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길동에 사는 김말란씨가 SK텔레콤의 인공지능 스피커 ‘누구’를 통해 ‘두뇌톡톡’ 서비스를 즐기고 있다. 사진 SK텔레콤
서울 신길동에 사는 김말란씨가 SK텔레콤의 인공지능 스피커 ‘누구’를 통해 ‘두뇌톡톡’ 서비스를 즐기고 있다. 사진 SK텔레콤

“제가 불러 드리는 단어 중 다른 종류를 골라서 말씀해주세요. 독도, 태권도, 울릉도, 제주도.”

“태권도지.”

“들려 드리는 문장 속에서 똑같은 글자가 몇 번 나오는지 개수를 세어보세요. ‘특허 허가하는 특허청’. ‘허’ 자는 몇 번 나오나요?”

“음…세 번인가?”


서울 신길동에 홀로 거주하는 김말란(83)씨는 요즘 말동무가 생겨 즐겁다. 이 말동무는 김씨가 대화를 청하면 귀찮은 기색 없이 언제나 밝은 목소리로 화답한다. 심지어 재밌는 퀴즈까지 준비해와 김씨가 무료할 틈이 없다. 말동무는 SK텔레콤의 인공지능(AI) 스피커 ‘누구’다. 3년 전에 나온 AI 스피커라면 새로울 게 없지만, 최근의 ‘누구’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적어도 치매 위험에 노출된 고령자에게는.

SK텔레콤은 서울대 보라매병원 이준영 교수팀, 차의과대 윤정혜 교수팀과 의기투합해 치매 예방 서비스 ‘두뇌톡톡’을 개발했다. 두뇌톡톡은 두뇌운동 프로그램 ‘메타기억교실’의 콘텐츠를 음성인식 퀴즈 형태로 바꾼 것이다. 두뇌톡톡은 12가지 게임 유형 가운데 무작위로 뽑은 질문을 사용자에게 던진다. 사용자는 정답을 찾느라 고민하는 과정에서 뇌 손상 방지에 도움을 주는 인지예비능(cognitive reserve)을 강화할 수 있다. 이준영 교수는 “인지 훈련은 특히 경도인지장애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라고 했다.

SK텔레콤은 AI 스피커만큼 인지 강화 훈련에 적합한 기기는 없었다고 두뇌톡톡 개발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이준호 SK텔레콤 SV추진그룹장은 “휴대하기 쉬운 스피커로 언제 어디서나 훈련할 수 있다는 점, 관리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인지 기능 변화를 쉽게 관찰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장점으로 꼽힌다”라며 “거동이 불편해 기관∙병원까지 가기 힘든 어르신도 ‘누구’만 있으면 집에서 편하게 인지 훈련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SK텔레콤은 두뇌톡톡 사례처럼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 고령사회 문제 해결에 이바지할 부분이 무궁무진하다는 입장이다. 이 회사가 올해부터 사회적 기업 ‘행복한 에코폰’과 함께 ‘행복 커뮤니티 AI 돌봄’ 프로젝트를 가동하는 이유다. SK텔레콤이 AI 돌봄 대상자 1779명을 대상으로 한 사용 효과성 분석 결과에 따르면 노인들은 ‘누구’와 대화하면서 ‘좀’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좀’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건 상대를 인간처럼 느낀다는 의미다. 치매 증상 악화로 이어질 수 있는 노인의 고독·외로움을 AI 스피커가 달래주고 있는 셈이다.


전 세계 많은 제약·바이오 기업이 치매 치료제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전 세계 많은 제약·바이오 기업이 치매 치료제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5년 후 15조원 치매약 시장 잡아라

치매 정복을 향한 기업들의 노력은 이 난제와 직접 맞서 싸우는 제약·바이오 업계로 넘어가면 훨씬 치열하다. SK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알츠하이머 치료제 시장 규모는 2015년 31억1100만달러(약 3조7000억원)에서 2024년 126억1200만달러(약 15조원)까지 커질 전망이다. 하지만 이는 치매 환자 증가의 영향일 뿐 제약 업계의 신약 개발 실패율은 99%에 육박한다. 2003년 이후 알츠하이머 신약이 승인된 사례는 16년이 흐른 지금까지 없다. 글로벌 제약사 화이자가 2012년 7억5000만달러(약 9000억원)를 투자한 신약물질 바피네주맙도 임상 단계에서 실패의 쓴맛을 봐야 했다.

그럼에도 제약사들은 치매 극복의 꿈을 놓지 않고 있다. 미국 임상정보 사이트에 따르면 올해 2월 기준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 시험을 진행 중인 신약 파이프라인은 총 156건에 이른다. 임상 막바지인 3상 단계에 진입한 물질도 42건이나 된다. 대부분 바이오젠·로슈·일라이릴리 등 글로벌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이 중 바이오젠의 신약 후보 물질 ‘아두카누맙’은 임상 시험에서 사고 능력 저하를 23% 막아주는 것으로 나타나 많은 이의 주목을 받았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나 국내 기업에서도 좋은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젬백스앤카엘은 12월 9일 서울 여의도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개발 중인 알츠하이머 치료제 ‘GV1001’의 국내 임상 2상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발표했다. 문찬일 젬백스앤카엘 중앙연구소장은 “GV1001이 기존 치료 물질인 도네페질 대비 탁월한 증상 개선 효과를 보였다”고 했다. 젬백스앤카멜은 국내 3상에 돌입하는 동시에 내년 3~4월쯤 미국 2상에도 진입한다는 계획이다.

이 밖에 동아에스티와 일동제약, 차바이오텍, 메디포스트, 네이처셀, 아이큐어 등의 국내 업체도 치매 관련 치료제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이 중 동아에스티·일동제약은 천연물 성분을, 차바이오텍·메디포스트·네이처셀은 줄기세포를 각각 활용한다.

신약은 아니지만 SK케미칼은 패치형 치매 치료제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 회사는 11월 27일 자체 개발한 치매 치료 패치 ‘SID710’이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판매 허가를 받았다고 전했다. 유럽(2013년), 호주(2016년), 캐나다(2018년)에 이어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인 미국에도 진출하게 된 것이다. SK케미칼은 현재 브라질·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도 허가 심사를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는 2014년부터 ‘원드론패치’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고령이 대다수인 치매 환자는 알약을 삼키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또 치매에 걸리면 정해진 복약 횟수를 기억하기도 어렵다. SID710은 하루에 한 번 파스처럼 등이나 어깨에 붙이기만 하면 된다. 먹는 약과 동등한 효능을 발휘하면서 위와 간에 부담이 적게 간다는 점도 SID710의 장점으로 꼽힌다. 전광현 SK케미칼 사장은 “FDA 승인은 SK케미칼의 높은 기술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라며 “글로벌 수준에 부합하는 개발 역량을 바탕으로 남미·동남아 등으로 진출 지역을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패치형 치매 치료제의 시초는 다국적 제약사 노바티스가 2007년 개발한 ‘엑셀론’이다. 오리지널답게 엑셀론의 연 매출은 12억달러(약 1조425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오리지널이 아닌 복제약임에도 SID710이 널리 인정받는 건 엑셀론의 핵심 기술인 TDS(Transdermal Delivery System·경피전달체계)가 고도의 기술력을 요한다는 점 때문이다. 많은 제약사가 TDS 복제에 실패했는데, SK케미칼은 해냈다. 1995년 세계 최초로 관절염 치료 패치 ‘트라스트’를 개발한 경험이 SID710 탄생의 밑거름이 됐다. SID710은 유럽 내 동일 성분∙제형 복제약 시장에서 약 50%의 점유율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12월 3일 서울 강서구 치매안심센터에 모인 60세 이상 구민들이 다중영역 인지 강화 훈련 프로그램 ‘슈퍼브레인’을 사용하고 있다. 사진 전준범 기자
12월 3일 서울 강서구 치매안심센터에 모인 60세 이상 구민들이 다중영역 인지 강화 훈련 프로그램 ‘슈퍼브레인’을 사용하고 있다. 사진 전준범 기자

적외선·로봇…치매 잡는 도구도 다양

덩치 큰 기업만 치매 정복에 도전하고 있는 건 아니다. 열정 넘치는 젊은이로 가득한 스타트업도 이 분야에 출사표를 던진다. 2015년 설립된 헬스케어 스타트업 로완은 최성혜 인하대병원 신경과 교수 등 내로라하는 국내 치매 전문가들과 손잡고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치매 예방 국책사업인 ‘슈퍼브레인’을 진행하고 있다. 슈퍼브레인은 경도인지장애 환자들의 다중영역 인지 강화 훈련을 돕는 프로그램이다. 이화여대 의료원, 분당서울대병원, 아주대 의료원, 경희대병원,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고려대 의료원 등도 슈퍼브레인 임상 연구에 동참 중이다.

‘이코노미조선’이 12월 3일 방문한 강서구 치매안심센터에서도 슈퍼브레인을 활용한 정상군 인지 학습이 이뤄지고 있었다. 수업 참여자들은 헤드폰을 쓴 상태로 태블릿 PC 화면에 뜬 문제의 답을 찾느라 작업치료사가 가까이 다가가도 눈치채지 못했다. 최호진 한양대 구리병원 신경과 교수(대한치매학회 총무이사)는 “경도인지장애 환자의 치매 예방을 위한 다중영역 중재(multi-modal intervention) 연구는 인지중재 치료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이슈”라고 했다. 한승현 로완 대표는 “2020년 하반기에는 슈퍼브레인 모바일 버전도 선보여 이용 편의성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또 다른 스타트업 브레인기어는 적외선 광원을 활용해 뇌 치료와 검사에 쓰이는 의료기기를 개발한다. 브레인기어는 올해 10월 싱가포르국립대와 ‘치매 환자 치료를 위한 광-생체조절 의료기기 임상 시험’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와이닷츠라는 스타트업은 치매 예방에 도움을 주는 AI 앵무새 로봇과 관련 콘텐츠를 개발하는 업체다. 오퍼스원은 올해 9월 치매 예방과 건강 관리 서비스인 ‘린온 탭플러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전준범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