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원피스 무기와라 스토어 오사카점. ‘원피스’ 관련 상품을 전문으로 파는 매장이다. 사진 김신영 기자
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원피스 무기와라 스토어 오사카점. ‘원피스’ 관련 상품을 전문으로 파는 매장이다. 사진 김신영 기자

최첨단 기술이 수시로 태어나는 미국 케임브리지 매사추세츠공대(MIT). 대학 내 스타트업 인큐베이터인 마틴 트러스트 기업가센터 입구엔 해적기가 걸려 있다. 이곳뿐 아니다. 상당수 미국 창업가들은 ‘해적의 정신’을 흠모한다. 그 배경엔 두 가지 뿌리가 있다.

하나는 창업계 ‘신화’인 애플 창업자 고(故) 스티브 잡스가 1980년대에 남긴 말이다. ‘해군이 될 바엔 해적이 되어라’는 미국 창업계가 갈망하는 패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또 하나는 일본 만화 ‘원피스’다. 해적왕이 꿈인 주인공 몽키 D. 루피가 해적선을 타고 동료들과 신나는(때로는 무시무시한) 모험을 펼치는 이 만화는 1997년 연재 시작 이후 지금까지 4억5000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 단일 작가의 만화 시리즈 가운데 세계 최다 판매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잡스가 미국의 젊은 창업자들에게 롤모델이라면, 해적 선장 루피는 이들과 함께 자라고 성장하는 동료 같은 존재다. 실제로 노트북 컴퓨터에 루피나 작품 속 해적선(‘사우전드 서니’)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MIT 학생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미국 쇼핑몰 아마존에서는 해적기 모양 칵테일 장식, 해적선 프라모델, 차량 범퍼용 스티커 등 원피스 관련 상품 1000여 종을 판매 중이다.

일본 만화와 이를 토대로 만든 ‘아니메(애니메이션)’는 일본의 대표 수출품이다. 일본애니메이션협회에 따르면 아니메 관련 상품으로 일본이 나라 밖에서 벌어들인 돈은 2011년 2900억엔에서 2017년 약 1조엔으로 크게 증가했다. 비정상적인 신체 비율(주먹만 한 눈, 목만큼 가는 허리 등)이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캐릭터 설정(여성 비하 등)에 대한 지적이 간혹 불거짐에도 한국은 물론 미국·중국·브라질 등 전 세계의 팬덤은 점점 불어난다.

일본 만화가 다양한 독자와 시청자에게 파고든 저력은 높은 완성도와 더불어 치밀하게 설계된 세계관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많다. 세계관을 ‘신념과 자세에 근거해 한 사람이 삶을 생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옥스퍼드 사전 정의)’이라 한다면, 일본 만화는 작가가 형성한 세계 안으로 수많은 소비자를 끌어들임으로써 거대한 지지층을 형성해 온 것이다.


그들은 나루토와 원피스의 세계에서 산다

확고한 세계관으로 팬들을 사로잡은 만화로는 1990년대 말 일본 만화주간지 ‘쇼넨(少年)점프’에 연재를 시작한 ‘나루토’와 ‘원피스’가 꼽힌다. 단행본이 각각 수억 권씩 팔렸고 아니메로도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렸다.

기시모토 마사시 작가가 그린 ‘나루토’는 천방지축인 고아 우즈마키 나루토가 나뭇잎 마을의 지도자를 일컫는 호카게(火影)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여러 스승과 동료의 도움으로 점점 강한 능력을 획득하면서 세계를 파멸하려는 세력에 맞선다.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는 근육질도 아니고 치밀한 지적 능력을 갖추지도 않았지만 온몸이 죽죽 늘어나게 하는 ‘고무고무열매’로부터 얻은 능력을 무기로 세계 최강자에 도전한다.

만화에 무관심한 사람이 이런 줄거리를 들으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기 십상이나, 정작 팬들은 이 두 만화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등장인물(혹은 동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뜨거운 토론을 벌인다. 가상의 세계이지만 그 세계 안에 빠진 독자들은 이 세계에 현실을 대입하면서 심각하고 치열한 고민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루토’의 주인공인 나루토(오른쪽)와 그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사스케의 피겨. 사진 김신영 기자
‘나루토’의 주인공인 나루토(오른쪽)와 그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사스케의 피겨. 사진 김신영 기자

‘작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영웅담

30대 여성 이애리씨는 ‘나루토’ 연재와 아니메 방영이 모두 끝났음에도 여전히 때때로 나루토를 다시 본다고 했다. “극심한 분노를 느낄 때면 ‘구미’에게 끌려 폭주하던 ‘나루토’가 자기 안의 ‘악’을 인정하고 수용함으로써 점차 자기 제어법을 터득해가는 과정, 수많은 악을 목도하면서도 본래의 믿음과 긍정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나루토의 모습을 보며 제 삶을 돌아봅니다.”

세계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한 이 두 세계관엔 공통점이 적지 않다. 특히 두 주인공이 성장해가는 과정은 ‘스타워즈’의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 등에게 큰 영향을 끼친 조지프 캠벨이 ‘영웅의 여정’에 적은 ‘영웅의 12단계’와도 느슨하게나마 일맥상통한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리고 실제로 초기엔 참 보잘것없는) 주인공들이 소명(‘호카게가 된다’ ‘해적왕이 된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정신적 스승과 협력자를 만난다. 이들은 시련에 맞닥뜨리고 때로는 좌절하지만 결국 또 이 시련을 극복하고, 거듭 일어선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길게는 10년 넘게 이어진다(‘나루토’는 2015년 끝났지만 ‘원피스’는 아직도 연재 중이다). 많은 시련에도 결코 스러지지 않는 주인공의 의지와 정신은 스스로를 ‘작은 존재’로 여기며 일상 속에 수많은 걱정과 시련을 안고 살아가는 독자와 시청자를 그 세계관 속으로 빨아들여 위안과 용기를 준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40대 회사원 김모씨는 나루토 팬이다. 그는 재미로 나루토를 그려 블로그에 올렸다가 남미에 있는 또 다른 나루토 팬이 열정 서린 댓글을 달아 다소 놀랐다고 했다. 나이도, 직업도 알 길 없는 ‘댓글러’는 이런 말을 적어 놓았다. “제 삶의 고비고비마다 힘을 주고, 지금의 저를 만든 존재는 나루토입니다. 열심히 그림 수련을 하세요. 반드시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김씨는 “나도 회사에서 지칠 때마다 나루토가 주문처럼 외치는 말 ‘마케라레나이(질 수 없다의 일본어)’를 중얼거리곤 했는데 지구 반대편에 이런 ‘나루토 정신’을 공유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회사 동료보다 더 깊은 동료애를 느꼈다”라고 말했다.

명확하고 탄탄한 세계관은 팬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요소다. 일단 한 세계관을 공유하기 시작하면 동창이나 동향 사람에게 느끼는 원초적인 동질감이 형성된다. 이들은 단순히 동영상을 공유하거나 캐릭터 상품을 모으는 수준을 넘어 글로벌 아이돌 BTS의 팬클럽 ‘아미’처럼,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비슷한 행동 양식을 향유하길 갈망한다.

한국의 만화 커뮤니티인 ‘츄잉’의 토론방에 들어가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아주 진지하게 ‘나루토’와 ‘원피스’의 세계관에 대한 토론을 벌이는지를 목격할 수 있다. 루피가 다음에 습득할 기술을 예측하는 토론 게시물엔 해부학 자료와 면적과 부피를 계산하는 수식이 등장한다. 게시물을 올린 이는 (자칭) 의학 전공자다. 게시물에 263개의 댓글이 달리며 찬반 토론이 벌어졌다. 이미 4년 전 막을 내린 나루토 토론방에서도 나루토의 가장 결정적 기술은 무엇인지, ‘이것이 나의 닌자의 길이니까’ 같은 ‘말발’도 나루토의 능력에 들어갈 수 있는지 등에 토론과 연구 글이 매일 수십 개씩 올라오고 있다.

세계관을 매개로 한 만화 소비자들의 끈끈한 동질감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바라트 아난드 교수가 책 ‘콘텐츠의 미래’에 콘텐츠의 성공 비결로 쓴 ‘소비자 간 연결’과 일맥상통한다. 아난드 교수는 제품 그 자체만큼 소비자 사이에 형성되는 네트워크가 상품의 성공을 결정짓는다고 썼는데, 세계관을 함께 논할 수 있다는 탄탄한 공통분모가 ‘원피스’와 ‘나루토’ 팬 사이를 이어줘 강력한 팬덤을 형성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김신영 조선일보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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