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현 성균관대 공학박사, 현대전자 (현 SK하이닉스) 반도체연구소 연구원, 카이스트 나노종합기술원 연구원, 한국반도체연구조합 연구개발지원본부장 / 사진 정해용 기자
안기현
성균관대 공학박사, 현대전자 (현 SK하이닉스) 반도체연구소 연구원, 카이스트 나노종합기술원 연구원, 한국반도체연구조합 연구개발지원본부장 / 사진 정해용 기자

국내 기업들이 반도체 산업에 주력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당시 반도체 분야 세계 최강이었던 일본 기업들과 경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1983년에는 메모리 반도체(데이터를 기억·저장하는 반도체)인 64K D램(8000자 정도의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메모리 반도체)을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발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현재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60%(삼성전자 40%, SK하이닉스 20%)를 국내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데이터를 받아들여 연산처리하고 판단하는 비메모리 반도체의 경우에는 세계 시장 점유율이 3.4%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1990년대 초반부터 현대전자와 LG반도체(현재 두 회사 모두 SK하이닉스에 합병), 삼성전자 등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연구소를 만들어 비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초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국내 기업들이 맥을 못 추는 이유는 무엇일까. 2월 12일 경기도 판교 사무실에서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를 만나 비메모리 반도체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조건을 들어봤다.

안 상무는 대학에서 반도체학을 전공한 후 1994년 현대전자 반도체연구소, 카이스트 나노종합기술원에서 비메모리 반도체를 연구했다. 그는 “메모리 반도체는 당장 팔지 않아도 나중에 시장 상황에 따라 판매가 가능하지만 비메모리 반도체는 당장 최고의 성능을 보여주지 않으면 버려야 하는 특성이 있다”며 “1등이 아닌 비메모리 반도체는 의미가 없어진다”고 설명했다. 반도체를 구매하는 고객사들에 최고의 기능을 제시하는 비메모리 반도체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 상무는 반도체를 음식에 비유하면서 “메모리 반도체가 냉장고에 보관했다 나중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인 반면 비메모리 반도체는 수족관에 살아있을 때까지만 먹을 수 있는 활어”라고 했다.

또 D램과 낸드플래시, 두 가지밖에 없는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기능별로 다양한 종류가 있는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는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혼자 모든 기능을 개발할 수 없기 때문에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이 서로 기술적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국내 비메모리 반도체 연구는 언제부터인가.
“1990년대 초반부터다. 1994년에 현대전자, 삼성전자, LG반도체가 비메모리 반도체 연구소를 열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는 이미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성공을 거뒀던 시기다. 1992년에 4MB(1MB는 100만바이트의 정보량을 의미) D램을 개발했고 1994년에는 16MB D램, 1996년에는 64MB D램을 개발해 우리나라가 메모리 반도체 글로벌 1등 국가가 됐다. 상당히 자신감이 붙은 시기였다. 결국 우리는 비메모리 반도체를 30년 가까이 연구했지만 과거의 연구 수준을 유지해온 정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유지라고 할 것도 없긴 하다.”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 기업이 고전하는 이유는 뭔가.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는 종류와 기능이 굉장히 다양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원하는 기능을 창의적으로 제시해야 하는데 한국 기업들이 이런 것을 잘 못 하는 것 같다. 메모리 반도체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단순한 기능이고 크게 D램과 낸드플래시 두 가지이므로 정해진 것을 제조만 하면 된다. 새로운 제품을 내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것을 어떻게 싸게 잘 만드냐의 문제다. 하지만 비메모리 반도체는 세상에 정해진 것이 없다. 기능과 용도가 다 다르기 때문에 반도체를 설계하면서 새로운 기능을 반도체 회사가 제안해야 한다. 이런 창의성이 부족하다.”

기능과 용도가 다 다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스마트폰을 예로 들어보자. 삼성 갤럭시S8폰에 들어가는 비메모리 반도체는 갤럭시S8폰에 들어가는 용도로만 팔 수 있다는 얘기다. 기능이 더 좋아진 갤럭시S9폰은 더 좋은 기능으로 업그레이드된 비메모리 반도체가 들어간다. 결국 갤럭시S8폰을 위해 만든 비메모리 반도체는 갤럭시S9폰이 나오면 쓸 수 없고 버려야 한다. D램은 조금 사양이 낮은 반도체라도 새로 나오는 제품에 낮은 가격으로 탑재할 수 있지만 비메모리 반도체는 아예 탑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매번 가장 최신의 기능을 갖춘 비메모리 반도체만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1등이 아닌 이상 2, 3, 4등은 존재 가치가 없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메모리 반도체는 냉장고에 보관해서 나중에라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하지만 비메모리 반도체는 활어다. 수족관에서 죽을 때까지 안 팔리면 버려야 한다. 비즈니스의 영역이 전혀 다르다.”

다양한 기능의 비메모리 반도체들을 어떻게 개발해야 하나.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기술교류가 필요하다. 아무리 대기업이라고 해도 다양한 종류의 비메모리 반도체를 다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소벤처기업에서 개발한 비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제휴 등의 방법으로 대기업이 잘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돼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국내 벤처기업들과 대기업들이 협업할 수 있는 기술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해외 기업들의 기술을 받아들여도 되지만 더 좋은 것은 국내 벤처기업들과 대기업이 힘을 합치는 것이다. 미국, 유럽, 대만에서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대기업이 못하는 비메모리 기술 개발을 벤처기업이 할 수 있나.
“새로운 것에 대한 창출은 작은 회사일수록 잘한다. 대기업은 대기업 자체의 문화와 기업환경 때문에 새로운 것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새로운 기능의 비메모리 반도체를 만들려는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인력을 투입하고 자금을 투자하는 결정을 해야 하는데 대기업은 의사결정을 하는 데만도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린다. 또 조직이 크다 보니 조직원들이 새로운 비메모리 반도체 기술 개발에 강하게 도전하지도 않는다. 절박함이 없는 것이다. 반도체를 비롯해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창출해야지 (대기업의 테두리) 안에서 따뜻하게 창출할 수는 없다. 신기술을 갖고 생존을 걸고 창출하는 벤처기업이 대기업보다 뛰어난 비메모리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이유다.”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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