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입사하면서 대리가 됐으면 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대리가 됐을 때 정말 행복했다. 다들 난리가 났다. 대리 승진하던 날, 회사는 대강당에서 ‘여성 대리 탄생’ 축하 파티를 열었다.”(허금주 교보생명 전무)

“2000년에 아모레퍼시픽에 특채 과장 초임으로 인정받고 들어갔다. 신임 과장 교육에 갔더니 180명 중 여자는 나 한 명이었다. 화장품 회사라 여성이 많을 것 같았는데도 그랬다. 여성 평균 재임 기간이 5년이었다.”(박수경 듀오 대표)

“1997년 지금과 다른 회사 입사 면접 때 ‘커피 심부름시키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데 그때는 이상하지 않았다. 면접자는 그런 문제로 조직 생활에서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다. 내 답은 ‘조직의 막내고 업무상 도움되는 상황이면 당연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남정민 풀무원 상무)

20년 넘은 옛날얘기를 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빠르게 변화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민주화 이전 시절에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성들에게도 지금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대학 진학률은 남녀 모두 30~40% 수준이었고 1990년대 중후반에는 50~60%로 높아졌다. 남성들은 ‘고졸’이라도 취업해 직장생활을 계속 이어 간 반면, 여성들은 ‘대졸’이라도 2~4년 일하다가 결혼했다. 결혼정보 회사에는 여성 직업란에 ‘신부 수업’이란 것도 있었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른들은 “여자가 무슨 일이냐. 시집이나 가라”고 했다. 직장 내에서 여성의 자리는 하급직이 아니면 거의 없었다.

대학까지 나왔던 ‘10명 중 서너 명’의 똑똑한 여성들은 어디로 갔을까. 80년대 학번의 대졸 여성 중 소수는 사회에서 계속 일을 이어 갔다. 90년대 학번 중에는 그런 여성이 좀 더 늘었다. 대학교수, 변호사, 의사 등 상대적으로 근무시간이 자유로운 전문직이거나 교사, 하급 공무원, 공공기관 직원 등 칼퇴근이 보장된 직원 또는 충분히 사회생활을 배려해주는 남편과 육아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여성들 중에 특히 많았다. 그러나 상당수는 직장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가정에 머물렀다. 육아와 살림은 여성의 몫이었고 사회는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들의 사회적 일에 대한 목마름은 딸들에 대한 교육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았고 딸들에게도 ‘하고 싶은 일은 하라’고 독려했다.

이들 고학력 여성들은 사회생활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남편들 대신 집안을 책임졌고 자녀 교육을 도맡았다. 오죽하면 자녀 교육 성공 요인의 하나가 ‘아빠의 무관심’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집안의 주도권은 여성에게로 넘어왔다. 200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고부 갈등의 양상도 시어머니 우위에서 며느리 우위로 바뀌었다. 2009년 드라마 ‘내조의 여왕’에서 김남주가 ‘할 말 제대로 하는 며느리’의 전형을 보여줬듯이 말이다. 이 드라마에서 ‘시월드’라는 유행어도 탄생했다.


가정 변화 주도한 똑똑한 여성들

최근에는 젊은 부부들이 남녀 모두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사회 전체가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을 추구하는 데서 보듯 가정은 이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사회는 아직 충분히 바뀌지 않았다. ‘이코노미조선’이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남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여성 직장인의 83.6%가 승진 기회에서 여성이 불리하다고 답했다. 취업 기회에 대해서는 76.8%가 여성에게 불리하다고 했다. 취업 때 면접자도 남성 위주이며 인사 평가, 승진 기준 등에도 남성 중심적 문화가 반영돼 있다.

정부 지원과 제도 역시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미흡하다. 육아는 여전히 일하는 여성에게 큰 부담이다. 여성이 맘 놓고 일하면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여건까지는 머나먼 길이다. 구미영 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급여를 적게 받더라도 육아기 근로시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하고 출산·육아로 빠지는 시간을 메우기 위한 대체인력을 정부가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위급에서 여성 비율이 낮은 것도 큰 문제다. 지금은 전체 노동자 대비 여성 비율은 40% 수준인데 과장급 이상 관리자에서 여성 비율은 20%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코노미조선’이 만나본 50대 여성 임원 5명은 여성 관리자 비율이나 여성 임원 비율이 높아지는 데는 “시간이 많은 걸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간이 지나 각 조직 내 여성 인력이 늘어나면 풀이 늘어나 고위급에 여성 승진자도 많아지고, 관리자급 이상에서 여성이 늘어나면 조직 문화도 많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도 조직 생활 초기부터 보다 높은 목표를 가지고 업무에 임할 수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과 워라밸 문화의 확산은 직장인들이 가정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림으로써 ‘일과 가정의 양립’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아직은 일부 기업에 한정돼 있지만 기업들도 변화하고 있다. 풀무원은 2020년까지 여성 임원 30%로 확대를 공표하고, 사단법인 미래포럼과 함께 여성 임원 확대를 위한 ‘30% 회원모임(Club)’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전 계열사에 남성 육아휴직(1개월) 의무화 제도를 도입했고 2022년까지 현재 36명인 여성 임원을 60명으로, 책임급 이상 여성 간부를 14%에서 30%까지 늘릴 계획이다. SK그룹은 일부 계열사에서 격주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했다.

기업들이 이처럼 여성 친화 정책에 나서는 이유는 ‘다양성’이 경영 의사 결정에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여성 임원 증가 등으로 기업 가치가 높아졌다는 여러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가정은 이미 바뀌었고 이제 사회가 바뀌어야 할 차례다. 그 똑똑한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과거에는 가정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앞으로 조직의 미래는 여성 인력의 성장에 달려 있다.

이번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희망이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여성의 육아 부담이 경력 단절로 이어진다는 데 대다수가 공감했고 여성 상사에 대한 거부감도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재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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