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노가미 다카시 교토대 대학원 공학박사, 히타치 제작소 반도체사업부 근무, ‘일본전자·반도체 대붕괴의 교훈’ 저자
유노가미 다카시
교토대 대학원 공학박사, 히타치 제작소 반도체사업부 근무, ‘일본전자·반도체 대붕괴의 교훈’ 저자

2010년 일본 반도체 회사 엘피다메모리의 사카모토 유키오 최고경영자(CEO)는 “세계 D램 시장은 결국 2개 제조사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업계 1위인) 삼성전자 그리고 대만 업체들과 연합한 엘피다가 또 다른 생존자”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엘피다는 법정관리를 신청하며 파산했다.

198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을 호령했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높은 기술력을 가졌음에도 후발 업체의 추격에 맥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전자제품, 화장품, 자동차 등 각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한국 기업이 일본 반도체 산업의 몰락에서 배울 점은 무엇일까.

히타치 제작소, 엘피다메모리를 거치며 20년 넘게 반도체 미세가공 기술업에 종사한 전문가 유노가미 다카시 유노가미미세가공연구소 소장을 ‘이코노미조선’이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잘나가는 한국 기업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자만한 나머지 ‘혁신가의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일본 반도체의 몰락이 이것 때문이었다. 일본 반도체 업체가 업계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삼성전자의 부상을 몰랐던 것도 아니다. 모두 알고 있었지만, 변함없이 25년 보증을 내세워 ‘고품질’ D램을 생산했다.”

그게 왜 문제였는가.
“과잉(過剩)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반도체 업체가 만든 D램은 PC용으로는 품질이 과했다. 그 결과 더 적은 비용으로 D램을 생산하는 한국 업체들에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기업들도 ‘고성능, 고품질 제품을 만들었으니 반드시 팔리겠지’ 하는 잘못된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일본 파나소닉도 과거 품질 좋은 제품을 만들어 놓고는 신흥 시장에서 한국의 삼성과 LG에 시장 점유율을 다 빼앗겼다. 나는 이것이 ‘선진국 에고(Ego·자아)’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본다.”

기술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지 않다. 다만 최고의 기술로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도 그것을 살 사람이 없으면 산업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팔리는 상품’을 만들어 내놔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 혁신을 통해 제품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뜻인가.
“먼저, 혁신의 의미를 잘못 쓴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은 ‘혁신=기술 혁신’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게 대단히 잘못된 말이라고 본다. 내가 생각하는 혁신의 범위는 ‘기술의 업그레이드’뿐만 아니라 ‘기술력 향상과 이에 따른 시장의 폭발적 반응’까지다. 아무리 고기능·고성능·고품질의 제품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폭발적’으로 팔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혁신’이 아니다.”

기업들이 폭발적으로 팔릴 물건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제품을 팔고 싶은 시장에 직접 나가서 타깃층을 조사해야 한다. 즉, 혁신의 열쇠는 마케팅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전자가 아주 잘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30만 명에 달하는 전 직원 중 마케팅 담당이 5000명이나 된다. 이들은 세계 각지에 나가서 일한다. 예를 들어 중국 시장 담당자는 1년차 때 현지로 건너가 살면서 중국인들이 먹는 것을 먹고 중국인 친구를 사귄다. 이게 그들의 일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중국 부유층들이 선호하는 제품군과 디자인, 기능을 조사하고 이들이 살 만한 적당한 가격대를 선정해 한국 본사에 보고한다. 본사에서는 이들이 보내온 보고서를 바탕으로 경영 전략을 짠다.”

그래도 ‘팔리는 상품’을 만들려면 ‘고성능’도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인도의 저소득층에 대당 10만엔(약 100만원)에 달하는 아이폰을 팔려고 해도 팔릴 리가 없지 않은가. 반대로 미국 부유층에 통화 기능밖에 없는 휴대전화를 팔려고 한다면 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지역, 어떤 소득층에 어떤 제품이 팔릴지는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

한국 기업들도 잘못하면 과거 샤프·도시바의 전철을 밟게 되지는 않을까.
“그렇지 않다. 특히 다른 기업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삼성전자가 이들의 전철을 밟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올해 삼성전자는 60조원대라는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을 거둘 것으로 전망되지 않나. 특히 반도체 산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소니는 한국에서 ‘부활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옆 집 잔디가 파랗게 보이는 법이다. 소니는 21세기 들어 어떤 ‘혁신’도 일으키지 못했다.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사랑했다는 소니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전문 분야인 반도체만 놓고 말하겠다. 소니는 매출 기준으로 화상(畵像)용 반도체 ‘CMOS 이미지센서’ 점유율 50%를 넘겨 세계 1위를 차지했지만, 판매량 기준으로는 20%에 불과하다. 앞으로 소니가 혁신을 통해 폭발적인 시장 수요를 창출할지는 두고봐야 한다. 일단 현재 소니그룹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곳은 은행·생명·증권 등 금융 부문뿐이다.”


plus point

신혼집 新가전 3인방…LG전자의 ‘혁신’

LG전자는 건조기·스타일러·프라엘로 대표되는 신가전 분야를 새로 개척했다. 사진 LG전자
LG전자는 건조기·스타일러·프라엘로 대표되는 신가전 분야를 새로 개척했다. 사진 LG전자

의류 건조기, 스타일러, 프라엘. 최근 몇 년 사이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의 신혼집 필수 가전 제품 리스트에 새로 진입한 품목이다. LG전자는 이 세 가지로 대표되는 신가전 시장을 빠르게 개척해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노가미 소장의 말대로 ‘혁신’을 통해 신시장을 개척한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스타일러는 세상에 없던 개념의 전자 제품 시장을 개척했다. 매일 빨기 어려운 교복, 슈트에 밴 냄새와 세균·미세먼지·구김 등을 스팀과 온도 관리, 기류 제어 기술 등을 활용해 없애는 ‘의류 관리기’다. 조성진 부회장의 부인이 장거리 출장을 떠나는 남편에게 “수증기로 가득 찬 화장실에 구겨진 옷을 걸어놓으라”고 말한 것이 개발의 단초가 됐다.

2011년 처음 내놓을 때까지 연구·개발(R&D)에 소요된 기간만 9년, 관련 특허는 530여 개에 달한다. 여기에 초미세먼지 등 최근 몇 년 사이 심각해진 환경 문제도 스타일러 시장 확대에 영향을 미쳤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15만 대 수준이던 시장 규모가 올해 30만 대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등 외국의 가정집에서나 쓰이던 빨래 건조기가 한국에 뿌리 내린 것도 LG전자의 공이 크다. 가스로 움직이던 기존 건조기 작동 방식에서 나아가 전기 건조기를 개발, 콘센트만 연결하면 배관 걱정 없이 집 안 어디에나 둘 수 있게 만든 것이다. 2016년 10만 대 수준이었던 건조기 시장은 불과 2년 만인 올해 100만 대를 돌파했다.

LG는 프라엘(PraL.)로 미용 틈새 시장도 발 빠르게 장악했다. LED 파장을 이용해 안면 피부 톤과 탄력 개선에 도움을 주는 제품이다. 올해 월평균 판매량이 지난해 하반기 출시 당시보다 약 7배 이상 증가했고, 최근엔 홍콩과 중국에도 진출했다.

송현 기자, 이정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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