기 수치투성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구매하는 것은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발뮤다 본사 1층 로비 사진 최원석 에디터

창업하기 전엔 록뮤지션이었는데.
“음악에 대한 꿈을 접고 ‘다음에 뭘 할까’라고 생각했을 때 애플, 파타고니아, 버진이라는 세 회사에 눈길이 갔다. 애플에는 스티브 잡스, 파타고니아에는 이본 취나드, 버진에는 리처드 브랜슨이라는 창업자가 있다. 그들이 일하는 방식이 록밴드의 방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록밴드는 곡을 만들 때 시장조사를 하지 않는다. 네 명이 모여서 함께 생각해 나오는 것을 당당하게 곡으로 만들고 연주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할 뿐이다. 세 회사는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상품이나 서비스로 만들고 그것을 필사적으로 모두에게 전달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발뮤다도 시장조사를 하지 않나.
“발뮤다는 다른 사람들 의견에 따라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책임 아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 제품으로 개발한다. 왜냐하면 우리 회사는 록밴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나.
“경영자는 2년, 3년, 5년 후를 계속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품·서비스 로드맵을 항상 펜으로 노트에 적는다.”

진짜 펜으로, 진짜 노트에만 적나?
“그렇다.”

왜 PC를 사용하지 않는가?
“PC를 사용하게 되면 그 세계에 매여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어떤 도구도 그 도구가 제공하는 편리함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렵다. 창의성은 틀을 벗어나는 것에 있다. 축구 시합을 할 때 정말로 거기서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내고 싶다면 선수로서 킬러 패스(killer pass·골로 이어지는 결정적 패스)를 하는 데 머무를 게 아니라 그 팀 오너가 돼야 한다.”

최종 디자인을 본인이 모두 결정하나.
“결국 어떤 디자인을 선택할 것인가는 최고경영자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영자가 최종 디자인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모든 회사에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디자인의 좋고 나쁨에 따라 매출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디자인을 결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경영자는 자신이 진짜로 회사의 최종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경영자는 디자인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에 대해서, 맛있음에 대해서, 기분 좋음에 대해서, 감각을 갈고닦아 예민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젊은이들에게 해줄 조언이 있을까.
“‘자신을 강하게 믿고 내 꿈은 꼭 실현될 것이라고 굳게 마음먹으라’고 말하고 싶다. 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어떤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더라도 아직 떠올리지 못한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나는 그것을 강력하게 믿으면서 비즈니스를 해왔다. 예전에 라이트 형제가 낮은 언덕에서 기묘한 기계를 사용해 여러 차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을 조롱했을 것이다. 오늘은 60년 뒤 사람들에게는 60년 전이다. 60년 뒤에는 지금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많이 실현돼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새로 만들 기회를 갖고 있는 것이다.”

최원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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