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안정은(27) 전 롯데호텔 마케터, 뉴발란스, 아식스, 지프, 폴크스바겐 모델 / 김나현(25) ‘카페 소품 이야기 2호점’ 사장 / 류석(32) 연세대 전기전자공학과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연구실 박사과정 / 이진이(25)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 강사, 뉴발란스 러닝 코치, 전 서울시체육회 경영기획부 주임
(왼쪽부터) 안정은(27) 전 롯데호텔 마케터, 뉴발란스, 아식스, 지프, 폴크스바겐 모델
김나현(25) ‘카페 소품 이야기 2호점’ 사장
류석(32) 연세대 전기전자공학과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연구실 박사과정
이진이(25)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 강사, 뉴발란스 러닝 코치, 전 서울시체육회 경영기획부 주임

‘300’.

네 명의 20·30 청년들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총횟수다. 10월 18일 ‘이코노미조선’ 사무실에서 만난 안정은(27), 류석(32), 이진이(25), 김나현(25)씨의 이야기다. 이들이 대회에 처음 출전한 시기는 2013~2016년. 짧은 기간에 각자 평균 75회가량 대회에 나간 셈이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젊은 세대라면 이들을 모를 수 없다. 대회 출전뿐만 아니라 마라톤 관련 행사나 이벤트를 기획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동도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최소 2000여 명에서 최대 6만여 명. 홀로 또는 여럿이 달리는 모습을 SNS에 올린다. 덕분에 러닝계의 연예인, ‘런예인’이라는 호칭도 얻었다.

안정은씨는 스스로를 러닝 전도사라 부른다. 지난해 10월 달리기 이벤트를 기획하는 1인 회사 ‘런더풀’을 차렸다. 100일간 러닝 크루즈 여행도 기획하는가 하면 달리기를 예찬하는 칼럼과 책을 쓴다.

현재는 서울을 달리는 100인의 일반인 러너와 그들이 자주 찾는 코스를 인근 관광지나 맛집과 엮어 소개하는 책 ‘서울 마라톤’을 집필하고 있다.

류석씨는 ‘찍터벌’로 활동하고 있다. 찍터벌은 ‘찍기’와 ‘인터벌(속도를 높였다가 낮추기를 반복하는 훈련 방식)’의 합성어로 마라톤 대회나 훈련에서 속도를 조절하면서 다른 참가자를 찍어주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는 마라톤 대회에서 먼저 완주하고 다시 대회장으로 돌아가 뛰고 있는 러너들을 찍는다. 이후 사진 링크를 전달하면서 응원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진이씨는 전문 육상 선수로 뛰다가 현재 뉴발란스에서 러닝 코치를 하고 있다. 매주 열리는 뉴발란스의 러닝 세션을 기획하고 달리기 정보를 공유하는 유튜브 채널 ‘지니코치’를 운영하기도 한다.

김나현씨는 마라톤뿐만 아니라 트레일러닝(포장된 아스팔트나 트랙이 아닌 자연 속을 달리는 것), 철인3종까지 섭렵했다. 트라이애슬론 전문 브랜드 2XU 훈련팀에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여성 러닝·철인3종 크루 ‘필레이디’에서 활동한다.

젊은 세대는 왜 뛰기 시작했을까. 중장년 남성 중심이던 마라톤 대회가 젊은 세대로 가득 찬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의 경험이 곧 젊은 세대의 러닝 열풍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젊은 세대가 달리는 이유를 이들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달리기 시작했나. 시작한 계기는.

안정은 사회 초년생 때 커리어가 잘 풀리지 않으면서 우울한 시기가 길어졌다. 2016년이었다. 우연히 밖에 나갔는데 눈물이 계속 흐르더라. 눈물을 감추기 위해 달렸다. 5분쯤 지났을까. 500m 달리고 나니까 개운한 생각이 들고 마음속으로 미웠던 사람들이 용서됐다. 그날부터 5분 달리던 것이 6분 되고, 7분 되고 조금씩 늘려나갔다. 요즘엔 매일 달리고 있다.

김나현 나도 2016년이었다. 원래 달리기가 아니라 등산을 좋아했다. 친구 따라 산을 타면서 달리는 트레일러닝 50㎞에 도전했다. 10㎞에 대한 거리 감각도 없을 때라 너무 고생했다. 뭣도 모르고 도전했는데 성취감이 크더라.

류석 솔직하게 말하겠다. 때는 2015년. 여자친구와 생일을 앞두고 헤어졌다. 생일날 할 일이 없더라. ‘서른 살 전에 풀코스 뛰어 봐야지’가 버킷리스트였다. 풀코스를 4시간 안에 들어오면 ‘무언가 이뤄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3시간 59분에 들어왔다. 뭐, 사랑은 안 돌아왔다. 3대 마라톤 한번 뛰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씩 뛰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이진이 나는 조금 다른 경우다. 초등학생 때부터 전문 육상 선수로 활동했다. 다만 풀코스 마라톤은 스무 살 이후 처음 뛰었다. 고등학생 육상 선수들은 몸이 단단하지 않아서 10㎞ 이내로만 뛸 수 있다. 성인이 되고 나선 선수 생활을 관두고 달리기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여전히 달리기를 좋아한다.


모두 20대에 우연히 마라톤을 접했다가 빠져든 경우다. 어떤 부분이 특히 좋았나.

류석 어느 부문이든 단기간에 성취감을 느끼기 어렵다. 짧은 성취를 이루기엔 달리기가 제격이었다.

이진이 나도 성취감이 제일 크다. 건강하게 스트레스 해소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또 아침에 알람이 없어도 일어날 수 있는 체력이 된다.

김나현 자존감과 자신감이 높아지는 느낌을 매번 받는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난관이나 고비가 생길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 100㎞ 뛴 여자야’라는 긍정적인 말을 마음에 새긴다.

안정은 그간 계속해서 나를 타인과 비교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졌다. 달리기를 시작하고선 타인이 아닌 ‘어제의 나’가 비교 대상이다. ‘어제는 5㎞를 뛰었으니, 오늘은 6㎞를 뛰어 볼까’라고 생각한다.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됐다.


젊은 세대가 달리기에 빠진 공통적인 이유가 있을까.

안정은 요즘 같은 시대엔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든 칭찬받기 어렵지 않나. 그런데 마라톤을 한 번 뛰고 나면 들인 시간과 돈에 비해 칭찬을 많이 받는다. 잘했다고 간식도 주고, 물도 주고, 메달도 목에 걸어 주고, 사진도 찍어 주니까. 일요일에 마라톤을 뛰면 그 힘으로 월요병을 견딘다. 좀 더 긴 거리를 달리면 한 달을 버티고, 일 년을 버티는 힘이 된다. 또 달리기는 정직한 운동이다. 노력에 따라 실력이 줄기도, 늘기도 한다. 연줄이나 비싼 장비도 필요 없다. 금수저든 흙수저든 충실하게 연습하는 정도에 따라 결과가 나온다.

이진이·김나현 회사 스트레스를 각자의 취미로 해소하지 않나. 마라톤은 마음가짐과 운동화만 있으면 스트레스 해소가 가능하다. 1년에 500여 개의 대회가 열리므로 접근성도 좋다.

류석 나를 드러내기 쉬운 스포츠인 점도 한몫한다. 축구를 생각해 보라. 내가 골을 세 번 넣어도 기록으로 남길 수 없다. 누구 실력으로 이겼는지 모호한 경우도 많다. 축구는 누가 드리블하는 모습을 찍어 주지도 않고 기록도 따로 없다. 반면 마라톤은 IT 기기로 객관적인 기록을 손쉽게 잴 수 있다. 마라톤 대회를 완주하면 인증서도 나온다. 이 기록을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자랑할 수도 있다.


젊은 세대의 SNS 러닝 문화가 활성화하는 이유기도 하겠다. 기록뿐만 아니라 마라톤을 완주한 모습을 SNS에 올리기도 하던데.

이진이 맞다. 사실 화장하고 달리고, 예쁜 사진을 SNS에 올리면 ‘보여주기식 운동’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도 하나의 문화로 봐줬으면 한다. SNS에 달리는 모습을 올리면 서로에게 동기 부여를 할 수 있다. 나도 잠깐 나태해지더라도 ‘아, 이 친구는 오늘도 뛰고 있네.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달리기는 서로 격려해주는 문화가 있다. 주로 혼자 뛰나, 같이 뛰나?

김나현 카페 사장이다보니 러닝 크루의 활동 시간대에 모임에 잘 나가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데 혼자 뛰면 재미 없더라. 최대한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맞춰서 함께 뛰려고 노력한다.

류석 나는 ‘혼술(혼자 술 마시기)’도 잘 안 한다. 단체 활동을 좋아한다. 국가대표 선수가 아닌 이상 기록이 중요하지 않아서 다 같이 뛰려 한다. 함께 뛰는 사람들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어 커뮤니티도 잘 유지된다. 심지어 해외 마라톤에 나간 친구를 국내에서 응원하기도 한다. 요즘은 GPS 기술이 발달해서 친구들이 어느 구간을 뛰고 있는지 관련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그걸 컴퓨터 화면에 띄워 놓고 우리끼리 술을 마신다. 축구 경기 응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진이 나는 러닝 코치 생활을 하다 보니 혼자 뛰기도 한다. 같이 뛰다 보면 누군가를 가르쳐야 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혼자 뛰면 명상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다.

안정은 달리기 행사를 많이 기획하다 보니 사람들에게 파묻혀 지낼 때가 있다. 같이 뛰는 시간도 있지만 이진이 코치처럼 혼자 있는 시간도 따로 확보한다. 그래야 스트레스를 덜 받고 나를 되돌아보는 짬이 생긴다. 그게 아니면, 내 인생이 아니라 타인의 인생이 되더라.


과거 젊은 세대는 사내 마라톤 동호회에서 상사와 함께 뛰기도 했다. 최근엔 젊은 사람들끼리 뭉치는 경향이 있던데.

김나현 친구들과의 맛집 탐방과 직장 회식은 분위기가 딴판이지 않나. 아무리 같은 음식을 먹어도 회식은 업무의 연장선처럼 느껴진다. 윗분들은 화합의 장을 만들자는 취지지만 사원 입장에선 불편할 때가 있다. 사내 마라톤 동호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히 마라톤 복장은 레깅스와 같이 달라붙는 옷이 대부분이다. 직장 동료들끼리 있으면 서로 민망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그럼 마라톤은 세대 간 화합이 어려운 종목인가.

류석 아니다. 마라톤 대회에선 모든 세대가 어우러진다. 그분들은 북이나 장구를 치시고, 우리는 팡파르를 불고 깃발을 휘날린다. 서로 색다른 응원 문화를 보면서 좋아한다.

안정은 우리도 깃발을 흔들면서 40대부터 80대에 이르는 러너들을 응원한다. 사실 아저씨들과 친구 맺기 어려운데, 마라톤 대회에서 만나면 훨씬 빨리 친구가 되고 자주 만난다.


마라톤 대회에서 친해진 사람이 있나.

김나현 달리기 속도가 저마다 다르지 않나. 모두 흩어지는데 유독 나와 같은 속도인 사람들은 여러 대회에서 자주 만난다. 연령대를 떠나서 엄청 반갑다. ‘나도 힘들지만, 이 사람도 힘들겠지?’ 하면서 뛴다.

안정은 재작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을 뛰면서 만난 아저씨가 있다. 서로 응원하면서 뛴 덕에 개인 기록을 경신했다. 이후 작년 동아일보 서울국제마라톤에서 누가 ‘어이 아가씨! 작년에 춘천에서 봤잖아’라고 부르더라. 그 아저씨였다. 무척 반가웠다. 예전에 한국에서 50㎞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싱가포르 아저씨와도 친해졌다. 이후 싱가포르에서, 제3국에서, 한국에서 대회에 같이 나갔다. 이런 식으로 외국인 친구도 많이 사귄다.

류석 나는 풀코스를 3시간 10분 이내로 뛰는데 그 기록대의 사람들은 대개 고정적이다. 거기 아저씨들은 잘 뛰니까 말도 많이 건다. 젊은 사람들이 오면 옆에 붙어서 ‘어디서 왔니’ 물어본다. 대회 끝나고도 빨리 들어온 사람들은 시간이 남으니까 물 마시면서 계속 이야기한다.


친해진 사람들과 같이 마라톤 대회를 기획하기도 하는지.

김나현 대전 유성시에 사는 오빠와 친해졌는데 함께 ‘런트립(run trip)’을 기획했다. 유성시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면서 그 주변 지역 맛집, 카페, 밥집 돌아다니는 것이다. 올해 3회째를 맞았다. 또 내가 운영하는 카페 인근에서 빨리 오르기 대회를 열기도 했다. 카페가 언덕 위에 있는데, 러닝 친구들이 놀러 와서 훈련하기 좋은 코스라고 대회 열라고 했다. 협찬사를 섭외하고, 참가비 5000원을 받고, 장소와 음료를 제공했다.


앞으로 어떤 대회가 더 생겼으면 좋겠는가. 러닝 문화 발전을 위한 의견을 알려 달라.

안정은 서울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는 장소가 거의 비슷하다. 매번 뛰던 곳만 뛴다. 이용 가능한 도로가 한정돼 있겠지만, 다양한 코스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류석 해외 마라톤은 국내 마라톤에 비해 응원존이 활성화돼 있다. 러닝 크루 말고 일반 시민의 관심도 많다. 한국에서는 대구국제마라톤대회에 자원봉사자나 응원단이 많이 나와서 분위기가 좋다. 다른 대회들이 벤치마킹했으면 좋겠다.

김나현 경기장 트랙에서 10㎞ 경기가 열렸으면 좋겠다. 느린 사람이 먼저 뛰고 전문 육상 선수가 나중에 뛰면 흡사 경마장 같지 않을까. 관중석은 응원존이 되는 것이다. 관중들은 앉아서 맥주를 마시면 좋겠다. 파도타기 응원을 시도해도 재밌겠고. 뛰는 사람도 응원하는 사람도 즐길 수 있다. 주로만 조명을 쏘면 관중석에서 선수 사진을 찍기가 편하겠다.

이진이 전문 선수들과 일반 러너들 사이에 소통하는 장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일반 러너들은 전문 선수들을 보면서 경기력을 배우고, 전문 선수들은 일반 러너들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응원 문화를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 프로 육상 경기엔 응원 문화가 없다. 선수 생활을 관두고 일반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는데 러닝 크루의 응원 문화를 보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와 이럴 수도 있구나’라고 느꼈다. 동료 선수들한테 보여 주고 싶었다.

안정은 나는 반대로 충격받았다. 지금도 선수로 뛰고 있는 여자 마라톤 선수분을 만났는데 ‘달리면서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다’고 말하더라. 정작 나는 그 선수를 보고 용기를 얻고 행복감을 느끼는데, 마음이 아프고 아이러니했다.

김소희 기자, 박채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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