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 현장. 영화계는 수직적 도제교육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영화 제작 현장. 영화계는 수직적 도제교육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scene#1 파주의 한 시골 마을. 트레이닝복 차림의 배우 유아인이 어스름한 새벽하늘을 가르며 달려간다.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깔린 안개 속에서 희미한 가로등 몇 개가 조심스럽게 빛나고 있다.

scene#2 배우 전종서가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집 마당 앞에서 노을을 등지고 춤을 춘다. 노을은 빛바랜 무지개색을 띠고, 역광을 맞은 그의 뒷모습은 검은 실루엣으로 나타난다.

2018년 개봉한 영화 ‘버닝’ 속 장면이다. 모두 자연광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 찍은 것으로 ‘버닝’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이 장면을 촬영한 주인공이 ‘설국열차’ ‘해무’ ‘곡성’ 등의 화면을 만들어낸 홍경표 촬영감독이다.

그는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촬영감독이지만, 한국 영화계에 뿌리 깊은 도제교육 시스템을 통해 성장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도제교육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스템을 박차고 나갔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촬영감독이 되기까지 너무 긴 조수 생활을 거쳐야 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결국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의 촬영 조수로 LA에 갔는데,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 시스템에 반해 눌러살면서 영화를 더 공부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한국 최초의 잠수함 영화 ‘유령’을 찍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국의 도제교육 시스템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 촬영 현장은 제작, 각본, 연출, 연기, 미술, 촬영, 조명 등 많은 팀이 협력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이 중 영상을 담아내는 것과 관계된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촬영팀이다. 촬영팀은 감독이 의도한 화면을 기술적으로 시각화하는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다. 기술과 미학 그리고 스토리에 대한 이해를 아우르는 폭넓은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촬영팀은 다른 팀보다도 유난히 조직구조가 체계적이다. 촬영감독은 보통 3명의 팀원을 둔다. 막내 ‘서드’ 1명과 한 단계 높은 ‘세컨드’ 직급 1명이 조수 역할을 맡는다. ‘퍼스트’급도 1명 있는데, 조수와 촬영감독을 잇는 중간관리자다. 그 위에 비로소 최종 책임자인 촬영감독이 있다.

현장에서 촬영감독을 제외한 팀원들은 기술적 잡무를 한다. ‘카메라 다리(삼각대) 가져와라’ ‘다리 잡아라’ ‘카메라 둬라’ ‘렌즈 가져와라’와 같은 지시가 퍼스트에서 세컨드로 상명하복식으로 전달된다.


영화계가 도제교육 시스템을 채택한 이유는 현장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화계가 도제교육 시스템을 채택한 이유는 현장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드는 기초적인 일만 맡는다. 예컨대 촬영 중간에 카메라 꺼짐을 방지하기 위해 배터리를 충전하고, 카메라 렌즈 박스를 갖다주고, 렌즈를 세컨드 손에 놓아준다. 세컨드는 서드가 건네주는 렌즈를 잽싸게 낚아채 카메라에 끼우는 역할을 한다. 이외에도 장비 전반을 관리한다. 퍼스트는 좀 더 권한이 많다. 촬영감독의 지시에 맞춰 초점을 맞추고, 카메라를 배치한다. 추가적으로 세컨드와 서드 인사를 관리한다.

촬영감독은 카메라를 직접 조작한다. 촬영 구도, 카메라 위치, 사용 장비를 결정한다. 촬영이 하나의 예술이라면, 미학적인 부분은 촬영감독이 전권을 쥔다. 상명하복식 문화상 팀원이 직접적으로 의견을 내기는 쉽지 않다.

촬영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수련 기간이 필요하다. 촬영감독을 따라다니면서 경력을 쌓는 것이다. 서드는 보통 3년 이상, 세컨드는 6년 이상 경력을 쌓으면 진급할 수 있다. 이마저도 진급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팀 내 공석이 생기지 않으면 계속 서드만 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계에서 도제교육 시스템을 채택한 이유는 현장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교육기관에서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발생하는 변수에 대처하는 법을 모두 배우기 어렵다. 특히 화면의 미적 표현에 영향을 미치는 조명팀과의 소통이 중요한데, 이 모든 경험이 현장에서 이뤄진다. 관록 있는 촬영감독의 행동거지가 조수들에게는 어깨너머로 배우는 교과서다. 경력 1년의 서드 이모(27)씨는 “도제교육을 통해 현장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선배들이 경력이 부족한 후배들까지 낙오시키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가르치는 문화다”고 했다.

그러나 촬영팀의 도제교육이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장 경험을 전수한다는 핑계로 팀원들을 교육 대신 허드렛일만 맡기는 단순 노동력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기초부터 쌓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직급이 낮은 팀원들이 담당하는 일은 제한적이다.


최근 들어 도제교육을 받기보다 해외 유학이나 영화아카데미를 택하는 촬영 감독 지망생이 늘고 있다.
최근 들어 도제교육을 받기보다 해외 유학이나 영화아카데미를 택하는 촬영 감독 지망생이 늘고 있다.

촬영감독으로서 팀원들을 꼭 가르쳐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알아서 배우라’는 것이 영화판의 암묵적 약속 같은 시절도 있었다. 오죽하면 촬영감독이 조수들과 함께 공부하는 팀은 업계에서 부러움의 대상으로 소문 날 정도다.

영화 ‘부산행’의 이형덕 촬영감독이 그 예다. 이 감독은 영화 제작 돌입 전 미국의 유명한 촬영감독이 촬영한 영화를 팀원들과 함께 보고, 왜 이 영화를 참조하려는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토론한다고 소문 나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촬영감독 개인 의지의 문제다.

최근 들어 빠른 길을 택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많아졌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의 김기태 촬영감독은 과거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미국이나 체코, 러시아 등에서 2~4년간 공부하고 돌아오면, 충무로에서는 유학 갔다 왔다고 굉장히 인정해준다. 그런 모습을 본 주변의 후배들 중에는 ‘10년 도제생활 하는 것보다 몇 년 해외 유학 갔다 오는 게 더 도움될 것 같다’면서 갈등하는 친구들도 있다”고 했다.

또 다른 대안은 학교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영화 아카데미나 영화학과 석사 과정의 교육을 받고, 그곳에서 감독 지망생을 만나, 그 감독의 단편작을 찍는 방법이다. 그 감독의 단편작이 성공하면 그 감독과 함께 장편영화 촬영까지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장편영화 촬영감독으로 데뷔하는 방법이 있다. 다만 도제교육 시스템이 일반적인 업계에서는 학교 출신 촬영 감독들이 현장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은연중에 무시당하기도 한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전언이다.

도제교육의 형식주의에 매몰되면 본질적 목적인 후계자 양성에는 소홀해질 우려가 있다. 예술성이 요구되는 영화계 특성상, 수직적 구조는 창의력을 발휘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할 여지가 많다. 위계질서, 한정된 업무 권한 등의 한계에 너무 많이 부딪힌다면 제대로 된 성장이 어려워진다.

국내 영화사의 한 관계자는 “원래 좋은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해 고안됐던 게 도제 시스템이지만, 형식에 매몰되면 오히려 양성을 방해할 수 있다”면서 “영화계의 후계자 양성 실패는 영화계 전체의 손실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plus point

도제 시스템의 ‘여성 차별’

도제교육 시스템이 여성 촬영 팀원들에게 유리천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도제교육 시스템이 여성 촬영 팀원들에게 유리천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영화계는 전형적인 남초 집단이다. 우리나라 상업 영화계에서 여성 촬영 감독은 100명 중 4명에 불과하다. 여성 촬영 팀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있다.

도제교육도 원인 중 하나다. 도제교육하에서 촬영감독이 되려면 퍼스트까지 승진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여성 촬영 팀원들은 진급에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있다. 경력 7년의 남성 퍼스트 오모(30)씨는 “아는 여자 동료는 나와 경력이 1년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도 아직 서드”라면서 “내가 서드였던 시절 속한 팀의 퍼스트(남성)가 ‘여자는 뽑지 마’라고 공언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촬영팀에서 중진 격인 퍼스트는 촬영팀을 꾸릴 때 인사권을 쥔다. 퍼스트 역시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plus point

[Interview] 김성영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촬영감독
“작가주의·시스템 조합이 픽사 롱런 비결”

이용성 차장

김성영 홍익대 애니메이션학과,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시네마틱아트 석사, ‘인크레더블 2’ 촬영감독
김성영
홍익대 애니메이션학과,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시네마틱아트 석사, ‘인크레더블 2’ 촬영감독

“픽사는 작가주의식(도제식)과 시스템형을 절충했다. 스토리 아이디어는 감독이 책임지지만, 제작은 잘 짜인 시스템을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안정적인 작품 수급이 가능하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김성영 촬영감독(레이아웃 아티스트)은 ‘도제식’ 대신 ‘작가주의식’이라는 용어를 썼다. 감독이 중심 역할을 하고, 다른 아티스트들은 지원하는 방식이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끄는 스튜디오 지브리가 대표적인 예다. ‘양산형’ 시스템과 달리 작가의 개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천재 감독의 카리스마에 많은 다양한 재능들이 묻혀버릴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시스템형’은 할리우드 제작방식에 가깝다. 제작사가 작가와 시나리오를 선택해 거기에 맞는 감독을 고용한다. 특정 영역의 역량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시스템으로 보완해 작품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기존에 없던 실험적인 작품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다.

김 감독은 홍익대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국내에서 5년 정도 애니메이터로 일하다가 픽사에 합류한 지 8년째다. 지금까지 ‘인크레더블2’와 ‘몬스터대학교’ ‘도리를 찾아서’ 등 굵직한 작품 제작에 참여해 왔다. 김 감독을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콘텐츠 업계에는 수직적 도제 시스템의 뿌리가 깊다. 애니메이션 업계는 어떤가.
“실사 영화 업계는 확실히 그런 경향이 있다.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도 한국과 일본은 도제식 구조가 명확하다. ‘도제식’보다는 ‘작가주의식’이란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긴 하다. 북미와 유럽 쪽에서는 각기 역할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픽사의 경우 신입으로 들어오면 두 달 동안 멘토를 붙여주기는 한다.”

픽사에서는 새로운 작품을 제작할 때마다 오디션을 통해 팀을 꾸린다고 들었다.
“작품마다 감독과 수퍼바이저, 각 파트의 팀장 등을 오디션으로 선발한다. 담당 시니어 매니저에게 이메일로 지원 의사를 밝히면 인터뷰가 잡힌다. 특별히 테스트가 있는 건 아니다. 그동안 픽사 작품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부서 사람들과 얼마나 잘 소통하고 협력해 왔는지 등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감독과 프로듀서, 시니어 매니저가 심사를 맡는다.”

어린 직원이 중책을 맡는 경우도 있나.
“수퍼바이저는 상황 판단과 대처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경험이 부족하면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 감독은 가능하다. 올해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을 수상한 ‘바오’는 도미 시(Domee Shi)라는 20대 여성 감독이 연출했다. 감독이 어리면 전반적인 진행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경험 많은 수퍼바이저와 연결해준다.”

작가주의와 시스템의 조합이 픽사가 오랫동안 최고를 유지해온 비결인가.
“도제식 또는 작가주의식으로 스튜디오를 운영해 성공하려면 그 수장(감독)이 의심의 여지 없는 최고의 실력파여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운영 방식(시스템)을 확립해야 하는데, 그저 무난한 방식으로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작가주의와 시스템을 적절히 조합하는 것이 좋은 대안으로 보인다.”

김소희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