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서울 광화문역 인근에서 ‘문재인 퇴출 연대’ 회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김문관 차장
8월 15일 서울 광화문역 인근에서 ‘문재인 퇴출 연대’ 회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김문관 차장

문재인 대통령은 8월 15일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경제를 통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어 “한반도가 통일되면 세계 6위권 경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 5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남북 간 경제협력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되면 우리는 단숨에 일본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있다”라며 “향후 30년간 남북 경협에 따른 경제적 효과가 최소한 170조원에 이를 것이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경제 극일(克日·일본을 이김) 대책으로 평화경제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논란이 많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 한 칼럼에서 “(대통령이 언급한) 170조원이라는 수치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17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개성공단을 비롯한 남북 경협 사업의 부가가치를 추정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 추정에는 경협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난다면, 경협에 영향받는 북한 지역의 생산성도 연평균 5% 증가한다는 가정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생산성이 올라가려면 반드시 북한의 체제 변화, 즉 개혁·개방이 전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하루가 멀다 하고 미사일을 발사하고 청와대를 향해 폭언을 일삼는 등 체제 변화 의지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상황에서 평화경제는 실현 가능성이 작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평화경제가 단숨에 대박이 될 수는 없다는 것도 팩트다. 경제적 이익은 경협 단계를 지나 통합에서 창출된다. 이에 따라 편익 실현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고도 했다.

7월부터 한·일 갈등이 불거진 후 정치권과 정부 관계자 입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극일이 거론된다. 이들은 과거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일본에서 배워 일본을 앞지른 것을 극일의 예로 꼽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 시스템 전반을 바꾸지 않는다면 극일은 요원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IT의 산 증인인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8월 15일 니혼게이자이신문 인터뷰에서 반도체 소재 국산화에 대해 “(반도체 소재 국산화는) 서두른다고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단기간에는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윤 전 부회장은 “일본의 수출 관리 강화 조치로 부품·소재 수출이 막히면 한국 산업은 큰 피해를 보고, 삼성전자도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며 “한국 정부는 수입처 다변화와 국산화로 대일 의존도를 낮춘다고 하지만 정밀화학 분야는 앞서 있는 독일·일본·미국과 역사가 짧은 한국의 격차가 크다”고 말했다.

윤 전 부회장은 반도체 소재 국산화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진단했다. 그는 “노벨상을 받을 만한 과학적 발견은 이론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다”며 “수제품 한두 개를 만드는 데 성공하는 것과 대량생산을 하는 것은 정말 다르다. 연구·개발(R&D)과 제품화 사이에는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는 높은 장벽이 있다”고 전했다. 윤 전 부회장은 “부품·소재의 국산화는 기업이 스스로 판단해 진행해야 한다”며 “정부는 이를 위한 R&D나 설비투자 때 세제 혜택 등을 주기만 하면 기업이 자발적으로 나선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대표적 IT 원로가 쓴소리를 낸 것에 대해 “일본 경제 보복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대처에 문제가 많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최근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 반도체 소재 국산화가 금방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일본 규제 영향을 의도적으로 축소하려는 시각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2013년 포스코경영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일본은 어떻게 소재 강국이 되었나’)도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개별 소재·부품 분야는 2012년 기준 세계 시장 규모가 총 1조엔(약 11조4500억원)으로 완제품 시장보다 작지만, 일본 강소(强小)기업들이 대부분 분야를 석권하고 있다. 예를 들어 LCD노광장치는 니콘, 리튬이온배터리 전해액은 우베흥산, 반도체 포토레지스터는 JSR 등의 일본 기업이 있다.

보고서는 일본 소재 산업이 발달한 이유로 △소재는 공정 경험과 노하우가 성패를 좌우하는 아날로그적 성격이 강해 일본 장인정신 문화에 부합하고 △내수가 강한 일본 특유의 계열 구조상 중·하류(부품, 조립) 부문과 상류(소재) 부문 간 장기적이면서 안정적인 상호의존 관계가 작동하며 △시장을 먼저 선점한 후 역설계(reverse engineering)가 불가능하도록 핵심 원재료의 배합 및 처리 공정을 블랙박스화함으로써 기술적 진입장벽까지 구축한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포스코경영연구소는 보고서에서 “한국이 최단기간에 일본과 소재 분야 기술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국내 대학, 연구기관, 벤처기업과 장기적인 R&D 파트너십을 내실화하고 국산 핵심 소재 의무 사용량 쿼터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7년이 지나도록 달라진 것은 없다.


윤종용(왼쪽) 전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만기 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사진 연합뉴스
윤종용(왼쪽) 전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만기 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사진 연합뉴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정부 R&D 사업

일각에서는 한국 정부의 R&D 지원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정만기(60·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한국자동차산업협회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정부가 R&D에 매년 20조원의 예산을 지원하는데도 여전히 일본에 핵심 소재·부품을의존하는 것은 R&D 투자의 생산성이 낮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그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정 회장은 산업 정책, 통상·무역 업무를 두루 맡았고, 청와대 산업통상자원비서관도 지냈다. 정부 R&D 투자를 수행하는 주무 부처 최고위급 인사가 자성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는 정부가 R&D 지원 방식을 개선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 회장은 “정부 예산 가운데 절반가량은 정부 출연 연구소와 국공립 연구소에 지원된다. 그런데 이들 기관의 연구 과제 중 95%는 정부가 결정한다”라며 “기업에서 위탁받는 과제는 5%에 불과한데 정부 연구과제는 기업 연구과제보다 시장성이 떨어진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 출연 연구소, 국공립 연구소가 수행하는 연구과제를 민간 과제 중심으로 과감히 바꿔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준명(74·전 삼성재팬 사장) 김앤장 고문도 일본 실물경제를 잘 아는 인사다. 그는 1974년 일본 주재원 생활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22년간 살았다. 그는 일본 경제가 어려웠던 2002년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은 아직도 원천기술과 응용력, 철저한 품질 관리 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제조업 강국”이라고 했다.

그는 삼성인력개발원 상담역을 지낸 2006년 서울 성균관대 강연에서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이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도 밝혔다. 그는 “일본인은 냄새 나는 항아리(불쾌한 과거사) 뚜껑을 덮어두려 하는 특징이 있고, 한국인은 항아리를 샅샅이 살펴보고 싹 비우려는 특징이 있다”라며 “이런 차이를 분명히 인식해야 향후 양국 관계 개선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김문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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