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맨이 생산해 판매하는 수건과 목욕가운. / 핫맨

중견기업은 일본 경제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역사를 갖고 지역 경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독특한 기술력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한 기업도 있다. 또 벤처기업으로 출발해 높은 성장세를 보여 대기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진 기업도 있다.

일본엔 중견기업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는 없다. ‘중소기업기본법’에서 규정한 정의에 따르면 중소기업(제조업 기준)은 자본금 3억엔 이하 또는 종업원 300명 이하의 기업을 말한다. 그중 소규모 기업은 종업원 20명 이하인 경우가 해당된다. 일본 중소기업청은 중소기업 중 소규모 기업을 제외한 기업을 ‘중규모 기업’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중견기업’과 비슷한 개념이다.

중소기업청이 발간한 ‘2017년판 중소기업백서’에 따르면 중규모 기업은 기업 수는 일본 전체 기업의 14.7%(55만7000개), 종업원 수 46.6%(2234만 명), 부가가치액 38.5%(79조9000억엔)를 차지한다. 소규모 기업의 고용 규모가 1127만 명인 것과 비교하면 중규모 기업은 고용 기여도가 매우 크다.

지역 경제에 이바지하는 중견기업의 대표 사례로 ‘핫맨(Hotman)’이 있다. 메이지유신이 일어난 1868년 도쿄 근교 직물산지인 오메(靑梅)에서 창업한 수건 회사다. 올해로 창립 150주년을 맞았다. 수건과 목욕가운 등을 만들어 판매한다. 종업원은 405명이다.

섬유 산업은 인건비가 저렴한 신흥국에서 생산하는 편이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유리하다. 일본 기업 중에서도 해외로 생산거점을 이전한 기업이 많았다. 하지만 핫맨은 일본 내에서 생산하고 백화점 등에 있는 직영점에서 판매한다는 원칙을 100년 넘게 지켜오고 있다. 고품질의 제품을 만들고 직접 고객과 접점을 갖고 판매한다면 고객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일본 내 생산을 유지했다.

인건비 등 높은 생산비용을 극복하기 위해 핫맨은 수건의 재료와 가공 공법을 연구했다. 제품을 차별화하려면 공법과 일하는 방식이 다른 회사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 핫맨은 품질 좋은 소재를 활용해 섬유의 밀도가 높은 수건을 개발했다. 또 지하 100m에서 퍼 올린 지하수로 몇 시간의 세정 과정을 거쳐 흡수성이 매우 높은 수건을 만들었다.

핫맨이 만든 ‘고(高)흡수성 수건’으로는 ‘1초 수건’이 유명하다. 가로·세로 1㎝ 크기로 자른 수건 조각을 물에 떨어트리면 다른 회사의 수건은 물 표면에 떠 있지만, 핫맨의 수건은 1초 안에 물을 흡수해 무거워져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수건의 품질이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1초 수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핫맨은 이 수건을 사용하면 생활이 쾌적해진다고 홍보한다. 젖은 머리카락은 마찰에 약해지기 쉬운데, 머리를 감은 뒤 1초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면 건강한 머리카락을 유지할 수 있다. 헤어드라이어로 고온의 바람을 쐬며 머리를 말릴 시간을 줄여 두피와 머릿결을 보호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1초 수건’의 가격은 놀라울 정도다. 한 장에 4104엔(약 4만1000원)에 달한다. 베트남에서 생산한 일반 수건은 일본 온라인 쇼핑몰 ‘라쿠텐’에서 10장에 2330엔이면 살 수 있다. 다나카 다케시(田中武司) 전 핫맨 사장은 2014년 산케이신문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판매되는 수건의 80%쯤이 수입품”이라면서 “뛰어난 흡수성을 가진 ‘진짜’ 수건을 만나지 못한 여성이 많다. 1~2년 쓰고 버리지 않고 애착을 갖고 오래 사용하고 싶은 사람에게 수건을 팔고 싶다”고 했다.


후쿠이제작소가 생산한 LNG 운반선용 안전밸브. / 후쿠이제작소

일본 고객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기준을 맞추느라 품질이 높아졌고, 자연스럽게 얻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에서 성공한 사례도 있다. 오사카의 후쿠이제작소(福井製作所)는 1936년에 창업한 중견기업이다. 각종 안전밸브(safety valve)를 전문 생산하는 기업이다. 직원 수는 191명이다.

‘중소기업’ 중에서 소규모 기업을 제외한 경우가 우리의 ‘중견기업’에 해당

안전밸브는 가스를 저장하는 탱크, 화학 플랜트의 배관 등에서 높은 압력이 가해지는 부분에 설치된다. 장치 내의 압력이 일정한 수준을 넘었을 때 자동으로 증기와 가스를 배출시킨다. 이렇게 압력을 낮춤으로써 장치의 폭발·파손을 막는다.

후쿠이제작소는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에 사용하는 안전밸브 시장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기업 규모는 작지만 특정한 분야에서 높은 기술적 강점을 앞세워 세계 시장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구축한 전형적인 글로벌 틈새 1등 기업(GNT·Global Niche Top)이라고 할 수 있다.

안전밸브는 대상이 되는 유체(액체·기체), 재료, 온도 등의 사양에 따라 가공 정밀도가 달라지고 수작업에 의존하는 측면이 크다. 후쿠이제작소는 안전밸브에 특화해 기술 수준이 높은 인력을 육성했다. 오랫동안 닦아온 기술력에 힘입어 초저온, 초고온, 초고압 등 온갖 특수한 환경에서도 성능을 유지할 수 있는 제품력을 확보했다. 뛰어난 품질 덕분에 후쿠이제작소는 글로벌 브랜드로서 위상을 확립했다. 또 설계, 제조, 검사의 모든 공정을 같은 곳에서 담당해 고객의 제품 사양 변경 요구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강점도 있다.


일본도 최대 고민은 경영권 승계

일본 중견기업은 인건비가 저렴해 생산 비용이 낮은 신흥국 기업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장점을 극대화하며 성장해 왔다. 특정 분야에서 기술과 제품 개발력을 집중적으로 강화하고, 틈새시장에서 압도적 지위를 구축하는 ‘틈새 1등 전략’을 추구해 왔다. 또 기존 생산거점을 연구·개발 거점으로 개편하고, 양산품은 해외 거점이나 외부 기업을 활용하는 연구·개발 주도 국제 분업 전략을 채택하기도 했다.

최근엔 인공지능(AI), 핀테크 등 새로운 산업을 개척하면서 영세 기업에서 중규모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스타트업 기업도 주목을 받는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시장에 도전하는 이들 기업 중에는 소프트뱅크나 라쿠텐처럼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기업도 나올 것으로 보인다.

중견기업의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제조업 기반 기술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을 펼친다. 1999년 3월에 ‘모노즈쿠리 기반기술진흥기본법(일명 모노즈쿠리법)’을 공포한 이후 현재까지 이 법률에 근거해 제조 기반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에 연구·개발, 기술자 연수, 특허권 관리 지도 등을 지원해 왔다.


작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모노즈쿠리·장인의 기술 엑스포’에서 한 장인이 전통 방식으로 목조 주택을 짓고 있다. / 블룸버그

일본 중견기업의 최대 고민은 경영권 승계다. 세계 최고 수준의 독자적인 기술을 가진 중견기업이라도 경영자가 고령화하고 기업을 물려받을 후계자를 찾지 못하면 폐업 위기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업자가 사망한 후 자녀들이 주식을 나눠서 상속받으면 지분이 분산돼 경영권이 흔들릴 수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2025년까지 일본 전체 기업의 60%인 245만 개 회사의 경영자가 평균 은퇴 연령인 70세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절반인 127만 개 회사가 후계자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를 방치하면 2025년까지 전체 기업의 약 30%가 후계자가 없어 폐업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2025년까지 총 65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국내총생산(GDP) 중 22조엔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지방은 사업 승계 문제가 대도시보다 심각하다.

일본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원책을 마련해 뒀다. 경영 후계자가 추정 상속인(현 상태로 상속이 개시된다고 가정할 경우 상속인이 될 사람)의 상속 포기를 가정재판소에 단독으로 신청할 수 있게 했다. 또 양도세·상속세 부담으로 경영 승계가 어려워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후계자가 고용 등을 유지할 경우 납세를 유예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지난해엔 더 강화된 대책을 내놓았다. 향후 10년간을 ‘가업 승계 정책 집중 시행 기간’으로 삼아 후계자를 찾지 못한 기업이 순조롭게 경영권을 이전하도록 돕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 방침에 따라 경영 후계자가 내야 할 상속세나 증여세 부담이 가벼워졌다.

기존 제도는 승계 과정에서 주식 이전에 따른 상속·증여세를 5년간 유예하는 것이었으나, 이제부터는 세금 자체가 감면된다. 세금 유예, 감면 혜택 대상이 되는 상속·증여 주식 수를 지분의 3분의 2로 제한했었지만, 이를 전체 주식으로 확대했다. 경영권을 물려받는 시점에 후계자의 세금 부담이 ‘제로(0)’가 되는 것도 가능해졌다. 기업인들의 불만이 많았던 ‘상속·증여 후 5년간 고용 80% 유지’ 등의 조건도 완화했다.

손덕호 기자,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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