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el, GE, ENgie 등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은 변신을 통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Enel, GE, ENgie 등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은 변신을 통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한국전력공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기를 안정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사회적으로 친환경적이고 안전한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 전력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한전은 거대한 변화 요구에 직면해 있다.”

어느 한전 고위간부의 말이다.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게 지상과제였던 전문가 집단 한전의 ‘존재 이유’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전기요금 인상을 억제한 채 비용이 많이 드는 친환경(탈석탄)과 안전성(탈원전)을 강조하다 보니 한전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개발도상국의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는 데 더해 정보기술(IT) 등이 접목된 에너지 신시장이 열리면서 사업 기회가 커지고 있다. 해외 에너지 기업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다양한 변신을 통해 과거와는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다. 관련법상 한전의 설립목적은 ‘전력수급 안정을 도모하고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전자가 물론 중요하지만, 이제는 후자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해외 주요 에너지 기업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변신을 통해 에너지 신시장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한국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전이라는 전문가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조선’은 3월 11일부터 한 달간 에너지업계 관계자들과 전문가들로부터 정부 에너지정책에 대한 평가와 한전이 어떻게 해야 국가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을지를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번 설문에는 공공기관과 일반기업을 포괄하는 에너지업계 관계자들, 학계와 연구기관 종사자, 기후변화 전문가 등 60명이 참여했다.

설문 결과, 응답자들은 정부가 한전과 발전 자회사 등 전력 공기업에 대한 자율성을 강화해 먹을거리를 원활히 찾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부의 재생에너지 확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선결과제로 전기요금 정상화(인상)도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정부 에너지정책의 지속성 확보도 긴요한 과제로 지목됐다.

익명성을 보장하고 설문한 끝에 자유의견을 받은 관계로 정부와 한전에 대한 다양한 지적과 제언도 들을 수 있었다. 응답자들은 정부가 탈원전 방향과 속도를 조정하고, 한전이 국내 에너지기업의 원활한 해외진출을 위한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를 위해 정부도 규제를 보다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전 자율성 강화해야

우선 ‘정부가 에너지전환 목표(현재 7% 수준인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030년까지 20%로 높이는 것)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정부 에너지정책의 지속성 확보’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는 20명(33%)이 선택했다. 이어 ‘에너지산업생태계의 지속가능성 확보(16%)’, ‘탈원전 현실화(16%)’의 순으로 선택했다. 한 설문 참여자는 “녹색성장, 창조경제, 탈원전에 이어 수소경제까지 정권 따라 급변하는 에너지정책이 산업 생태계를 망가뜨린다”고 지적했다. 한 원자력발전업계 관계자는 “무엇보다 정권과 관계없는 일관적인 에너지정책이 절실하다”며 “이념에서 벗어나 미래 100년을 보는 정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한전 등 에너지공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정부의 과도한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답변이 50%를 차지했다. 이는 이번 설문조사에서 가장 높은 비중이었다. 그만큼 규제완화가 절실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어 ‘단계적인 민영화를 통한 경쟁체제 강화(23%)’ ‘대표이사 임기보장 등 리더십 강화(16%)’의 순이었다. 한 교수는 “정부의 과도한 간섭이라는 것이 규정상 명시된 것도 아니고 정량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정부와 에너지산업계 간의 소통이 강화돼야 한다”며 “그리고 필요할 경우 한전의 자율과 책임에 대해 명문화하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한다”고 했다.

‘정부가 에너지전환 목표를 달성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전기요금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답변이 33%로 가장 많았다. 탈원전과 탈석탄 정책에 따라 발전비용이 증가하는 가운데 한전의 손실이 커지고 있어 전기요금을 올려야 한다는 의미다. 이어 ‘에너지산업생태계 지속 가능성 확보(13%)’ ‘탈원전 현실화(13%)’의 순이었다.

‘이번 정부의 에너지정책을 대표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꼽은 응답자가 36%를 차지해 가장 많았다. 이어 ‘탈원전’이 20명(33%)으로 뒤를 이었다. ‘경제성(경제급전)보다 친환경(환경급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에너지정책’은 13%가 골랐다. 정부가 남은 임기 동안 역점을 둬야 할 전력정책에 대해서는 ‘에너지전환 목표 달성을 위한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답변이 50%를 차지했다.


탈원전 방향과 속도 조정해야

설문조사를 통해 에너지업계와 한전 발전방향에 대한 다양한 의견도 취합했다. 한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탈원전과 탈석탄은 어렵게 유지하고 있던 ‘에너지믹스(발전원별 발전량 조합 비율)’의 균형을 뒤흔들어 버렸다”며 “불과 1년이 좀 더 지났는데 미세먼지 발생과 전기요금 인상 압박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준비 없이 시작한 탈원전의 방향과 속도를 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한전 자회사 관계자는 “탈원전과 탈석탄, 신재생에너지 확대와 같은 선언적인 목표를 제시하는 것에서 탈피해 구체적인 목표치를 명확히 정해서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한 전력 유관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인 에너지정책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정부가 에너지공기업의 신시장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한 교수는 “한전이 해외 사업을 통해 할 수 있는 역할은 발전소 운영 등으로 사실상 제한적이다”라며 “다만 한전의 브랜드 가치를 활용, 민간기업이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기반을 조성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했다.

한 교수는 “기획재정부가 해외 사업 예비타당성 심사를 좀 더 유연하게 풀 필요가 있다”며 “현재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좋은 기회를 놓칠 때가 많다”고 했다. 한 전직 한전 CEO는 “한전이 다른 산업과의 융합을 활성화해야 하는데 지금은 자회사를 만들려고 해도 규제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특수목적법인(SPC) 설립조차 정부의 허가가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에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율성 강화가 절실하다”고 했다. A발전사 관계자는 “정부가 규제를 풀어 한전이 에너지신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했다.

한 전력 기자재업체 관계자는 “안정적인 전력공급은 더 이상 한전의 경쟁력이 아니다”라며 “한전이 스스로 글로벌 에너지사업자 역할을 더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수퍼그리드(국가 간 전력망 설립 및 전력 거래) 추진을 다시 검토하는 등 적극적인 먹을거리 발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수출 강화 지원도 필요

한전에 대한 질타와 제언도 쏟아졌다. 한전과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한 연구원은 “한전은 맨날 적자라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인센티브(성과급) 축제를 벌이고 있다”며 “관리 비용만 쓸 뿐 기술개발에는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한전의 연구를 들여다보면 송배전 효율 강화 등 기존에 진행하던 연구는 많지만, 새로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적다”고 덧붙였다. 한 공공기관 연구원도 “에너지 신산업 발전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기술개발인데 한전은 도전적인 연구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한 민간회사 연구원은 “정부의 간섭을 줄이기 위해 가장 1차원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문제는 한전 스스로가 뭔가를 하고자 하는 방향성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이다”라며 “한전이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 게 큰 문제”라고 했다.

한 교수는 “한전이 상당한 기간 노력해 전력 손실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면서 “그러나 수출을 강화하려면 새로운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적극적으로 접목해야 한다”고 했다.

한전 조직에 대한 문제도 제기됐다. 한 공대 교수는 “한전 조직의 특징은 절반가량이 기술직(이공계)이고 나머지는 영업군 등 사무직이라는 점이다. 양측의 소통이 부족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이공계 안에서도 서울대 출신, 한양대 출신 등으로 나뉘어 일종의 파벌을 형성하고 있다”면서 “계속 이래서는 발전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한 기자재 업체 관계자는 “한전이 스스로 해외 진출 문을 적극적으로 열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정부도 한전의 권한을 강화하는 동시에 책임도 명확하게 정의해 산업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한 교수는 “전력회사 해외 진출은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의 전력계통 개발 및 운영을 위탁받는 것인데 그러한 사업 영역은 많지 않고, 투자 비용의 회수도 쉽지 않을 수 있다”면서 “중전기(발전기, 전동기, 변압기 등 중량이 큰 전기기구) 기업의 기술 수준을 높이고 한전의 브랜드파워를 활용해 수출을 확대하는 것이 한국 에너지산업의 성장을 위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 발전기자재 업체 관계자는 “글로벌 시장 진출 확대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후진국이 처한 상황에 맞는 수출 전략 확보가 우선시 돼야 한다”며 “정부와 한전이 이에 대한 고민과 조사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이번 설문참여자는 전력회사 직원이 14명으로 가장 많았고, 기자재업체 직원 10명, 교수 8명, 기후변화전문가 6명, 연구원 8명, 건설회사 직원 6명, 전력수급 관리회사 직원 4명, 전력정책 전문가 2명, 유관협회 직원 2명이었다. 종사 기간은 10~20년이 34명으로 가장 많았고 10년 미만 14명, 20~30년 8명, 30~40년 4명의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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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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