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소설의 치밀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드라마를 넘어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은 미드 ‘왕좌의 게임’의 한 장면. 사진 HBO
원작 소설의 치밀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드라마를 넘어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은 미드 ‘왕좌의 게임’의 한 장면. 사진 HBO

세계 콘텐츠 시장은 바야흐로 ‘시리즈물 전성시대’다. 그 중심에는 총 22편의 수퍼히어로 영화로 22조원 넘게 벌어들인 마블 스튜디오(이하 마블)와 드라마를 넘어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은 미드(미국 TV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이 있다.

시리즈물 인기 자체가 새로울 것은 없다. ‘스타워즈’와 ‘해리포터’ ‘토이스토리’ 등 시리즈로 제작돼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은 과거에도 많았다. ‘프렌즈’와 ‘오피스’ 등 과거 국내에서 크게 히트한 작품들이 그랬듯, 미드의 ‘시즌제’ 제작 방식은 표준이 된 지 오래다. 시즌제는 제작하는 기간과 방영하는 기간을 나누어 운영하는 시스템이다. 미드의 경우 보통 9개월간 제작해 3개월 동안 12회차를 방영하거나 6개월 동안 제작해 6개월 동안 격주로 12회차를 방영한다.

두 작품의 경우 과거 작품들과 차이가 있다면 시리즈(또는 에피소드)별로 이어지는 연결성이 한층 더 촘촘해졌다는 점이다. 시리즈나 시즌이 바뀌어도 확고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탄탄한 ‘세계관’ 덕분이다. ‘프렌즈’나 ‘오피스’처럼 소소한 일상을 다룬 드라마에 세계관이란 거창한 단어가 어울리진 않지만, 마블의 ‘어벤져스’ 시리즈나 ‘왕좌의 게임’처럼 엄청난 스케일의 판타지물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어벤져스’처럼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수퍼히어로들을 한 작품에 몰아넣을 경우 각기 다른 설정이 충돌하지 않도록 공통의 세계관을 확립하는 작업이 필수다. 그렇게 형성된 것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다.

MCU의 구축으로 마블은 경쟁사 DC가 이루지 못한 ‘돈 되는 세계관’을 확고히 했다.

150년을 바라보는 영화 역사상 흥행 수입 상위 10개 작품(5월 29일 기준) 중 절반은 마블 작품이다. 4월 24일 국내에서 세계 최초 개봉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약 26억8700만달러(약 3조2000억원)의 흥행 수입으로 ‘아바타(27억8800만달러)’를 바짝 추격 중이다. 이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5위)’, ‘어벤져스(7위)’,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9위)’ ‘블랙팬서(10위)’가 1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2008년 ‘아이언맨’으로 시작해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총 22편의 작품을 선보인 마블이 그중 무려 다섯 편이나 ‘할리우드 역대 톱 10 흥행작’에 올려놓았다는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업적이다.

2011년 첫 방송을 시작해 얼마 전 막을 내린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경우 원작인 조지 R. R. 마틴의 판타지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를 통해 구성된 치밀한 세계관이 중요한 성공 비결로 꼽힌다. 수십 명의 등장인물이 각자 이야기의 축을 나눠 맡는 구성과 촘촘하게 깔린 복선, 무수한 음모는 잠시라도 눈을 떼면 따라잡기 힘들다. 하지만 초반 얼마 동안만 집중력을 발휘하면 자연스럽게 극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는 것 또한 잘 짜인 세계관의 힘이다.

‘왕좌의 게임’은 가상 대륙 ‘웨스테로스’를 통치하는 ‘철 왕좌(iron throne)’를 차지하기 위한 7개 가문의 사투를 다룬 판타지 드라마다. 시즌8의 회당 제작비가 1500만달러(약 178억원)에 육박할 만큼 스케일부터 압도적이다. 역대 국내 영화 중 흥행 1위작인 ‘명량’의 제작비(180억원)와 비슷한 액수를 매회 쏟아부은 셈이다. 시즌1 첫 방송의 미국 시청자 수는 222만 명이었지만, 시즌8 첫 방송의 시청자 수는 1740만 명으로 8배 가까이 늘어날 정도로 시즌을 거듭할수록 인기가 급증했다.

탄탄한 세계관은 새로운 창조의 동력이다. 영화나 드라마가 막을 내려도 스핀오프(기존의 영화, 드라마, 게임 따위에서 등장인물이나 설정을 가져와 새로 이야기를 만든 작품) 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HBO 측은 ‘왕좌의 게임’ 스핀오프 제작에 이미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작자 마틴은 이와 관련해 “웨스테로스 지역의 역사에 대해 수천 페이지를 썼다. 더 많은 내용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해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DC도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 등이 함께 등장하는 ‘저스티스 리그’로 ‘DC 유니버스’를 구축했지만 흥행에 실패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DC도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 등이 함께 등장하는 ‘저스티스 리그’로 ‘DC 유니버스’를 구축했지만 흥행에 실패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세계관 확립 앞서 캐릭터 완성도 높여야

반대로 세계관이 취약한 경우에는 인기 캐릭터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아도 흥행을 장담할 수 없다. 사실 MCU 등장 이전에도 독립된 히트상품(캐릭터)을 ‘공통의 세계관’으로 묶으려는 시도는 종종 있었다. 수퍼 히어로물은 아니지만, 각각 ‘13일의 금요일’과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주인공인 살인마 제이슨 부히스와 프레디 크루거를 함께 등장시킨 ‘프레디 vs. 제이슨(2003)’이나 영화 역사상 최강의 우주 생명체들인 에이리언과 프레데터가 함께 나온 ‘에이리언 vs. 프레데터(2004)’가 대표적이다. 마블의 경쟁사인 DC도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 등이 함께 등장하는 ‘저스티스 리그(2017)’로 ‘DC 유니버스’를 구축했다.

하지만 MCU 탄생 이전에 이 같은 시도가 크게 성공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등장인물의 무게감으로 보면 ‘DC 유니버스’가 MCU에 밀린다고 보기 어렵지만, 역대 흥행 수입 순위 100위까지 내려가도 ‘저스티스 리그’는 찾아볼 수 없다. 경쟁력 있는 세계관을 확립하려는 마블의 초기 전략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뜻이다.

MCU가 시작부터 확고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첫 작품인 ‘아이언맨’은 주인공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캐스팅을 두고도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아이언맨은 예상을 뛰어넘는 큰 성공을 거뒀다. 자신감을 얻은 마블은 ‘어벤져스’ 개봉을 서두르는 대신 ‘인크레더블 헐크(2010)’ ‘토르: 천둥의 신(2012)’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2012)’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개별 수퍼히어로들의 완성도와 친밀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쳤기에 뒤이어 탄생한 ‘어벤져스’에서 캐릭터마다 고유한 개성이 공통된 세계관 속에 매끄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저스티스 리그’와 ‘배트맨 vs. 슈퍼맨(2016)’ 등 DC 유니버스 작품들이 특유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그래서 좋아하는 골수팬도 있긴 하다)에 주인공들의 개성이 묻혀버리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과 대조적이다. 마블이 ‘올스타 라인업’의 상품성에 눈이 멀어 ‘어벤져스’ 제작부터 밀어붙였다면 결과는 사뭇 달랐을지 모른다.

이용성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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