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만 해도 일본에서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모두 만화잡지를 보고 있었던 거 아십니까?”

4월 16일 일본 도쿄의 카카오재팬 본사에서 김재용 카카오재팬 대표를 만났다. 카카오재팬의 웹툰 플랫폼 ‘픽코마(piccoma)’ 출시 2주년 기념 행사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카카오재팬 본사는 도쿄 롯폰기에 있었는데, 하네다공항에서 지하철로 40분 정도 걸렸다. 지하철을 타고 왔다고 하자 김 대표가 대번에 20년 전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잘 모르겠다고 하자 김 대표는 “일본에서는 다 본 만화잡지를 지하철 선반에 올려두는 문화가 있었다”며 “만화잡지를 일종의 공공재처럼 쓴 건데, 지금은 지하철 어디서도 만화잡지를 찾아볼 수가 없다”고 했다. 만화잡지가 사라진 자리를 꿰찬 게 스마트폰이다. 일본인들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게임하는 데 여념이 없다. 바로 여기서 김 대표는 웹툰의 가능성을 봤다고 했다.


일본인이 지하철에서 웹툰을 보는 게 아니라 게임을 하는데, 무슨 가능성을 본 건가.
“보통 웹툰 플랫폼의 독자로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출판만화를 보는 독자를 웹툰이 뺏어오는 것밖에 안 된다. 출판사들이 좋아할 리도 없고, 전체 만화 시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한 건 플러스 알파였다. 만화를 즐겨 보지 않는 라이트 독자층을 공략하기로 했는데, 바로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본에서는 모바일 게임 하나가 올리는 연간 매출이 2조원에 달하는데, 웹툰 연간 매출을 다 합쳐도 그 정도가 겨우 될까 싶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균형이 무너졌는데, 우리는 웹툰을 통해 이 균형을 다시 잡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가능성 있는 시장을 일본의 출판사나 잡지사들은 왜 못 본 걸까.
“일본 출판사들이 4~5년 전부터 웹툰을 볼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앱)을 출시했지만 성과가 많지 않았다. 일본 출판사들은 덩치가 워낙 크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곳도 있고, 연매출이 1조원, 2조원을 넘는 곳도 있다. 이렇게 덩치가 큰 기업들은 쉽게 체질을 바꾸지 못한다.

정보기술(IT) 산업에서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일본의 모바일 게임 시장이 대표적인 예다. 피처폰 시절에 일본에서는 그리와 모바게라는 게임 플랫폼이 많은 매출을 냈다. 두 회사가 1년에 TV 광고로 쓰는 돈만 2000억원에 달했다. 당시 나는 NHN재팬에서 일하고 있었다. NHN재팬도 일본 게임 시장을 공략했지만 연매출은 겨우 1300억원 정도였다. 피처폰 시장에서는 그리·모바게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보고, 우리는 막 시장에 나온 스마트폰 플랫폼에 올인했다. 반면 그리·모바게는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오는 데 실패했다. 만화 시장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만화의 상징 같은 존재인 ‘주간 소년점프’를 웹툰 시장에서 누른 비결은.
“비즈니스 모델이 주효했다. 픽코마는 ‘기다리면 무료’라는 독특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다. 기다리면 무료는 만화책 한 권을 여러 편으로 나눈 뒤에 한 편을 무료로 보고 일정 시간을 기다려야 다음 편을 무료로 볼 수 있는 방식이다. 기다리기 싫은 사람은 요금을 지불하고 다음 편을 보면 된다. 일본의 다른 만화 앱들은 웹툰 한 편, 한 편에 가격을 매기는 방식이었는데, 우리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했다.

처음에는 출판사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독자들이 정말 마지막까지 기다려서 만화책 전체를 무료로 보면 어떻게 하느냐는 반응이었다. 우리는 기다리면 무료가 이미 게임 업계에서 10년 넘게 입증된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설득했다. 기다리기 싫은 사람은 요금을 지불하면서 유료 독자가 되고, 기다려서 끝까지 보는 사람은 정기적으로 픽코마를 방문하면서 충성도 높은 독자가 된다. 어느 쪽이든 괜찮다고 봤다. 결국에는 요금을 내는 유료 독자가 많아지면서 픽코마의 매출이 빠르게 증가했다.”

픽코마의 올해 1분기 매출액은 8억2400만엔으로 전년 동기 대비 446% 증가했다. 라인망가가 꾸준히 웹툰 플랫폼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와중에 픽코마는 고속 성장을 거듭해 지난해 7월 이후 2위 자리까지 치고 올라왔다. 픽코마의 ‘기다리면 무료’가 성과를 입증하자 라인망가를 비롯해 다른 웹툰 앱도 속속 비슷한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 기업의 무덤으로 유명한데,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었나.
“라인은 일본에서 자국 기업으로 인식되지만, 카카오재팬이나 픽코마는 한국 기업이고 한국 서비스다(라인은 한국의 네이버가 지분 100%를 갖고 있지만, 본사가 일본에 있고 대표도 일본인이고 사업처도 일본 중심이다). 당장 카카오재팬 대표인 나부터가 한국 사람이다. 이걸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서비스만큼은 철저하게 현지화했다. 초반에는 일본 출판사에서 만화 한 편 가져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카카오페이지나 다음웹툰에 연재되는 한국 웹툰을 가져오면 되지 않느냐는 말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작품의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한국 웹툰에 의지하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본 출판사의 문을 열심히 두드렸다. 거래를 터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100번은 만나야 신뢰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웹툰 플랫폼은 결국 얼마나 좋은 콘텐츠를 확보하느냐의 싸움이다. 서비스를 시작한 2년 전에는 단 두 곳의 출판사에서만 만화를 제공했다. 그러다 1년 뒤에 20개 출판사로 늘었고, 지금은 80여 개 출판사와 함께한다.”


픽코마(왼쪽)는 다른 웹툰 플랫폼과 달리 광고를 싣지 않는다. / 픽코마 캡처

픽코마에는 광고가 없다. 광고 매출 없이 플랫폼을 운영하는 게 가능한가.
“픽코마 하루 접속자가 120만 명에 달한다. 지금 접속자 수로만 따져도 광고를 넣으면 한 달에 10억원, 1년에 120억원의 매출을 낼 수 있다. 하지만 물건이 아니라 광고를 팔면 장기적으로 그 산업은 무너진다고 본다. 독자들이 광고를 통해 웹툰을 무료로 보는 데 익숙해지면, 단기적으로는 돈을 벌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산업이 무너진다. 또 지금 웹툰 앱에 실리는 광고들을 보면 게임 광고가 많다. 이건 웹툰을 보러 온 사람에게 게임하러 가라고 부추기는 꼴이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을 웹툰으로 끌어와도 모자랄 판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넷플릭스 같은 정액제 방식을 도입하지 않는 이유는.
“정액제는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서 콘텐츠를 싸게 파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나는 콘텐츠 하나하나를 공들여서 잘 팔고 싶다. 일본 유명 출판사인 고단샤가 처음엔 픽코마에 3~4개 작품만 공급하다가 성과를 확인하고는 100개 작품을 공급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100개 작품을 한꺼번에 받지 않고 잘할 수 있는 작품만 하나씩 늘려나가겠다고 했다. 나는 웹툰 한 작품, 한 작품의 비즈니스 모델이 다 달라야 한다고 본다. 작품의 성격에 따라 어떤 작품은 기다리면 무료, 어떤 작품은 이번만 무료, 어떤 작품은 전면 유료 같은 다른 비즈니스 모델을 적용해야 한다.”

다음 목표는.
“올여름에 픽코마TV를 론칭한다. 픽코마의 인기 웹툰을 영상으로 만들어서 픽코마TV에 공급하고, 반대로 픽코마TV에서 인기가 많은 영상은 웹툰으로 만들어서 픽코마에 연재하는 방식을 구상하고 있다.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같은 동영상을 웹툰과 함께 묶어서 하나의 순환 생태계로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일본에서는 웹툰과 동영상 시장 모두 과도기이기 때문에 이 시장에서 일단 제대로 자리잡으려고 한다.

단기적으로는 올해 안에 일본 웹툰 앱 가운데 1위를 차지하는 게 목표다. 라인망가보다 작품 수가 훨씬 적은데도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 올해 안에 넘어설 수 있다.”

▒ 김재용
경희대 경영학, NHN재팬 크리에이티브 센터장, 카카오재팬 대표

이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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