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스101의 천세희 총괄이사(왼쪽)는 고지연 대표보다 열아홉살이 많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영어 이름을 부르며 편하게 반말로 대화한다. 천 이사는 클래스101의 ‘멘토’다. / 사진 클래스101
클래스101의 천세희 총괄이사(왼쪽)는 고지연 대표보다 열아홉살이 많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영어 이름을 부르며 편하게 반말로 대화한다. 천 이사는 클래스101의 ‘멘토’다. / 사진 클래스101

2015년 개봉한 영화 ‘인턴’이 현실이라면 어떨까. 영화 ‘인턴’은 시니어 인턴으로 벤처 기업에 취업한 70세 남성 벤(로버트 드 니로)이 30세 여성 CEO 줄스(앤 해서웨이)를 돕는 내용이다. 줄스는 유능하지만 아직 어린 탓에 생활과 업무 등 모든 영역에서 허둥지둥 쫓기며 산다. 그런 줄스에게 벤은 연륜이 묻어나오는 조언을 건넨다.

한국 스타트업 업계에는 여성 시니어 인턴이 존재한다. 1994년생 고지연(25) 클래스101 대표를 돕는 1994학번 천세희(44) 클래스101 총괄 이사가 그 주인공이다. 클래스101은 수강생들에게 취미 강의 동영상을 보여주고, 준비물을 제공하는 온라인 취미 플랫폼이다. 천 이사는 20년간 ‘네이버’ ‘맥도날드’ ‘우아한형제들’ 등 이름만 대면 아는 기업들을 두루 거쳤다. 이후 쏟아지는 조언 요청에 벤처 기업 컨설팅 회사 ‘더자람’을 창업했다. 클래스101과의 인연도 천 이사가 더자람 대표로서 이 회사를 컨설팅하다가 시작됐다. 천 이사는 지난 4월 첫 컨설팅 의뢰를 받았고, 이후 클래스101의 가능성을 보고 6월 중순 이 회사로 적을 옮겼다.

천 이사는 이곳에서 ‘멘턴’을 자처하고 있다. 멘턴은 ‘멘토(mentor)’와 ‘인턴(intern)’의 합성어다. 그는 멘토 같은 인턴으로 부서에 국한되지 않고 경영 전반에 조언을 건넨다. 결정 권한은 모두 대표에게 있다. 천 이사는 딸만큼 어린 동료 직원들에게 답을 정해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알려준다. 이 회사의 직원은 서로를 영어 이름으로 부르면서 반말을 쓴다. 천 이사도 예외는 아니다.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대 출생) 창업가와 연륜 있는 전직 창업가의 수평적 연대다.

그간 직장 내 여성들의 관계를 두고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성)’라는 비아냥 섞인 은어가 있었다.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모이면 서로를 돕기보다는 서로를 견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 이사는 ‘여적여’라는 표현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자신은 오히려 ‘여돕여(여성은 여성이 돕는다는 은어)’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40대 선배 창업가로서 ‘남성보다 남성 같은 여성 선배’가 아닌, ‘언니’처럼 20‧30 여성 창업가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취지에서다.

이처럼 경력이 많은 여성이 후배 여성들을 끌어주는 사례가 늘고 있다. ‘워킹 우먼(working woman)’들의 연대다. 벤처캐피털 회사 옐로우독의 제현주(42) 대표는 지난해 12월 민간 자본 100%로 구성된 여성 창업가 전용 펀드를 출시했다. 당시 여성 창업가 선배들도 펀드 조성에 동참했다. 제 대표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벤처 투자 업계가 정보가 쉽게 공개되는 곳이 아니다 보니 상대적으로 소수인 여성들은 네트워크 진입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여성 전용 커뮤니티 ‘헤이조이스’의 등장

지난해 9월에는 여성 전용 커뮤니티 ‘헤이조이스’가 문을 열었다. 헤이조이스는 회원제로 운영된다. 3개월 회원과 연간 회원을 받는다. 회원들이 오랜 기간 커뮤니티를 찾도록 하기 위해서다. 현재까지 300명 이상의 회원이 등록했고, 이 중 200명이 연간 회원이다. 지난 5월 기준, 기간이 만료된 3개월 회원의 55%가 다시 회원으로 등록했다. 이 중 35%는 연간 회원으로 등급을 높였다.

헤이조이스의 회원들은 함께 △연사 강연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3개월 단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취미를 공유하는 모임을 갖는다. 업무 노하우, 커리어 설계, 라이프 스타일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회원들의 나이와 직업군은 다양하다. 경력 3년 미만의 신입사원부터 25년 이상의 대기업 임원과 창업가를 아우르는 여성들이 커뮤니티 헤이조이스에 가입했다. 유통, IT, 교육, 금융 등 출신 업종도 다양하다. 양향자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과 JTBC ‘마녀사냥’에 출연했던 곽정은 작가도 이곳 회원이다.

일하는 여성들의 가장 큰 고민은 커리어의 지속 가능성이다. 헤이조이스는 이 불안감을 ‘여성 간의 연대’로 해소한다. 일하는 여성들이 한데 모여 정보와 경험을 공유한다. 직장 내 멘토링과 달리 직책에 얽매이지 않는다. 업무상 연관될 일이 없으니 고연차 여성이 저연차 여성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구조가 아니다. 대기업 상무도 이곳에선 ‘ㅇㅇ님’으로 불린다. 고연차 여성도 밀레니얼 세대 후배들의 창의력과 열린 사고를 배우겠다는 자세로 모임에 나온다.

헤이조이스를 기획한 이나리(50) 대표는 동아일보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제일기획 상무를 거친 직장 경력 20년의 커리어 우먼이다. 그는 세상이 변했는데도 여성 후배들이 여전히 편견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창업을 결심했다.

헤이조이스에서는 남성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여성들이 자신의 고충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대표는 “남성이 섞여 있는 그룹에서는 여성의 고충을 이야기하면 오해가 생길까봐 지레 걱정하는 일이 잦다”면서 “여성들끼리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어서 흔히 말하는 ‘간보기’ 없이 요점을 바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헤이조이스가 주목받으면서 여성 전용 커뮤니티가 속속 생기고 있다. 지난 5월 문을 연 ‘빌라선샤인’은 일하는 밀레니얼 세대 여성 타깃의 커뮤니티다. 3개월 시즌제로 운영되는데, 지난 5월에 모집한 시즌1 회원은 82명이다. 이곳에서도 △개인 커리어 기획 △고민거리 토의 △취미나 기술 습득 등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이 이뤄진다. 변호사, 노무사 등 전문가의 컨설팅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빌라선샤인을 기획한 홍진아(36) 대표는 “직장에 다닐 때 롤 모델로 삼을 여성 선배가 별로 없었다”면서 “‘만년 매니저’로 남지는 않을지, 경력을 어떻게 쌓아야 할지 막막했다”고 했다. 그는 “또래 여성들끼리 모여 이런 문제를 함께 해결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plus point

‘남성화된 여성’ 상사의 악습 대물림
술자리 강요하고 애 키우는 티 내지 말라 압박

이민아 기자

지난해 한 대기업 여성 임원이 부하 여직원들을 사내 남성 상급자와의 회식에 동석시켰다가 논란이 불거지자 사표를 냈다. 당시 회식에 동석했다가 이후 퇴사한 여직원이 해당 여성 임원이 자신을 포함한 부서 여직원들에게 남성 상사와의 회식에 참석을 강요한 사실을 퇴사 과정에서 진술했다. 이 여직원은 해당 여성 임원이 남성 임원들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노래방에서 이들과 춤을 추도록 강요했다고도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현재 임원이 된 여성들 가운데 ‘남성화된 여성’이 적지 않다. ‘그녀의 창업을 응원해’의 저자 정민경씨는 남성화된 여성을 “의도적으로 남성에 가깝게 행동하며 자신을 남성의 반열에 놓고, 다른 여성과 차별화된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여성”이라고 설명했다. 여성 임원이 조직에서 성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성 중심 문화에 동조해야 했고, 이에 적응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남성처럼 사고하게 되면서 ‘남성화’됐다는 것이다.

남성화된 여성 임원은 자신이 겪었던 남성 중심 조직 문화를 그대로 흡수해 후배 여성들에게 되풀이한다. 여성의 특성을 지우고, 남성처럼 굴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커뮤니티 ‘헤이조이스’의 이나리 대표는 “남성 중심 조직에 지나치게 적응한 여성들은 여성 후배들에게 ‘남들보다 20% 더 일해라’ ‘아이 키우는 티 내지 마라’ 등의 조언을 건네는 것이 일상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이제는 여성 선배가 여성 후배에게 ‘독기’를 품어야 성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과 삶의 조화를 구축하는 노하우를 알려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민아·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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