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의 어린 시절 가족사진. 아베 신조(앞줄 가운데)가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 앞줄 맨 오른쪽은 부친 아베 신타로. 사진 일본 총리관저
아베 신조의 어린 시절 가족사진. 아베 신조(앞줄 가운데)가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 앞줄 맨 오른쪽은 부친 아베 신타로. 사진 일본 총리관저

아베 신조(65·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왜 과거사에 민감하게 반응할까. 일본의 교전(交戰)권을 인정하지 않는 평화헌법 9조를 왜 개정하려고 하는 걸까. 이전처럼 전쟁을 일삼던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것일까.

현재의 아베 총리를 이해하려면 그의 가족사를 알아야 한다. 아베 총리는 정치 세습 가문 출신이다. 친조부 아베 간(安倍寛)은 중의원 2선 경험이 있고,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는 외무상을 역임하면서 그를 비서로 기용했다. 특히 그에게 영향을 많이 미친 인물은 태평양전쟁 이후 56·57대 총리직을 맡았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다. 기시 전 총리는 손자 중에서도 아베 총리를 가장 많이 예뻐했다고 알려졌다. 아베 총리가 기시 전 총리의 무릎 위에서 배운 가치관이 지금의 정치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시 전 총리는 태평양전쟁의 전과 후를 모두 경험한 세대다. 그는 일본의 변천 과정을 지켜보면서 일본이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지나치게 내정을 간섭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으로 일본은 독립국이 됐지만 점령 시대의 것이 사람의 사고방식과 제도 등에 남아 있어 이를 일소하지 않으면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아베 총리는 외조부의 생각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아베 총리가 2006년 9월 1차 내각을 시작하면서 내건 구호가 ‘전후 체제로부터 탈각’이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베 총리는 “종전 후 일본을 적시하는 점령군이 만든 틀에 지금까지 속박돼 있다. 이 전후 체제로부터 탈각하지 않으면 진정한 일본의 모습, 즉 아름다운 일본을 돌려놓지 못한다는 것이 내 진의고, 아베 (1차) 내각의 사명이다”고 말한 바 있다.


한순간에 국제 지위 추락한 ‘일본 제국’

기시 전 총리가 전쟁 이전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기시는 1896년 11월 야마구치현(山口県)에서 태어났다. 야마구치현은 메이지 유신의 근원지다. 이곳에 터를 잡은 메이지 지사들이 천황을 중심으로 근대국가를 건설한다는 대의명분을 걸고 1868년 일본사 최후의 막부인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렸다. 이때부터 일본의 영광기라고 불리는 메이지 시대(1868~1912년)가 시작됐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세력을 키워나갔다. 기시 전 총리가 태어나기 직전 1895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그가 소학교를 다니던 1905년에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아베 총리는 “조부는 일청전쟁 직후 메이지 29년(1896년)에 태어났다. 일본이 부국강병의 노선을 달리며 크게 비약하던 영광의 시대가 그의 청춘이었고, 그의 젊은 날 그 자체였다”고 했다.

그러나 연합국을 상대한 태평양전쟁에서 1945년 패전 이후 일본과 기시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당시 기시 전 총리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상공대신을 맡았다. 전쟁 이후 그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쟁 범죄 용의자로 구속수사 받는다. 기시 전 총리가 전범 용의자가 됐듯 일본의 지위도 한순간에 전범국으로 추락했다.

전쟁 이후 일본은 9년간 연합군총사령부의 내정 간섭을 받았다. 총리 기용부터 법 개정까지 연합군총사령부의 손길이 닿았다. ‘천황’이 아닌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교육 원칙을 교육기본법으로 개정한 것도 이때다. 일본의 현행 헌법인 평화헌법은 1946년 연합군총사령부가 작성한 초안을 기반으로 한다. 평화헌법 9조에 따르면 일본은 전쟁을 포기하고, 전력을 보유할 수 없고, 교전권을 인정받지 못한다.

기시 전 총리는 안보를 중시한 인물이었다. 그는 총리직을 맡은 1957년 더글러스 맥아더 2세 주일 미국 대사에게 평화헌법 개정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생각보다 조기 퇴진하면서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의 헌법 개정 절차가 까다로운 탓에 그 후로도 평화헌법은 한 번도 개정 작업을 거친 적이 없다.

외조부의 못다한 과업을 아베 총리가 이어받았다. 그는 1차 내각 총리로 취임한 그해에 “올해는 헌법이 시행된 지 60년이 된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헌법을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를 지금이야말로 명확히 해야 한다”면서 평화헌법 개정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미국을 역이용해 운명 바꾼다

아베 총리가 추구하는 ‘전후 체제로부터 탈각’은 결국 미국이 규정한 체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일종의 반미 체제이지만 아베 총리의 친미 외교는 굳건하다. 이는 기시 전 총리의 외교 방침과 궤를 함께한다.

기시 전 총리는 일본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미국을 역이용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A급 전범 용의자로 도쿄의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됐던 기시 전 총리는 운 좋게도 석방됐다. 기시는 “(당시 일본 총리였던) 요시다 총리의 후임으로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미 공화당 국회의원 사이에서 중요한 화제가 됐다”면서 “여러 후보가 있었지만 그들의 방향성을 믿을 수 없었고 행정적 통치 능력도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 나에게 눈을 돌렸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이후 1957년 일본의 56대 총리직에 오른 기시는 냉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미국과 동맹 관계를 굳혀 국제 사회에서 입지를 다지는 것을 꾀했다. 1960년 기시 전 총리가 일본 내 기지를 미군이 이용해도 된다는 내용으로 ‘미·일 안전보장조약’을 개정한 것이 주요 정책이다.

당시 미·일 안전보장조약 개정에 대한 일본 내 반대 여론은 심했다. 패전 경험이 있는 일본 국민은 일본이 군사 기지화하는 것을 꺼렸다. 야당 사회당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기시 전 총리는 의회에서 조약이 개정된 지 한 달 만에 총리직에서 사퇴해야 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이 기시 전 총리의 손자였던 아베 총리의 대미(對美)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를 보여주는 아베 총리의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美しい国へ)’에 나오는 일화가 유명하다. 고등학생 시절 한 교사가 수업 중에 미·일 안전보장조약을 비판했는데 당시 아베 총리가 “일·미 안전보장조약에는 경제 조항도 있다. 거기에는 양국 간 경제협력 등의 내용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고 되물었다는 것이다.

어제의 적국도 실리를 주는 관계라면 금세 동맹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시점에서 아베 총리에게 미국은 안보적 관점에서 중요한 동맹국이다. 2010년대부터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일본에서 ‘중국 위협론’이 대두됐다. 일본은 1990년부터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침체기를 겪고 이제 막 활기를 되찾은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군사력 증강은 미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경계심을 유발했다. 중국은 2000년부터 2016년까지 국방 예산을 연 10%씩 늘려왔다. 동중국해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 도서 분쟁으로 일본과 중국 간 물리적 충돌의 잠재 가능성도 거론됐다.

일본은 패전 경험으로 국제 사회에서 대추락을 경험했다. 그만큼 국제 사회에서 힘의 논리가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이해했다. 일본이 미·일 안보 동맹을 강화하고 나선 이유다. 아베 정부는 2015년 4월 방미를 계기로 ‘신미·일 방위협력지침’에 합의했다. 2017년 아베 총리는 트럼프와 정상회담에서 센카쿠열도를 미·일 안전보장조약 제5조의 적용 대상이라는 점을 공동 성명에 명시했다.

외조부의 숙원사업이었던 평화헌법 개정도 기반을 닦고 있다. 우선 아베 정부는 지난해 1항(전쟁 포기)과 2항(전력 보유·교전권 인정 불가)을 유지하고, 3항에 자위대 보유를 명기하는 것으로 개정안을 확정했다. 이후에 1~2항도 고치는 것이 아베 정부의 목적이다. 미국은 이를 묵인하는 분위기다.

다만 한국의 과거사 청산 요구는 일본의 취약점이다. 일본은 전범국으로서 반복적으로 ‘사죄’하는 위치가 아니라 군사력을 갖춘 보통 국가로 복귀하고 싶어 한다. 과거사가 주목받을수록 이 과정은 더뎌질 수밖에 없다. 이를 한국의 외교적 공격이라 생각하는 일본 우파 논객도 있다. 후루다 히로시 쓰쿠바대 교수는 2013년 10월 ‘문예춘추’가 주최한 좌담회에서 “일본이 반복해서 중국과 한국이 제기하는 역사 문제에 끌려들어가 사과를 강요당하면 ‘역사를 빼고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plus point

일본 우파 지지 기반 ‘일본회의’

일본회의(日本会議)는 학계·재계·종교계·정계의 우파가 결집한 집단이다. 우파 또는 우익 성향 단체 중 일본 내 최대 영향력을 자랑한다. 산하 조직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에는 아베 신조(65·安倍晋三) 총리를 비롯해 4차 아베 내각 기준 총 20명의 각료 중 15명이 가입돼 있다. 가입 비율이 무려 75%다.

이 단체는 1997년 5월 30일 우파 종교 단체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통합하면서 결성됐다. 두 단체는 결성 당시 모두 메이지 시대로 복귀를 추구했다. 메이지 시대는 1868~1912년 에도 막부 시대 이후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이 전 세계에서 세력을 확장해 나간 시기다. 또 설립 취지에 ‘도쿄 국제군사재판 사관(일본의 전쟁 책임을 인정·단죄한 것을 기반으로 한 전후 사관)이 만연하면서 외국에 대한 비굴한 사과 외교를 불러왔다’고 하는 등 도쿄 재판과 이를 기반으로 한 국제 질서를 부정하고 있으며, 평화헌법 개정을 목표로 한다.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는 고등학교 일본 교과서 ‘신편 일본사’를 편찬했다. 이 교과서는 천황제에 기반한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1890년의 ‘교육칙어’ 전문을 게재하고, 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으로 기술하면서 논란이 됐다. 대동아전쟁은 태평양전쟁의 일본식 표현으로 대동아공영권(일본이 주도하는 서구 세력에서 독립한 아시아 블록)에서 비롯됐다.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전신을 보면 그들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천황제 국가 복원을 꿈꾸는 종교 집단 ‘생장의 집’이 그 전신인데, 이곳 총재는 1973년 “생장의 집이 두세 채쯤 사라지더라도 조국 일본이 본래 모습을 되찾기만 한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일본회의 회원은 약 3만8000명이다. 정회원은 1만엔, 유지회원은 3만엔, 독지회원은 10만엔, 여성회원은 5000엔의 연회비를 낸다. 전원을 정회원으로 단순 계산하면 연간 회비 수입만 3억8000만엔에 이른다. 일본회의는 대외적으로 예산 규모나 내역을 밝히지 않는다.

일본회의는 주요 이슈와 관련해 운동단체를 지원하거나 조직한다. ‘아름다운 일본의 헌법을 만드는 국민 모임’ ‘메이지의 날 추진협의회’ ‘다 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민의 모임’ ‘일본의 건국을 축하하는 모임’ ‘평화안전법제의 조기 성립을 요구하는 국민 포럼’ 등이 그 예다.


plus point

아베의 정치 동지 삼인방

김소희 기자

왼쪽부터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사진 블룸버그
왼쪽부터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사진 블룸버그

아베 신조(65·安倍晋三)는 2006년 9월 26일 일본 제90대 총리에 취임했다. 전후 일본 총리 가운데 가장 젊은 쉰두 살이었다. 하지만 그는 2007년 9월 12일 급작스레 사임한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훗날 그는 ‘궤양성대장염 발병이 사퇴 원인이었다’고 밝혔지만, 근본 이유는 정치 실패였다. 당시 총 5명의 장관이 정치 자금 문제와 실언으로 사임하거나 자살하면서 정권이 공중분해 된 것이다.

이후 와신상담하던 그는 2012년 말 다시 총리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결과적으로는 2006년 취임 때 겪었던 모든 실패가 ‘약’이 됐고, 결과는 현재까지 7년간 장기 집권 성공이다. 2014년 그를 인터뷰했던 한국 학자 노다니엘 아시아모니터리스크 대표는 “아베 총리가 복귀 전까지 ‘적과 동지’를 분명히 파악하고 ‘지킬 사람은 지킨다’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고 했다.

그의 정치 동지는 누구일까. 세 인물로 축약된다. 첫 번째는 전략적 파트너인 아소 다로(79·麻生太郎) 부총리 겸 재무상이다. 그는 아베 총리가 복귀한 2차 내각부터 줄곧 부총리 겸 재무상으로 2인자 자리를 지킨 권력 실세다. 현재 자민당 내부에는 8개 파벌이 있는데, 아베 파벌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파벌이 아소 파벌이다. 아베 파벌과 아소 파벌이 합심하면 자민당을 이끌어가는 데 무리가 없다는 판단이다.

두 번째 인물은 한국 ‘경제 보복’ 조치로 실세로 떠오른 세코 히로시게(56·世耕弘成) 경제산업상이다. 일본 정계 특징인 ‘세습 정치’의 단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일본 통신사 NTT에서 홍보과장으로 근무하다가 1998년 큰아버지인 세코 마사타카 참의원 의원의 지역구를 물려받으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아베 총리와 마찬가지로 정치 엘리트 가문의 3세 정치인이다. 친조부 세코 고이치는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2차 내각에서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일했다.

아베 총리는 1차 내각 때 그를 총리보좌관(홍보 담당)으로 기용했고, 인연이 이어져 지난해 핵심 부처인 경제산업성을 맡게 됐다.

앞선 두 인물과 달리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70·菅義偉)은 정치 세력이나 가문 없이 오로지 능력만으로 아베 총리의 오른팔이 됐다.

그는 2005년 아베 총리와 강경 대북관을 공유하면서 인연을 맺은 후 1차 내각 때부터 아베 총리 옆을 지키고 있다. 1차 내각 때는 총무상을 맡았고, 2차 내각부터 지금까지 관방장관을 역임하고 있다. 관방장관은 한국의 비서실장·국무총리·대변인 역할을 수행하는 요직이다. 노다니엘 대표는 “스가 관방장관은 아베 총리 대신 ‘악역’을 자처하기도 한다”면서 “거두절미하고 직설적으로 발언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라고 했다.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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