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동대문시장의 의류 산업 자원과 한국의 뛰어난 정보기술(IT)을 잘 활용하면 국내 섬유·의류 업체의 활로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조선일보 DB
전문가들은 “동대문시장의 의류 산업 자원과 한국의 뛰어난 정보기술(IT)을 잘 활용하면 국내 섬유·의류 업체의 활로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조선일보 DB

한때 국내 수출의 일등공신이었던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의 대명사’로 추락한 가운데 섬유업체들이 앞다퉈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 고질적인 인력난 등으로 경영 환경이 악화되자 베트남, 방글라데시 등 저임금 인력이 풍부한 나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섬유업체와 종사자 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면서 국내 섬유산업의 활력은 크게 떨어진 상태다. 국내 섬유산업이 되살아날 희망은 없는 걸까.

전문가들은 아직 희망의 끈을 놓기엔 이르다고 입을 모은다. 2006년 이후 계속 상승세를 타던 국내 섬유산업 생산액은 2011년 47조원을 돌파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 등 후발국과의 경쟁 심화, 수출 감소 등으로 2016년 생산액이 40조원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아직 섬유산업에 회생의 기회가 남아있다고 말한다.

이임자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인구 증가와 베트남·인도를 비롯한 신흥시장 성장에 따라 세계 섬유 시장의 수요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며 “한국은 전통적인 섬유 소재 기술력과 섬유산업 인프라 등 미래 섬유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데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갖고 있는 만큼 지금부터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해 준비한다면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필수 요소 1│
경쟁력 확보 위한 협업

그렇다면 한국이 다시 섬유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할까. 한국 섬유산업 재도약을 위한 전략의 핵심은 돈이 되는 섬유산업에 집중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돈이 되는 섬유산업이란 중국, 인도와 같은 후발 주자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첨단 산업용 섬유, 스마트 의류 등 고부가가치 차별화 섬유를 말한다. 세계 섬유 시장 규모(수출 기준)는 2000년 1747억달러(약 196조원)에서 2016년 7263억달러(약 818조원)로 연평균 8.7%씩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을 견인한 것이 바로 산업용 섬유다. 지난해 세계 산업용 섬유 시장 규모는 1650억달러로 추정되며 전체 섬유 시장의 약 22%를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경쟁력이 낮고 성장이 어려운 업종은 과감히 정리하고 비교 우위에 설 수 있는 첨단 산업용 섬유 기술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연구·개발(R&D)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현재 한국 섬유업체가 생산하는 제품들은 부가가치가 높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내 섬유업체 대부분이 기술 개발 여력이 없는 영세업체인 탓이다. 2016년 기준 국내 섬유패션업체 4만7000여 개 중 50인 미만 업체가 98%, 10인 미만이 87%를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차세대 섬유 기술 개발을 위해선 산·학·연·관의 협력이 필요하다.

박훈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중견 이상 업체들은 고부가가치 기술 개발과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중소 업체들은 정부 출연 연구소, 전문생산기술연구소와 협력해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화학섬유 소재 기업과 의류 업체 간 협업처럼 가치사슬을 뛰어넘는 이종기업 간 협력도 필요하다. 의류업체인 일본 유니클로는 소재 전문 기업인 도레이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기능성 섬유를 개발하고 히트텍, 에어리즘과 같은 기능성 의류 제품을 내놓아 대성공했다. 


필수 요소 2│
온라인 판로 집중해야

아직 오프라인에 치우쳐 있는 섬유산업의 판로를 온라인으로 옮겨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스타일난다 등 한국에서도 온라인 패션몰을 통해 성공하는 의류 업체가 나오고 있지만 아직 대다수의 의류업과 원단업은 오프라인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온 오프라인 매장의 호황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동대문시장에 ‘밀리오레’와 ‘두타’가 문을 열었다. 브랜드 옷은 아니지만 싼값에 괜찮은 옷을 고를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하루 평균 8만여 명이 다녀갔다. 하지만 온라인 쇼핑몰, 홈쇼핑, 아울렛 등 의류 판매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동대문 쇼핑몰만의 장점이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가격 경쟁력은 온라인 쇼핑몰에 치였고, 서비스도 차별화하지 못했다. 박주영 한국유통학회장은 “브랜드 지유(GU)를 한국 시장에 출시한 패스트리테일링그룹은 한국에선 오프라인 매장 확대보다 온라인 중심 판매 전략을 펼치고 있다”며 “온라인 쇼핑이 발달한 한국에선 이 강점을 활용해 시장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지그재그, 패브릭타임 등 온라인을 활용한 의류 판매 플랫폼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지그재그는 동대문시장 의류를 취급하는 3000여 개 온라인 쇼핑몰을 한데 모아 580만 종의 의류패션 상품을 검색해 구매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독자적인 마케팅 여력이 부족한 쇼핑몰을 한데 모아 소비자 선택의 폭을 넓혔다. 월 사용자가 2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패브릭타임은 동대문시장의 원단 20만 종을 데이터베이스화해 세계 80여 개국 디자이너 2000여 명에게 원단을 수출하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디자이너의 요구에 따라 맞춤형 원단을 제시한다. 박 회장은 “이처럼 동대문시장의 의류산업 자원과 한국의 뛰어난 정보기술(IT)을 잘 활용하면 국내 섬유의류업체의 활로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수 요소 3│
인프라 개선과 인력 양성 지원

새로운 시장 발굴과 동시에 기존의 노후화된 제조 설비에 대한 투자와 인력 양성에도 지원책이 필요하다. 한국은 원사·원단·염색·봉제 등 전 산업 스트림의 제조 기반을 보유하고 있어 산업 성장 가능성이 높지만 섬유산업의 오랜 역사만큼 장기간 사용된 생산 설비의 노후화 문제가 심각하다. 장운덕 한국섬유산업연합회 차장은 “섬유업체 대부분의 설비가 노후화된 탓에 최신 직기로 직물을 생산해 원가 경쟁력을 확보한 중국, 동남아 국가와의 경쟁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인력 노후화 현상도 심각하다. 실무능력을 갖춘 인재가 부족하고, 인재가 있어도 침체된 산업이라는 인식 때문에 진출을 꺼린다. 섬유산업 관계자는 “정부의 지원책과 업계의 첨단화 노력으로 섬유산업이 다시 활성화되면 우수인력이 유입돼 산업이 성장하는 선순환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원단 생산·가공부터 봉제까지 의류 생산의 전 과정이 가능한 동대문 패션타운 인프라의 활용도를 높이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이탈리아 중북부에 산재해 있는 섬유·소재 클러스터는 패션 회사 창업의 산실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고급 소재를 생산하는 수백 년 전통의 강소기업이 몰려 있는데, 디자인 능력만 있으면 각 클러스터에서 소재를 조달하고 주변 공방을 통해 의류 제품을 제작할 수 있다. 박훈 연구위원은 “소규모 봉제공장 협동조합을 활성화시켜 규모를 키우고 기술수준 균일화 교육을 하는 노력 등을 통해 동대문 패션타운 인프라의 효율성을 개선할 수 있다”며 “인프라 정비작업을 통해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이 유입되면 동대문 패션타운의 르네상스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plus point

탄소섬유, 아라미드 등 첨단 섬유에 집중해야

백예리 기자

효성의 브라질 ‘스판덱스’ 생산공장. 사진 효성
효성의 브라질 ‘스판덱스’ 생산공장. 사진 효성

한국이 전통 섬유산업에선 원가 경쟁력을 무기로 한 중국, 동남아 국가로부터 추격당하고 있지만 일부 산업용 섬유 분야에선 몇몇 기업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세계 섬유 시장에서 고부가가치 섬유로 선전하고 있는 효성과 코오롱, 휴비스가 그 주인공이다.

효성은 산업용 섬유 ‘스판덱스’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32%)를 차지하고 있다. 연간 17만5000t의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스판덱스는 폴리우레탄계 섬유의 일종으로 신축성이 뛰어나 코르셋, 수영복 등에 쓰인다. 효성은 국내 기업 중 최초로 1990년대 초 스판덱스 개발에 성공했고, 지속적인 투자로 2010년부터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효성은 지난해 그룹의 전략 생산지인 베트남 공장의 스판덱스 생산량을 3만t가량 추가로 늘렸다.

타이어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보강재인 타이어코드도 효성의 효자 상품이다. 세계 시장 점유율은 45%로 1위다.

SK케미칼과 삼양홀딩스의 합작 법인인 휴비스는 양사의 화학·섬유 부문을 합쳐 설립한 회사다. 휴비스 역시 저융점섬유(LMF)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30%)를 기록하고 있다. LMF는 섭씨 100~200도에서 녹는 섬유로 자동차 트렁크와 천장 등 내장재, 매트리스와 소파 등 가구와 기저귀와 생리대 등 위생용품 접착제로 쓰이는 친환경 섬유다. 현재 휴비스는 100여 개국에 연간 30만t(전 세계 LMF 생산량의 40%)을 수출하고 있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철보다 강한 고강도 섬유인 ‘아라미드’ 생산에 주력하고 있다. 아라미드는 같은 무게의 강철보다 강도는 5~7배에 이르고, 섭씨 300도 이상의 고온에서도 견딜 수 있어 산업용 소재로 활용도가 높다. 2009년 미국 화학 기업 듀폰으로부터 영업비밀 사용 중지 소송을 당하면서 6년간 성장이 정체됐지만 2015년 흑자 전환에 성공하며 성장하고 있다.

자동차 경량화의 핵심인 탄소섬유도 국내 섬유 업계가 주목하는 대표적인 미래 먹거리다. 무게는 철의 25% 수준이지만, 강도는 10배 정도여서 미래 자동차의 핵심 소재로 꼽힌다. 효성은 전라북도 전주시에 공장을 설립해 2013년부터 연간 2000t의 탄소섬유를 생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선진국과 후발 국가 사이에 낀 ‘너트크래커(Nut-Cracker·한 나라가 선진국에 비해서는 기술과 품질 경쟁에서, 후발 개발도상국에 비해서는 가격 경쟁에서 밀리는 현상)’가 되지 않으려면 비교 우위에 설 수 있는 첨단 산업용 섬유 개발에 주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박훈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첨단 산업용 섬유는 원사를 활용해 제품을 만드는 단계로 갈수록 부가가치가 높아져 원자재의 10배 이상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하다”며 “부가가치와 생산성이 높은 첨단 산업용 섬유를 개발해 섬유산업의 구조를 고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섬유산업이 성장하기 위해선 탄탄한 생산력을 갖춘 국내 패션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업체들이 자체 브랜드를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OEM 업체는 주문 생산을 받는 입장으로 보다 싼 가격으로 승부해야 하기 때문에 수익을 내는데 한계가 있다. 중국의 인건비가 오르면서 비용을 줄이기 위해 동남아시아 국가로 해외 공장을 계속 이전해야 하는 점도 문제다. 부가가치가 높은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시장에 안착하면 OEM 생산을 통한 매출보다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이임자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섬유산업의 중추적인 성장 동력은 산업용 섬유와 패션의류”라며 “섬유산업이 재도약하려면 OEM 중심의 제조형 수출에서 브랜드 수출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백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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