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보글러(Christopher Vogler) USC 영화학, 폭스 2000·디즈니·워너브러더스 시나리오 컨설턴트,‘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스토리 개발 부서의 메모’ 저자
크리스토퍼 보글러(Christopher Vogler)
USC 영화학, 폭스 2000·디즈니·워너브러더스 시나리오 컨설턴트,‘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스토리 개발 부서의 메모’ 저자

“우리는 영웅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전설적인 영웅에게 자신의 삶을 대입하고, 그 이야기를 시련에 대처하는 ‘지침’으로 여긴다.”

할리우드 스토리텔링 이론의 권위자인 시나리오 컨설턴트 크리스토퍼 보글러(70)에게 “사람들은 왜 정형화된 영웅 이야기에 열광할까”라고 묻자 이같이 답했다. 그는 1980년대부터 폭스 2000, 워너브러더스, 디즈니 등 할리우드의 주요 영화사에서 스토리텔링 컨설턴트로 활약했다. 그가 1985년 디즈니와 일할 때 정립한 ‘영웅의 여정 12단계(이하 영웅의 여정)’ 이론은 그 이후 할리우드 영화의 작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웅의 여정은 ‘전통적인 영웅 서사에는 동일한 이야기 패턴이 있다’는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아이디어를 영화에 적용한 것이다. 주인공이 △일상세계를 살다가 △모험을 떠나라는 소명을 받고 △그 소명을 거부하지만 △정신적 스승을 만난 후 △새로운 세계의 첫 관문을 통과한 후 △협력자와 적을 만나고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해 동굴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간 후 △시련을 이겨내며 △그 대가로 보상을 받고 △일상으로 복귀해 △마지막 시련을 이겨내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거친다는 내용이다.

보글러는 “영웅의 여정은 영화적 스토리텔링뿐 아니라 사업, 여행 계획, 심리 상담 등 실생활에서도 쓰임새가 있다”고 강조했다. 보글러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영웅의 여정이 ‘실생활에서 쓰임새가 있다’ 는 건 어떤 의미인가.
“영웅의 여정에 삶의 주요 사건을 대입하면 사건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전에 강연을 하러 갔는데, 끝나고 사람들이 찾아와서 ‘글쓰기와 관계없는 영역에 영웅의 여정을 대입해 어려움을 극복했다’라고 내게 말했다. 사업을 하면서 피할 수 없는 흥망성쇠의 사이클이나 제품 개발 단계를 예측할 때 ‘영웅의 여정으로 치면 이 단계쯤인가 보군’하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또 기업의 리더들은 직원들의 ‘목적의식’을 고양할 때 영웅의 여정을 활용해 스토리텔링을 한다고 했다. 예전에 콘퍼런스에 갔다가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내게 ‘영웅의 여정은 내가 아마존을 창업하고 발전시켜나간 과정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고 했다. 영웅의 여정이 그가 겪었던 어려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뤄낸 성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영웅 이야기에 열광할까.
“우리 삶에 영웅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전설적인 영웅에게 자신의 삶을 대입하고, 이 이야기를 삶에서 시련을 겪을 때 대처하는 ‘지침’으로 여긴다. 오늘날 영웅 이야기는 과거의 위대한 서사시 같은 존재다. 서사시는 당대 사람들이 혼란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쓰인 이야기다.”

영화마다 영웅 서사의 구조가 같다면, 관객들이 지루해 하지 않을까.
“작가의 의무는 서사의 기본적인 구조를 인지하되, 이를 변주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다. 관객의 기대를 미리 가늠해보고, 이것을 뛰어넘는 예상 밖의 이야기를 하거나 기대했던 부분을 아예 빼버리면 된다. 인간의 뇌는 이야기의 구조를 예상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는데, 이를 깨트리는 것이 나타나면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세계관’과 ‘스토리텔링’의 차이점은.
“세계관과 스토리텔링 모두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세계관이 좀 더 넓은 개념이다. 세계관은 스토리텔링의 ‘실험실’ 같은 존재다. 그 실험실에서 스토리텔링을 실험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영웅의 여정처럼, 세계관 창조에도 성공 공식이 있나.
“세계관 속 등장인물들이 양극단에서 치열하게 대립해야 한다. 소수의 중심인물이나 중요한 가족이 등장해야 한다. 이들이 사람들과 함께 일하거나 서로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변화에 적응할 것인가’ ‘갈등에 의해 파괴될 것인가’와 같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민하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질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 우리의 실제 세계와 비슷한 점이 있어야 한다. 상상 속 세계를 통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제를 비춰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실제 세계처럼 세계관에도 역사가 있어야 한다. 신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준의 역사가 필요하다.”

할리우드 주요 영화사와 일했다. 이들은 세계관을 얼마나 중요시하나.
“세계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영화사는 없었다. 특히 디즈니가 세계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디즈니월드 등 테마파크를 조성하고 특수 효과를 개발하던 전문가들이 대거 포진한 ‘디즈니 이매지니어링’이라는 연구·개발 자회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문가들은 일찍이 세계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물체의 움직임을 통해 세계관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세계관이 비즈니스에서 발휘하는 힘을 자연스레 파악했던 것 같다.”

최근 화려한 특수 효과 등 ‘볼거리’를 제공하는 영화들이 많다. 볼거리가 있으면 서사가 좀 부족해도 보완이 되지 않겠나.
“일부 감독들이 특수 효과에만 빠져 서사를 소홀히 하는 건 큰 걱정거리이자 문제다. 화려한 볼거리가 영화의 맛을 살리기는 하지만, 여기에만 치중하는 건 관객들의 수준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눈요깃거리로 줄 수 있는 즐거움에는 한계가 있다.”

영웅의 여정을 잘 살린 영화를 꼽아본다면.
“마블이나 DC의 영화 중 영웅의 여정을 따르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 더 어렵다. 다만 깊이 있는 캐릭터 분석을 하고, 관객들의 기대를 뛰어넘었던 영화들은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다크 나이트(2008년)’ ‘로건(2017년)’ 등이라고 생각한다.”

이민아 기자, 정예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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