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소셜벤처 ‘걸스로봇’ 대표, 한국SF협회 상임이사, ‘제주과학문화공간 별곶’ 대표,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이사 / 사진 김흥구 객원기자
이진주
소셜벤처 ‘걸스로봇’ 대표, 한국SF협회 상임이사, ‘제주과학문화공간 별곶’ 대표,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이사 / 사진 김흥구 객원기자

지난해 서울 종로구 과학책방 ‘갈다’에는 독서광들이 모였다. 이들은 매회 책 3~4편을 읽고 토론했다. 책 장르는 정해져 있었다. SF 소설이다. 특히 젠더 문제를 다룬 SF 소설을 읽었다. 이들은 한국SF협회와 소셜벤처 ‘걸스로봇’이 공동 기획하고 진행하는 SF모임 ‘페미숲갈다’이다. 이 모임은 그 해 겨울과 올 봄, 전주와 제주로 확장됐다.

SF와 여성의 역사는 관련이 깊다. ‘로보캅’ ‘터미네이터’ ‘매트릭스’와 같은 SF 영화를 떠올리면 주먹 다짐을 하는 남성상이 떠오른다. 하지만 SF 소설의 초석을 마련한 ‘프랑켄슈타인(1818)’의 저자는 ‘메리 셸리’로 여성이다. 현재 국내 SF 소설 작가의 주류도 여성이다.

‘페미숲갈다’를 기획한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를 만나 SF와 여성이 관련이 깊은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이공계 분야에서 소외받는 여성과 성소수자를 지원하는 소셜벤처 ‘걸스로봇’의 대표이자 한국SF협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SF를 읽는 이유가 무엇인가.
“SF는 인간계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안을 제시한다.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고, 새롭고 대안적인 세계를 상상하고, 이 세계 안에서 그런 상상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하고 고안하도록 하는 불온한 사고(思考)실험이다. ‘더 이상 여성이 생리하지 않는다면(코니 윌리스, ‘여왕마저도’)’ ‘남성이 출산을 경험한다면(옥타비아 버틀러, ‘블러드 차일드’)’ ‘아예 지구상에서 여성이 소멸된다면(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체체파리의 비법’)’ ‘남성과 여성의 경계가 없는 세계라면(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같은 가정을 하고 그 가정이 바꿀 세상의 풍경을 그려보는 것이다. SF는 현실에서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어떤 지경을 과학기술과 문학의 힘을 빌려 극복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 현실의 모순을 자각하고 마침내 율도국을 세움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사고실험과 현실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1960년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라는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담당하는 한 영원히 이류 시민에 머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기술의 발달로 임신과 출산을 인공자궁과 같은 기계에 외주를 준다면, 비로소 남성과 동등하게 일류 시민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실제 SF 속에서는 상상으로나마 이 기술들이 제시되곤 했다.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디스토피아적인 대리출산의 세계를 상상했지만, 페미니스트에게는 어쩌면 여성의 선택지가 늘어나는 유토피아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상상은 현실에서 상당히 진척됐다. 2017년 봄 필라델피아 어린이병원에서 조산된 새끼 양을 인공 양수를 채운 비닐 자궁에서 잘 키워내 분만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실험을 진행한 어린이병원은 향후 3년 내 사람의 조산아에게도 적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현재 실험 중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연구팀도 같은 해 쥐의 자궁을 만들면서 임신 초기 단계를 모방하고 재현하는 인공자궁 실험에 성공했다.”

이런 대안적인 상상의 배경이 무엇인가.
“대학 친구가 ‘워킹맘’으로 고군분투하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당시 나도 두 번째 출산 후 경력단절을 겪었다. 나와 친구가 경험한 실패가 오로지 우리의 무능이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임신과 출산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여성들이 오죽하면 이런 상상까지 하게 됐는지 주목하고 싶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데 여성 자신은 정작 소외돼 있다. 정확히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는지 전혀 모르고, 훈련돼 있지도 않다. 여성의 몸과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다면적이고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개인적인 건강과 사회적인 권리에 대해 충분히 보장받는 사회를 원한다. 선택할 권리와 선택하지 않을 권리를 동등하게 인정하고,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존중한다면, 굳이 이런 상상까지 필요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SF가 추구하는 미래사회 인간성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미국 페미니스트 도나 해러웨이는 ‘우리는 모두 사이보그들이다’라고 말한다. 사이보그는 인간과 기계가 조합되어 있다. 조각조각 기워지고, 이것저것 합쳐진, 단일하지 않은 존재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해서 기존의 성별, 젠더, 계급 한 가지로는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안에도 ‘남성성’과 ‘여성성’이라 불리는 성질들이 존재한다. 거의 모든 운동 종목을 좋아하고, 논쟁에서 이기고 싶어하고, 리더십 있는 성격이다. 극단적인 ‘여성성’의 획득이 중요한 생존 법칙의 하나로 여겨지는 사춘기 정글의 한복판에서도 살아남았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평등해진 미래 시대를 바란다.”

미래사회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길 바라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올란도’에 나오는 주인공 ‘올란도’가 되고 싶다. 수백 년을 거듭해 살면서 17세기에는 미소년으로, 18세기에는 여성으로 변신하고, 20세기에는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주부로 산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양성구유 이래 근대적 의미에서 젠더플루이드를 그려낸 본격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과학은 이미 성별이라는 것이 호르몬의 배합 같은 스펙트럼이라는 걸 밝혀냈다. 만약 SF의 세계처럼 인간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소중하고 가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인간의 마지막 경계인 젠더를 넘나들며 모험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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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기자, 이정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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