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9월 29일 백악관을 방문한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로널드 레이건(가운데)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마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인생 말년에 치매를 앓았다.
1983년 9월 29일 백악관을 방문한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로널드 레이건(가운데)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마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인생 말년에 치매를 앓았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2010년 5월에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주인공 미자는 ‘아네스의 노래’라는 제법 긴 자작시를 담담하면서도 서글픈 목소리로 읊으며 영화의 끝을 알린다. 손자의 성폭행 연루 소식에 자신의 알츠하이머병 진단까지 전해 들은 미자가 그저 아름답기만 바라던 세상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꾸역꾸역 받아들이며 적은 글이다. 많은 관객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이 영화는 제63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영화 ‘시’가 사람들 입에 다시 오르내린 건 올해 11월, 피아니스트 백건우(73)씨가 아내이자 45년 절친인 배우 윤정희(75)씨의 알츠하이머 투병 사실을 알리면서다. 운명의 장난처럼 윤씨는 자신이 10여 년 전 마지막으로 연기한 미자와 같은 병을 앓고 있다. 미자는 윤씨의 본명(손미자)이기도 하다. 백씨가 “딸이 노력하는데도 (윤씨가) 알아보지 못한다”고 전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치매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스물두 살에 데뷔해 53년간 325편의 영화 주연을 맡은 스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영화배우 로빈 윌리엄스 등도 기억을 훔쳐 가는 이 질병과 맞서 싸워야 했다. 12월 9일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도 알츠하이머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미국과 한국에서 인기를 끈 재미교포 코미디언 자니윤도 현재 치매를 앓고 있다.

대통령도, 기업 총수도, 유명 배우도 피하기 힘들어서일까. 많은 국가에서 치매는 암을 능가하는 ‘공포의 대상’이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만 60~69세 노인의 43%(2014년 기준)가 가장 두려운 질병으로 치매를 꼽았다. 2위 암(33%)과는 10%포인트 차이를 보였다. 65세 이상 고령자의 실제 사망 원인 1위가 암(2018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763.0명 사망)인데도 말이다. 만 50~59세 장년층도 피하고 싶은 질병 1위로 치매(40%)를 골랐다. 이 연령대에서도 암(35%)은 두 번째였다.

50세 미만으로 내려갈수록 치매보다 암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지만, 주목할 부분은 젊은 응답자(만 19~24세)도 5명 중 1명(20%)꼴로 치매 걱정을 더 많이 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우려는 기우(杞憂)가 아니다. ‘2018 대한민국 치매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치매 환자 73만 명 가운데 7만 명이 65세 미만이다. 치매 환자의 약 10%가 ‘젊은 치매’로 분류된다는 의미다. 누군가에게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영화가 아닌 현실이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고령화

문제는 앞으로 치매가 우리 일상에 더 깊숙이 침투할 것이란 사실이다. 국가적·개인적 예방 노력과는 별개로 한국의 인구 고령화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연합(UN)은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7%를 넘으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 사회로 분류한다. 2000년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한국은 불과 17년 만인 2017년 고령 사회로 접어들었다. 24년 걸린 일본보다 7년 빠른 속도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중은 올해 14.9%로 세계 51위다. 그런데 2045년이면 이 비율이 37.0%로 치솟아 일본(36.7%)을 넘어서게 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2067년에는 고령 인구 비중이 46.5%까지 높아져 세계 평균(18.6%)은 물론 2위 대만(38.2%), 3위 일본(38.1%)과도 큰 격차를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평균과 비교해 3배 이상 빠른 한국의 고령화 속도가 만들어낼 풍경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표적 노인성 질환인 치매를 피해 가는 건 불가능하다. 국제알츠하이머병협회(ADI·Alzheimer’s Disease International)에 따르면 2015년 4678만 명이던 전 세계 치매 환자 수는 2018년 5000만 명으로 3년 새 300만 명가량 증가했다. ADI는 치매 환자가 2030년 7500만 명, 2050년 1억3150만 명으로 계속 불어날 것이라고 했다. 국내 치매 환자의 경우 2018년 75만 명에서 2024년 100만 명, 2039년 200만 명, 2050년 302만 명 등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2018년 10.2%로 집계된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유병률(인구 100명당 치매 환자 수)은 2040년 12.7%, 2050년 16.1%로 추정된다.

치매 환자가 늘면 사회·경제적 부담도 커지기 마련이다. 중앙치매센터는 2015년 전 세계 치매 관리비를 8180억달러(약 976조원)로 추산했다. 이는 2010년의 6040억달러(약 721조원)보다 35.4% 증가한 수치이자 네덜란드·인도네시아·터키의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규모다. 치매 관리비는 2030년 2조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국가 치매 관리 비용은 2010년 8조7000억원에서 2050년 134조6000억원으로 15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2016년 기준 국내 치매 환자 한 사람에게 드는 연평균 돌봄 비용은 2054만원이다.

누군가 치매 환자를 돌봐야 한다는 점도 사회적으로 만만치 않은 부담 요소다. 대한치매학회가 2012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가족 중 치매 환자가 발생하면 보호자의 27%가 직장을 퇴사하고, 51%가 노동 시간을 축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호자의 68.5%는 여성이고, 하루에 많게는 13.6시간까지 환자를 돌보는 것으로 조사됐다. 수면 시간을 뺀 일상의 대부분을 환자에게만 매달려 지낸다는 뜻이다. 환자뿐 아니라 주변 사람도 평범했던 삶을 잃는다.


행복한 100세 시대 맞이하려면

전문가들은 기대수명 변화 추이를 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좀 더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통계청은 최근 발표한 ‘2018년 생명표’에서 지난해 출생아의 기대수명을 82.7세로 제시했다. 1970년 62.3세와 비교하면 20.4년이나 더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별을 구분해서 보면 같은 기간 여성의 기대수명은 65.8세에서 85.7세로, 남성은 58.7세에서 79.7세로 각각 늘어났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남성은 1.7년, 여성은 2.4년 길다.

정리하자면, 한국은 OECD 평균을 웃도는 기대수명을 자랑하며 100세 시대로 접근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은 세계에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치매 환자 수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결국 치매 환자와 가족에게 100세 시대는 고통 속에서 버텨야 하는 여명(餘命)만 늘어난, 전혀 행복하지 않은 시간의 연장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이코노미조선’은 이 지점을 주목했다. 치매 정복은 ‘진정한’ 100세 시대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점점 뿌옇게 변해가는 기억력이 자아(自我)를 앗아간 상태에서 맞이하는 100세 시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치매 말고도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난치 질환은 많지만, 우리는 치매부터 테이블 위에 올리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이 치매이기 때문이다.

이번 커버스토리를 위해 ‘이코노미조선’은 치매 정복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정부와 의료계, 기업 관계자들을 두루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치료 현장에서 만난 치매 환자와 가족의 근심도 살폈다.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치매가 어려운 상대인 건 사실이지만 부지런한 예방과 꾸준한 치료·관리로 진행 속도를 크게 늦출 수 있다”라며 포기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또 ‘이코노미조선’은 외국의 치매 관리 우수 사례와 언젠가는 만개할 과학계의 치매 치료제 연구 현황도 다뤘다. 독자 여러분이 알아두면 좋은 치매 예방법과 자가 진단법도 정리했다. 무엇보다 국민 모두 건강하게 100년 사는 그날이 분명 올 것이라는 희망을 지면에 가득히 담았다. 이 기획이 누군가 에게는 경각심을, 누군가에게는 용기를 줬으면 한다.

전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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