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제품 매장에 전시돼 있는 삼성·LG전자의 세탁기. 사진 조선일보 DB
전자제품 매장에 전시돼 있는 삼성·LG전자의 세탁기. 사진 조선일보 DB

몇 년 전 유럽 세탁기 시장 조사를 담당했던 국내 가전 업체 관계자는 조사 결과를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유럽 소비자가 최첨단 기능이 들어간 한국 세탁기보다 단순한 기능의 밀레 세탁기에 높은 점수를 준 것이었다. 이 관계자는 “유럽 소비자는 버튼이 많은 한국 세탁기를 이해하지 못했다”며 “탑재된 기능을 다 익히려고 사용설명서를 펴 놓고 공부해야 하냐고 반문했다”고 말했다.

당시 삼성전자와 LG전자 세탁기에는 울세탁부터 아기 옷, 찌든 때, 이불 세탁 등 여러 기능과 이를 위한 10여 개의 버튼이 있었다. 반면 유럽 소비자가 많이 쓰는 밀레 세탁기는 전원 온·오프 버튼과 타이머 다이얼이 전부였다.

이후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기존 세탁기 버튼이 여러 개여서 사용하기 복잡할 뿐 아니라 사용하지 않는 불필요한 기능이 많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버튼을 최소화하고 LCD 화면을 통해 사용자가 쉽게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편의성을 높였다.

세계 가전 시장에서 선두권을 달리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유독 유럽 시장에서 고전하는 것은 현지 가전 업체보다 기본기가 약하다는 평가 때문이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밀레, 일렉트로룩스 등은 전자장치 없이 전기·기계 장치로 가전제품을 구동하던 시절부터 기술을 개발해 왔고, 이 때문에 기본기인 전기·기계 기술력이 뛰어나다. 유럽 소비자가 기능보다 내구성을 중시하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어진 것이다.

세탁기를 비롯해 각종 전자기기에 탑재된 기능 중엔 알 수 없고, 필요도 없는 것들이 넘친다.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10~20대가 정작 사용하는 앱은 20~30%에 불과하고, 온갖 신기술을 갖춘 가전제품 역시 전체 기능 중 극히 일부만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복잡한 기능은 엄청난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삼성전자가 2016년 8월 2일 선보인 갤럭시노트 7은 발화 사고로 인해 출시 54일 만에 단종됐다. 당시 발화 사고의 원인은 배터리 결함으로 결론 내려졌지만, 그 이면엔 복잡성이 있었다. 당시 갤럭시노트 7은 홍채 인식 기능을 처음으로 탑재하는 등 최첨단 기술을 모두 반영했다. 또 스마트폰의 용도가 단순 통화보다는 인터넷 사용과 게임 등으로 바뀐다는 점을 감안해 배터리 용량을 역대 최대급인 3500mAh로 키웠다. 이는 전작보다 약 500mAh가 증가한 수치다. 삼성전자가 배터리 협력업체에 요구한 것도 ‘더 작고 가볍지만 용량을 더 크게 키우라’는 것이었다. 성능과 기능이 복잡해졌고 배터리에 부하가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지만, 제품 설계 단계에서 이런 점들은 고려되지 않았다. 첨단 기술을 많이 탑재할수록 제품은 복잡한 시스템을 갖추게 되는데, 이에 따른 제품 불량의 원인도 복잡해진다. 각각의 부품 설계는 잘됐을지라도 전체 부품의 통합 능력 즉 아키텍처 구축 능력 부족이 원인일 가능성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갤럭시노트 7의 문제 역시 제품에 많은 기능이 과다 집결돼 제품이 이를 소화하지 못한 탓이 크다”고 말했다.

너무 복잡하게 보이는 것은 좋은 디자인의 법칙에도 어긋난다. 특히 유럽의 가전제품들이 내구성을 중시한다고 해서 디자인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들이 오랫동안 제품을 쓰도록 하기 위해선 싫증나지 않는 모양이어야 하고, 이를 위해 화려함보다 담백함, 복잡함보다 단순함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글로벌 가전 기업 다이슨의 디자인 철학은 ‘디자인은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것이다. 즉 독창적인 기능을 먼저 생각하다 보면 제품 외관도 ‘자연스럽게’ 독창적으로 형성된다는 게 창업자인 제임스 다이슨과 엔지니어들의 생각이다. 디자인보다 기능을 우선하는 경영철학은 직원의 구성을 봐도 알 수 있다. 다이슨 직원 1만1500여 명 중 절반 이상인 5800여 명이 엔지니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시형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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