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경영을 하는 대표적 CEO.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구자열 LS그룹 회장, 정양호 KEIT 원장, 정몽규 HDC 회장. 사진 연합뉴스
독서 경영을 하는 대표적 CEO.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구자열 LS그룹 회장, 정양호 KEIT 원장, 정몽규 HDC 회장. 사진 연합뉴스

대구 동구 혁신도시 안에 있는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이곳은 정부가 국내 제조업체에 연구·개발(R&D) 출연금을 지원할 때 R&D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산업통상자원부(이하 산업부) 산하 준정부기관이다. 정부가 출연금을 지원해도 될 만한 R&D인지, 기술의 가치를 평가하는 곳이다.

첨단 기술의 미래 가치를 평가하는 이곳 1층 로비에 7월 11일 북카페가 생겼다. 원래 단순히 음료만 팔던 카페가 있던 131㎡(약 39평) 규모의 공간을 400여 권의 책을 모은 북카페로 바꾼 것은 독서광인 정양호 원장의 아이디어였다. 기술을 평가하기 위해선 사유를 깊고 넓게 해야 하기에 직원들에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북카페에는 정 원장과 임직원들이 기증한 책이 빼곡히 꽂혀 있다.

정 원장은 산업부 에너지자원실장과 조달청장(차관급)을 지낸 후 지난 3월부터 KEIT를 이끌고 있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서던일리노이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통 경제관료다. 하지만 독서광이자 파워블로거로 더 유명하다. 2008년부터 인터넷서점 예스24가 운영하는 계정에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1600여 권의 책에 대한 리뷰를 올렸다. 경제 관련 서적뿐 아니라 자기계발, 고전문학, 리더십과 조직문화, 자연과학 등 다양한 종류의 서평을 써서 블로그에 공개했다.

정 원장은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필요한 지식을 얻기도 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기도 하며 자투리 시간을 때우기도 하고, 미지의 세계를 만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고 했다. 정 원장처럼 독서를 통해 다양한 통찰력과 지식을 얻는 독서광 CEO들은 전 산업 분야에 두루 포진해 있다. 책을 경영의 원천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정 원장은 독서 그 자체를 즐기는 경우에 가깝다. 하지만 다독(多讀)의 경영자들 중에는 책에서 얻은 깨달음을 경영 현장에 다양한 방식으로 접목시키는 사람들도 많다.

대표적인 독서광인 정몽규 현대산업개발(HDC) 회장도 이런 경우다. 정 회장은 500~1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경제·경영 전문서적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책들을 ‘벽돌책(벽돌처럼 무겁다는 의미)’이라고 언급했다. 상업적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책이 아닌 저자의 온 정열과 지식을 바쳐 만든 책을 읽으면 “묵직하게 오래 남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경제·경영, 통계 등 정확한 과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쓰인 책을 즐겨 읽는 정 회장은 1999년 HDC현대산업개발 회장에 취임한 후 전사적자원관리시스템(ERP)을 구축해 이를 정보공유시스템(KPS)으로 공유하도록 한 데이터 경영을 도입했다. 영업, 회계, 공사 자재의 재고 물량 등 경영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데이터베이스(DB)로 만들어 전 부서에서 실시간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 시스템이다. 공사 현장에 투입되는 철근의 수와 시멘트 분량까지, 최신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LS그룹의 구자열 회장도 빼놓을 수 없는 독서광이다. 분기별로 2~3권의 책을 골라 임직원들에게 권하고 ‘CEO 추천 올해 필독 도서’ 목록을 만들기도 한다. ‘네이비 실 리더십의 비밀(스티브 존슨·매일경제신문사·2004년)’ ‘대망(야마오카 소하치·동서문화사·1953년)’ ‘렉서스와 올리브나무(토머스 프리드먼·21세기북스·1999년)’ 등이 구 회장의 추천 도서다.

구 회장은 미국의 언론인 토머스 프리드먼의 ‘세계는 평평하다(창해·2006년)’를 읽고 글로벌 경영을 대폭 강화했다.

이 책은 글로벌 시대에 기업이 살아남는 것은 조직원에게 달려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책의 “변화의 주체이자 동력은 개인이다”는 문장에 감명받은 구 회장은 2007년 4월 긴급회의를 소집해 “해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임원 자리를 꿈도 꾸지 말라”며 글로벌 역량을 임원이 되기 위한 핵심 역량으로 규정했고 지금까지 이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독서광 CEO다. 윤 회장은 특히 독서를 직원 평가에 반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 직원에게 매년 6권(업무 관련 2권 포함)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사내 전산망에 올리도록 한다.

그는 저서 ‘인문학이 경영 안으로 들어왔다(프리이코노미북스·2017년)’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하거나 인사 평가를 할 때 인문학을 하나의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며 “기업은 사람의 마음을 얻어 이윤을 내는 것이 작동원리이므로 ‘사람의 무늬(인문)’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학문인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plus point

스타트업 대표들의 책 마케팅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의 저서 ‘책 잘 읽는 방법’(왼쪽)과 장은혜 모루식당 대표의 저서 ‘작은 가게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사진 교보문고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의 저서 ‘책 잘 읽는 방법’(왼쪽)과 장은혜 모루식당 대표의 저서 ‘작은 가게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사진 교보문고

책은 경영의 통찰을 얻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생 기업들이 브랜드를 알리기 위한 마케팅 도구로 사용하거나 신생 기업의 창업자 본인의 이름을 알리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많은 창업자가 책을 내는 이유다.

김봉진 우아한형제들(브랜드명 배달의 민족) 대표는 ‘청년 창업, 8권의 책으로 시작하다(임프레스미디어·2013년)’와 ‘책 잘 읽는 방법(북스톤·2018년)’ 등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청년 창업, 8권의 책으로 시작하다’는 창업을 막 시작했거나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투자자를 만나는 법 등 구체적인 조언을 담고 있다. ‘책 잘 읽는 방법’은 책 읽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책을 효과적으로 읽고, 읽은 내용을 잘 활용하는 법을 알려주는 독서 방법의 안내서다.

그는 출판사 소개 글에 자신을 ‘과시적 독서가’로 표현하기도 했다. “서점에서 과소비를 즐기고 읽은 책이나 감명 깊게 읽은 문구가 있으면 페이스북에 올려 자랑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라는 설명도 덧붙여놨다.

카레 전문점 모루식당의 창업자 장은혜 대표도 7월 ‘작은 가게의 주인이 되었습니다(비타북스·2019년)’를 출간했다. 모루식당은 직장생활을 하다 경력 단절을 겪어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던 장 대표가 2015년 부산 전포동의 33㎡(10평) 남짓 공간에 세운 카레 전문점이다. 모루는 ‘그릇에 가득 담는다’는 뜻의 일본어다. 현재는 서울, 창원 등 전국 8곳에서 모루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모루과자점도 1곳 있다. 장 대표는 이 책에서 모루식당을 열기 위해 체결한 부동산 계약 과정, 인테리어와 메뉴 구성, 물류 확보 방법 등을 알기 쉽게 정리했다.

한동철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무명에 가까운 기업을 브랜드로 정착시키거나 기존 브랜드를 강화하는 데 책 출간이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많은 CEO가 책을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주영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중소·중견기업 CEO의 경우 비용을 줄이고 효과적인 홍보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직접 뉴스거리를 만드는 것”이라며 “책을 쓰는 것도 이런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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