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7월 31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 0.25%포인트 인하를 결정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7월 31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 0.25%포인트 인하를 결정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 선진국들이 양적 완화에 마이너스 금리 정책까지 펼 수 있는 이유는 저물가 현상이 보편화하면서 인플레이션 우려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미국이 기준금리를 6%대에서 1.0%까지 인하할 수 있었던 것도 물가가 낮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가가 낮았던 원인은 두 시기가 다르다. 2000년대 초반에는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통해 국제 무역 시장에 편입되면서 값싼 중국 상품이 쏟아져 물가 상승을 억제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경기 침체 상황이 지속하면서 투자와 소비가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각국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을 위해 무절제한 통화 완화 정책을 자제했는데, 이제는 저물가 현상이 지속되면서 ‘물가’가 더 이상 경기 부양을 위한 과감한 통화 완화 정책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닷컴 버블 붕괴 이후 경기 부양 필요성…‘중국 효과’로 저물가

1990년대 후반 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성장했다. 미국 나스닥 시장을 필두로 각국에 상장 회사나 벤처기업들을 거래하는 주식시장이 생겨났다. 매출이나 순익이 변변치 않더라도 성장 가능성이 크다면 주식시장에 상장할 수 있었고 주가가 크게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성공적인 IT 기업들도 있었지만 많은 닷컴 기업은 시간이 지나도 충분한 매출이나 순익을 내지 못했고 시장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닷컴 기업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졌고 투자가 위축되면서 2001년 닷컴 버블 붕괴 사태를 맞았다. 미국 경제 성장률은 2000년 4.1%에서 2001년 1.0%, 2002년 1.7%로 떨어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기준금리를 2000년 말 6.5%에서 2002년 1.75%, 2003년 1.0%로 급격히 인하했다. 이 같은 강력한 통화 완화 정책으로 미국 경제 성장률은 2003년 2.9%, 2004년 3.8%, 2005년 3.5%로 회복했다.

미국 등 세계 각국이 금리를 크게 낮출 수 있었던 이유는 물가가 낮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2001년 2.8%, 2002년 1.6%, 2003년 2.3%였다. 유로존도 2000년대 초반 2.1~2.4%에 머물렀다. 경제 전문가들은 물가가 이렇게 낮았던 요인에 대해 중국이 세계 무역 시장에 편입되면서 값싼 제품을 만들어 각국에 수출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면서 엄청난 저가품을 세계 시장에 쏟아냈다.

문제는 장기간 저금리가 지속하면서 돈이 너무 풀려 세계적으로 주식, 부동산 등 자산시장에 버블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물가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미국 물가 상승률은 2005년 3.4%, 2006년 3.2% 등 3%대를 기록했다. 이에 FRB는 2004년 6월 1.0%였던 기준금리를 2006년 6월 5.25%까지 인상했다. 이후 2008년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FRB는 기준금리를 제로 금리(0~0.25%) 수준까지 인하했다.


돈 풀어도 경제 회복 쉽지 않아…구조적 장기 불황 가능성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유럽, 일본 등은 제로 금리에 양적 완화 정책까지 펼쳤다. 미국은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이후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추고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양적 완화를 했다. 이에 힘입어 미국 경제 성장률은 2009년 -2.5%에서 2010~2014년 1.6~2.5% 수준으로 회복됐다. 이후에도 2016년(1.6%)을 제외하고는 줄곧 2%대를 유지했다.

유럽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제로 금리 정책을 추진했지만 양적 완화 정책은 미국에 비해 늦었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제1·2차 세계대전 때 물가가 1000배나 상승할 정도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초인플레이션)을 경험한 적 있기 때문에 양적 완화에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다. 2011년 유럽 재정위기가 터진 이후에도 경제 회복이 더뎌지자 유럽중앙은행(ECB)은 2015년부터 양적 완화를 시작했다. 일본은 2012년 아베노믹스 이후 양적 완화에 나섰다. 유럽과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 정책까지 도입했다. ECB는 2014년 6월, 일본은 2016년 1월에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실시했다.

과감한 통화 완화 정책이 가능했던 것은 물가가 매우 낮은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 중앙은행의 물가 안정 목표는 2% 수준인데 대부분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미국 물가 상승률은 2015년 0.1%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2012년 이후 연간 기준으로 1%대에서 2%대 초반 수준이었다. 유로존은 2013년 이후 0.2~1.7% 수준에 머물렀다. 일본의 물가 상승률은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후 2014년(2.7%)을 제외하면 지난해까지 -0.1~0.9% 수준에 불과했다.

제로 금리와 양적 완화, 마이너스 금리 정책에도 불구하고 물가가 낮은 원인에 대해 미국 전 재무부 장관이었던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구조적 장기 침체론’으로 설명했다. 생산성이 하락하고 소비 여력이 줄어 세계 경제가 장기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경기가 U 자형으로 반등하지 못하고 L 자형으로 경기 침체 국면이 지속되는 것이다.


plus point

실업률 낮은데 물가 안 오른다

“지난 50년간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의 상관관계가 강했는데, 이제는 약해졌다.”

제롬 파월 미국 FRB 의장이 지난 7월 미 상원 은행위원회에 출석해 한 말이다. 전통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실업률과 물가 상승률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경기 상황이 좋아 실업률이 낮아지고 이후 경기가 과열되면 물가 상승률이 높아진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국 경제학자인 윌리엄 필립스가 주창해서 ‘필립스 곡선’ 이론으로 불린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이런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지난해 실업률도 3.9%로 매우 낮지만, 물가 상승률도 2.4%로 안정됐었다. 세계화로 값싼 제품이 수입되고, 제조업의 해외 이전에 따른 좋은 일자리 감소와 저임금 일자리 증가로 임금이 별로 오르지 않는 등의 영향 때문이었다. 인구 구조 변화로 베이비 부머 세대가 고임금 직업에서 은퇴하는 반면, 저임금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청년들이 노동 시장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점도 한 이유다. 일자리가 많아졌어도 노동자가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고임금 일자리를 더 이상 원치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정재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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