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철도회사 JR동일본이 운영하는 초호화 기차 ‘트와일라잇 익스프레스 미즈카제’. 사진 위키피디아
일본 철도회사 JR동일본이 운영하는 초호화 기차 ‘트와일라잇 익스프레스 미즈카제’. 사진 위키피디아

일본 도쿄의 고급 주택가에서는 심심찮게 특이한 건물 구조를 볼 수 있다. 같은 택지 안에서 분리된 구조로 지어진 건물에 두 가구가 함께 사는 이른바 ‘2세대 주택’이다. 대부분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함께 산다.

일본인 상당수가 젊을 때는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돈을 모아 단독 주택을 짓기를 원한다. 하지만 현재 일본의 20~30대에게는 도쿄 고급 주택지의 땅을 매입하고 건물을 올릴 경제적 여유가 없다. 그래서 부모가 지은 주택을 증축한 2세대 주택을 차선책으로 택하는 이들이 많다. 일본 정부는 아예 저출산 대책으로 지난해부터 3세대 주택 증축 시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들의 부모 세대인 60대 일본인은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유층인 경우가 많다. 지난 6월 일본 내각부가 발표한 ‘2019년도 고령사회백서’에 따르면 일본 60대의 자가주택 비율은 93.3%에 달한다. 29세 이하(32.1%)의 3배에 가까운 수치다. 저축 평균액은 2382만엔(약 2억7200만원), 부채 평균은 205만엔(약 2300만원)이다. 저축액은 29세 이하(397만엔·약 4500만원)의 6배, 부채는 3분의 1 수준이다.

이렇다 보니 일본 고령자들은 어디에서나 초우량 고객 대접을 받는다. 버블 경제를 거친 이들은 음식과 여행, 예술과 고급품에 식견이 있다. 좋은 물건을 알아보고 돈을 쓰는 데 인색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보내는 시간과 체험의 가치다.

특히 이들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고호비’ 문화를 알아야 한다. 고호비(ご褒美)는 한국어의 ‘포상’에 가까운데, 일본에서는 주로 자기에게 주는 보상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일본의 60·70대는 스스로를 칭찬(褒)하며 아름다움(美)을 탐닉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일본 내수시장의 황금알인 액티브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은 이 고호비 문화를 빼놓고 논하기 어렵다. 지나간 세월에 대한 보상인 만큼 그 질에도 엄격하다. 취향도 제각각이다. 특히 현재 일본의 시니어들은 성장 과정에서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겪어왔다. 전쟁 체험을 비켜나갔고 급격한 서양 문물의 유입을 향유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전후(戰後)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형성하는 과정과 함께 성장했다. 때문에 다양한 취향과 가치관을 갖고 있다. 이들의 10대, 20대 시절에는 비틀스(영국 록그룹)가 처음으로 일본을 찾았고 도쿄올림픽이 열렸다.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다.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67)와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77), 꼼 데 가르송의 수석 디자이너 가와쿠보 레이(川久保玲·76)가 이들 세대다. 장인정신에도 길들어 있다.

초밥 한 점, 커피 한 방울에 목숨을 바쳤다. 지금의 젊은이들까지도 열광시키는 문화적 업적을 이뤄낸 세대를 만족시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고령자를 하나의 소비 집단으로 뭉뚱그린 일괄적인 접근은 통하지 않는다. ‘노인들이 뭘 알겠느냐’는 식으로 값만 비싸게 매길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얘기다.


‘마이크로 시장의 집합체’…획일적 접근 안 통해

광고회사 덴쓰는 2000년부터 시니어 프로젝트라는 별도 조직을 설립해 초고령 사회 마케팅을 준비해 왔다. 덴쓰 시니어 프로젝트의 사이토 도오루(斉藤徹) 대표는 “시니어 시장은 다양한 마이크로 시장의 집합체”라고 분석했다. 단순히 나이보다는 생애 주기에 눈높이를 맞추고 제각각의 수요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이라면 정년퇴직, 여성이라면 자녀가 독립하는 시점에 소비 변화가 일어나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욕구가 분출된다. 나름의 개성적인 취미와 생활 가치관을 갖고 있는 고령자를 공략하는 비법은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맞춤제작)에 있다.

성인용 기저귀 하나를 봐도 알 수 있다. ‘이 기저귀는 절대 새지 않습니다’ 따위의 기능적 면모를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사회적 품위와 젊음을 지켜주는 이미지를 내세운다. 생활용품 업체 가오(花王)의 신제품 요실금 패드 ‘릴리프’는 옷의 맵시를 살려주는 로 라이즈(Low Rise‧골반이 드러나는 디자인) 디자인을 채택했다. 제품 광고는 젊은 여성의 생리대 광고와 차이가 거의 없다. 아이돌 그룹 ‘핑크레이디’ 출신의 가수 네모토 미츠요(根本美鶴代)가 61세의 나이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벨리댄스를 춘다.

다양한 제품 수요만큼 액티브 시니어 시장의 분야는 다양하다. 젊은 시절 마음껏 누리지 못했던 여가에 대한 향수도 좋은 촉매가 된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공연 시장이 활성화한 이유다.

폴 매카트니는 비틀스 시절 이래 49년 만인 2015년에 일본 무도관 공연을 재현했다. 10만엔(약 114만원)짜리 초고가 티켓이 일본의 ‘할아버지·할머니’들에게 순식간에 팔렸다. 밥 딜런은 일본에서 100회 이상 공연했다.

철도 여행이 활성화된 일본에서는 고령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여행상품을 내놓는다.

도쿄 등 관동지역과 홋카이도를 잇는 JR동일본은 50세가 넘어야 가입 자격이 주어지는 ‘어른의 휴일 구락부(倶楽部‧클럽의 일본식 표현)’를 운영한다.

남성 65세, 여성 60세 이상은 ‘지팡구(Zipangu‧마르코 폴로가 명명한 일본 국가명)구락부’에 들어갈 수 있다. ‘노인 우대’ 같은 특별 운임이 중점이 아니다. 연회비를 받고 회원만 참가할 수 있는 여유롭고 고급스러운 여행을 제공한다.

규슈지역 노선을 운영하는 JR규슈는 2013년 ‘7성급 호텔’을 재현한 초호화 관광열차 ‘나나쓰보시 인 규슈(九州)’를 선보였다. 후쿠오카 하카타역을 출발해 규슈 각지를 도는 이 열차는 이동이 목적이 아니다. 1박 2일간 달리는 열차 안의 바에서 칵테일과 라이브 연주를 즐기고, 고급 목재와 금장으로 꾸민 객실에서 코스 요리를 맛본다. 30만~45만엔(약 400만~460만원)의 요금에도 신청이 쇄도한다. 당첨 경쟁률은 16 대 1에 달한다.

일본 최초의 본격 ‘크루즈 트레인’ 시대를 연 나나쓰보시가 인기를 얻자 2017년에는 JR동일본과 JR서일본이 각각 호화 열차 ‘트와일라잇 익스프레스 미즈카제(瑞風)’와 ‘트레인 수트 시키시마(四季島)’를 선보였다. 트와일라잇 익스프레스 미즈카제의 열차 1량을 통째로 쓰는 스위트객실 1박 요금은 75만엔(약 857만원)이다. 일본항공(JAL)의 도쿄~뉴욕 노선 비즈니스클래스 항공권과 맞먹는 금액이다.

일본의 전통 미디어는 이미 시니어가 주 소비층이다. TV와 각종 활자매체에 이르기까지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기획이 넘쳐난다. 닛폰TV의 인기 쇼 프로그램 ‘현민(県民)쇼’는 고령 출연자를 중심으로 일본 각 지역의 명물과 자랑거리를 소개한다.

50대 이상 여성이 주 독자층인 월간지 ‘하루메쿠’는 서점판매 없이 정기구독으로만 매달 20만 부가 팔린다. 실질 판매 부수가 시사 월간지인 ‘문예춘추’와 맞먹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시니어 잡지가 일본에는 여행, 미식, 건강 등 장르별로 수십 종에 달한다.

지금의 일본 경제를 지탱하는 액티브 시니어 시장은 의료 기술의 발달에 따른 수명 연장으로 향후 십수 년은 팽창을 거듭할 전망이다. 문제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안정된 임금과 종신고용, 연금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젊은 세대다.

부모가 자녀의 주거를 후원하는 일본식 ‘2세대 주택’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해결책은 거대한 액티브 시니어 시장을 세대 간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재분배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인구 절벽 문제를 답습하는 한국에서 일본의 고령화에 따른 시장 변화를 면밀히 연구해야 하는 이유다.

이진석 ‘오타쿠 진화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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