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미·북 정상회담 하루 전인 2월 26일 저녁에 도착한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는 이전까지 사흘가량 머물던 경제 중심지 호찌민과 너무 달랐다.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호찌민에서는 아침부터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에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전형적인 동남아 분위기였다. 그러나 북쪽으로 1200㎞(직선거리) 넘게 떨어진 하노이는 스산한 날씨에 추적추적 비까지 내렸다.

베트남은 중국만큼 큰 나라는 아니지만, 남북으로 1600㎞ 넘게 뻗어 있어 지역마다 기후와 문화가 매우 다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베트남에서 만난 2월 27일 아침과 저녁, 회담 장소와 가까운 하노이 구시가지 곳곳에는 공안(경찰) 병력이 배치돼 경계가 강화되면서 교통 혼잡이 빚어졌다. 그래도 불평하거나 짜증 내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상회담 개최에 따른 경제 효과에 대한 기대도 있었겠지만, 베트남 사람의 기질과도 관련 있어 보였다. ‘오토바이 천국’인 베트남에서 일주일 동안 택시로 호찌민과 하노이 곳곳을 누비고 다녔지만, 고성이 오가는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법무법인 지평의 유동호 하노이 사무소장은 “6년 동안 베트남에 살면서 베트남 사람이 언성을 높이는 걸 딱 한 번 봤다”고 말했다.

베트남 사람은 자존심 강하고 느긋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회담 결렬 이후에도 분위기 변화를 체감하긴 어려웠다.

사실 베트남은 급할 게 없다. 7%대(지난해 7.08%) 경제 성장률과 1억 명에 이르는 인구, 평균연령 30세에 불과한 젊은 인력, 친기업적인 정부 정책에 이끌려 해외 투자가 베트남 시장에 밀물처럼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베트남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서 투자처로서 매력이 커졌다. 미국이 베트남을 제2차 미·북 정상회담 개최지로 결정한 것에는 중국과 1450㎞에 이르는 국경(중국과 한반도는 1360㎞)을 공유하고 있는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다.

급한 건 우리나라다. 경제를 떠받쳤던 반도체 수출 부진과 고용 유발 효과가 큰 건설업 위축으로 고용 환경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는 데다 수출 시장으로 의존도가 높은 미국과 중국 간 무역갈등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베트남으로 모여드는 국내 기업과 투자자가 늘고 있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다.

지난 1월 우리나라의 실업자 수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20만4000명 늘어 122만 명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실업률은 4.5%로, 1월 기준으로는 2010년 5% 이후 최고치였다. 15~29세 청년 실업률은 8.9%였고, 취업 준비생 등을 포함한 청년층의 체감 실업률은 23.2%에 달했다.


현대차 베트남 점유율 도요타 이어 2위

수출도 줄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난달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1% 감소한 395억달러를 기록했다. 지난해 12월부터 3개월 연속 감소다. 반도체 가격 하락에 중국 경제 성장 둔화가 겹치면서 2월 반도체 수출이 24.8% 하락한 영향이 컸다.

“박항서 감독도 처음엔 소위 ‘구조조정’된 거 아니냐. 쫓겨난 것인데 베트남에 가서 인생 이모작 대박을 터뜨렸다.”

지난달 28일 대한상공회의소 조찬 간담회에서 김현철 당시 청와대 경제보좌관(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이 인도,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시장 진출을 확대하는 정부의 ‘신남방(新南方)정책’ 전략을 소개하며 한 말이다. 김 전 보좌관은 문재인 정부가 역점을 둔 신남방정책을 총괄하는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 위원장도 겸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젊은이들은 여기(한국) 앉아서 취직 안 된다고 ‘헬조선’이라고 하지 말고, 신남방 국가에 가면 ‘해피 조선’”이라고도 했다.

발언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김 전 위원장은 이틀 만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취임한 지 석 달도 안 돼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무작정 ‘신남방’ 국가에 진출한다고 해서 보장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태국과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세안 시장은 일본의 텃밭이나 다름없다. 2017년 아세안 시장에서 팔린 자동차 중 일본 브랜드 점유율은 79%였지만, 한국 브랜드 점유율은 4.3%에 불과했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일본 차 점유율은 97%로 독점이나 다름없다.

일본의 대(對)아세안 직접투자(FDI) 규모는 2016년 한 해 140억달러(약 15조6000억원)에 달했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는 58억9000만달러를 투자해 일본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또 일본 인적자원개발센터가 2015년부터 지금까지 교육한 아세안 지역 인재는 총 1만7000명을 넘어섰다.

박항서 감독이 ‘인생 이모작 대박’을 터뜨린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우리 기업의 선전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기는 하다. 그러나 철저한 시장 분석과 준비 없이 무작정 덤벼 성공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시장은 아니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이미 7000개를 넘어섰다. 베트남 투자 매력이 급증하면서 중국과 일본도 베트남 시장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특히 일본은 베트남으로부터 수입을 늘리는 한편 대베트남 FDI를 확대하고 있다. 2017년 이후 투자액만 놓고 보면 일본은 한국을 제치고 베트남 내 최대 투자국이다.

해외 투자 시 금융권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기업 간 역할을 분담해 과당 경쟁을 방지하는 일본과 달리 우리 기업은 ‘각개전투’로 임하다 보니 제 살 깎아 먹기식 출혈 경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노이에서 만난 한국 금융사 주재원은 “일본의 동남아 투자는 공식이 정해져 있다”며 “공항과 도로를 건설해 주고 혼다 오토바이를 가져와 팔다가 소득이 높아지면 도요타 차를 들여와 판다. 태국에서 했던 방식을 베트남, 미얀마에서 되풀이하는데 실패할 수 없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1979년 베트남과 국경 분쟁(중·월 전쟁) 이후 베트남과 관계가 껄끄러웠던 중국 기업과 투자자들도 엄청난 자본력을 앞세워 서서히 존재감을 높여가고 있다. 베트남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지난해 2분기 기준 37% 점유율로 1위를 지키고 있지만, 점유율은 1년 전보다 4%포인트 하락했다. 2위는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 오포(22%)였다. 1년 전 1%에 불과했던 샤오미는 5%로 점유율을 끌어올렸다.

많은 한국 기업이 베트남으로 생산 거점을 옮기면 훨씬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고속 성장 중인 베트남의 노동 시장이 완전고용에 가까워 쓸 만한 인력을 채용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다. 성장 속도가 빠른 만큼 이직률도 높기 때문이다.

하노이에서 만난 은퇴한 한인 사업가는 “봉제 사업을 운영하며 5000명을 고용했는데 설 연휴가 지나고 2000명이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며 “그래도 워낙 경기가 좋아 빈자리를 채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효성 등 현지에서 잘나가는 한국 기업들도 연 이직률이 3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00명을 뽑으면 1년 안에 30명이 퇴사한다는 이야기다.


CJ CGV, 베트남 1위 극장·배급사

최저임금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베트남 최저임금은 올해 평균 5.3% 인상됐다. 3~4년 전까지 매년 두 자릿수 인상률을 기록하다 그나마 안정세에 접어든 것이다. 베트남 진출 한국 기업 중에는 섬유와 신발 등 노동집약적 산업 비중이 높아 부담이 커지고 있다.

급성장하는 베트남의 주요 기업들이 머지않아 한국 기업의 경쟁자로 떠오를 것이라는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부동산 개발 사업으로 시작해 스마트폰과 자동차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베트남 최대 기업 빈그룹이 삼성과 LG의 인재들을 빼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최근 몇 년간 중국에서 겪은 악몽이 ‘넥스트 차이나’ 베트남에서 되풀이되지 말란 법은 없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중국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0.7%까지 곤두박질쳤다. 최근에는 현대자동차의 중국 합작법인인 베이징현대가 판매 부진으로 베이징 1공장 가동 중단을 결정했다. 2017년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 보복 여파로 판매량이 쪼그라든 뒤 2년간 해당 공장 가동률이 50%를 밑돌면서 ‘구조조정 카드’를 꺼내 든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아직 베트남에서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좋다. 한국무역협회의 최근 조사 결과를 보면, 베트남 소비자의 91%가 최근 1년간 한국 상품을 구매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구매자의 89%는 한국 상품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74%는 재구매 의사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절반가량은 베트남에서 만들어진다. 박닌과 타이응우옌 현지 공장에서 먹여 살리는 베트남 직원만 10만 명이 넘는다. 인도네시아 시장 점유율이 0.2%에 불과한 현대차의 베트남 시장 점유율은 20%로 도요타에 이은 2위다. 삼성전자는 베트남 전체 수출의 약 25%를 담당하고 있다.

CJ CGV는 베트남 1위 멀티플렉스이자 배급사다. 신한은행의 베트남 법인 신한베트남은행은 총자산 37억4600만달러(약 4조원)로 베트남 내 외국계 은행 중 1위다.

하지만 전 세계 투자자들이 몰리며 꽃놀이패를 손에 쥔 베트남에서 중국·일본과 경쟁해 이기려면 장기적인 안목에서 정책 방향을 새로 짜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연간 300억달러에 이르는 대(對)베트남 무역흑자도 줄이고 상호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동반자 관계를 확립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혁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은 ‘이코노미조선’ 인터뷰에서 “아세안 지역에서 한류 드라마와 K-팝의 인기는 여전히 뜨겁지만, 한국에 대한 신뢰가 일본만큼 높진 않다. 한국도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아세안 시장에서 파이를 키워가며 함께 성장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아세안에 대한 경제 지배력을 높이려던 일본이 거센 저항에 방향을 바꿔 1977년 ‘아세안의 진정한 친구가 되겠다’는 후쿠다 독트린을 발표한 것이 역내 국가에서 위상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 것을 우리도 교훈 삼을 필요가 있다.


plus point

베트남 전문가 키우는 ‘대우 사관학교’

베트남 지역 전문가를 꿈꾸거나 관련 분야의 채용을 원한다면 대우세계경영연구회의 글로벌 청년사업가(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과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2009년 전직 대우그룹 임직원들이 설립한 비영리 단체로 정회원은 4600여 명이며 해외에 34개 지회를 두고 있다. GYBM 과정 외에 중소기업 지원 사업, 학술세미나와 세계경영아카데미 운영 등을 진행한다.

2011년 40명의 베트남 1기 과정으로 시작해 7년 만인 지난해 연수생 1000명을 돌파했다. 현재는 3 대 1의 경쟁을 뚫고 지난해 7월 선발된 170명의 연수생이 3개월간의 국내 연수 과정을 마치고 베트남(100명)과 미얀마(20명), 인도네시아(30명), 태국(20명)으로 흩어져 교육 중이다.

베트남 현지 교육은 9개월 과정으로 하노이보건대에서 진행 중이다. 비용(교육비·숙식비·항공료 등)은 전액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원들의 연회비,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지원금·기부금 등으로 충당된다. 연수생 한 명당 투입되는 교육비는 연 1500만~1700만원 수준이다.

성강민 GYBM 베트남 교육팀장은 “베트남어 교육과 체력 관리에 많은 비중을 두며 멘토 프로그램도 운영한다”면서 “연수생 스스로 어떤 커리어패스(직업 경로)를 쌓을 것인지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끊임없이 상담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연수생들은 오전 5시 30분 기상, 5시 45분 점호 직후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해 밤 10시 저녁 점호를 받는다. 하지만 바로 잠자리에 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끝내야 할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과정은 고되지만 열매는 달콤하다. 지금까지 졸업생 전원이 현지 취업에 성공했다.

plus point

베트남 한인 사회 정보 채널은 ‘단톡방’

바쁜 베트남 출장 일정 중 어렵게 시간을 내 호찌민에 사는 후배와 점심을 했다. 중심가와 좀 떨어진 호젓한 베트남 식당에서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며 회포를 풀려는데 후배 스마트폰에 연신 ‘카톡’이 울렸다.

뭔가 했더니 ‘단톡방’이란다. 단톡방이야 우리나라에서도 새로울 게 없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 업무에 지장을 주지만,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까 탈퇴도 못 하고 전전긍긍하는 그 단톡방 맞다.

카톡 단톡방이 베트남에서는 한인 커뮤니티의 정보 교류는 물론, 홍보·마케팅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후배가 가입한 단톡방은 부동산 중개업소부터 반찬가게, 마트, 증권 정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가입자 수가 1600명이 넘는 반찬가게 ‘소담반찬’의 단톡방에서는 돈가스와 치킨스틱 등 새로운 아이템 입점 정보가 올라왔다. 20만동(약 1만원) 이상 구매하면 배송이 가능하다는 정보도 곁들여졌다. 약 1500명이 가입된 ‘참하우스’ 부동산 단톡방에는 ‘마스테리 파크랜드’라는 이름의 48층짜리 고층 아파트 분양 정보가 올라왔다. 2021년 완공 예정으로 평당 분양가는 우리 돈으로 약 860만원이다.

베트남 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유익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긍정적인 부분만 있는 건 아니다. 가뜩이나 한인들끼리 이웃에 모여 사는 경우가 많은데 단톡방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현지화가 더딜 수밖에 없다.

호찌민에서 만난 또 다른 지인은 “단톡방이 중고 상품이나 환전 거래 사기의 무대가 되는 경우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용성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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