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극장에 스크린이 켜진다. 영화가 상영된다. 영화의 주인공 겸 감독은 ‘당신’이다. 러닝타임은 평균 75년이지만, 영화에 따라 24년 만에 끝날 수도 있고, 99년 동안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크린이 ‘팟’ 하고 꺼진다. 갑작스러운 ‘엔딩’이다. 영화를 보던 관객은 한동안 일어서지 못한다. 당신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서다. 그때 깜깜했던 극장에 주황색 조명이 켜지고, 스크린에는 흰 글자가 줄지어 올라간다. 영화 속에서 당신과 함께 웃고 울었던 사람의 이름이다. 추억을 쌓았던 장소와 이뤄냈던 일들도 자막으로 나타난다. 당신의 ‘엔딩 크레딧(ending credit·영화가 끝난 뒤 나열되는 제작 참여자의 명단)’을 보며 관객은 당신을 회상하고, 마침내 당신의 엔딩을 받아들인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감상평을 나눈다. ‘참 좋은 인생이었어.’

엔딩을 죽음에 비유한다면, 엔딩 크레딧은 당신의 삶을 구성했던 모든 요소를 의미한다. 그런데 러닝타임도 알 수 없었던, 갑자기 끝난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은 누가 작성한 것일까. 당신 자신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다수의 엔딩 크레딧은 고인(古人)의 자녀 혹은 배우자가 작성했다. 장례식을 대행하는 상조회사 직원이 쓰는 경우도 많았다. 그 결과물은 대개 아래와 같은 수준에 그쳤다.

‘김철수(1950~2020), 김길동과 박영희의 아들이었으며 김민수와 김순이의 아버지였음. 착한 아들이었고 자상한 아버지였음.’

당신의 지난 삶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는 바로 당신이다. 어떻게 기억될지를 선택하는 것도 당신의 권리다. 당신의 엔딩 크레딧을 당신이 작성해야 하는 이유다. 즉 당신이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그동안 우리는 엔딩 크레딧을 작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항상 죽음을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죽음은 가장 불가해한 진리다. 매년 전 세계에서 6000만 명이 죽는다. 초침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2명씩 죽는 셈이다. 뉴스는 쉬지 않고 누군가 갖가지 이유로 숨진 소식을 전하고, 당신은 매주 다른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이처럼 죽음은 일상과도 같지만, ‘나의 죽음’만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대부분은 ‘자신이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차라리 애써 무시하는 쪽을 택한다. 평생 죽음을 피하며 살아가다 덜컥 죽는다.

2018년 2월 4일부터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존엄사법)’이 2주년을 맞는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무의미하게 임종 시간만 연장하는 의료 행위를 중단하고,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엔딩의 시기와 방식을 조금이나마 자의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전까진 진통제 과다 투여로 의식이 희미해진 상태에서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버텨야 했다. 2년간 약 53만 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미리 밝혀두는 서류)’를 작성했고, 약 8만 명이 이에 따라 자신이 선택한 엔딩을 맞았다. 존엄한 죽음이다.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의 저자 정현채 전 서울대 소화기내과 교수는 연명의료결정법은 존엄한 죽음의 ‘최소 요건’이라고 말했다. 진정 존엄한 죽음은 미리 죽음을 준비한 사람만이 맞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죽음학 전도사’로 불리며 13년 동안 강단에 선 정 전 교수는 2년 전 암 진단을 받았다. 제주도로 낙향한 그는 평소 지론대로 자신의 죽음을 차분히 준비하고 있다. 본인의 장례식을 어떻게 진행하고, 시신은 어디서 화장하며, 영면을 취할 곳은 어디인지 등을 미리 정해놓는 ‘사전장례의향서’도 쓰고 있다.

‘이코노미조선’이 만난 죽음과 관련된 산업 종사자와 죽음 전문가들은 본인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작성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했다. 자신의 지난 삶을 구성했던 요소를 되돌아보고, 이들에게 충분한 작별 인사를 한다는 의미다. 나아가 자신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미다. 존엄한 죽음을 적극적으로 맞이하는 절차다.

허나 엔딩 크레딧을 작성하려면, 먼저 엔딩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미국 심리학자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 이론’에 따르면, 죽음이 임박한 인간은 부정-분노-협상-우울 단계를 거쳐서야 비로소 죽음을 수용한다. 600회 이상 ‘임종 체험’을 진행해 온 정용문 효원힐링센터장은 “목전에 다가와야만 수용되는 것이 죽음”이라며 “수용의 시기가 너무 늦어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하고 떠나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연명의료결정법이 점차 정착되며 세상을 떠나는 시기와 방식을 스스로 정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엔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점차 옅어지는 추세다.

‘타인의 불행을 이용한 돈벌이’로 천대받던 상조업 등 한국의 죽음 산업도 ‘엔딩 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의전과 허례허식에 치중했던 호화 장례 문화에서 고인이 원하는, 고인에 대한 추모에 집중하는 간소한 장례 문화로 변화하고 있다. 초고령 사회 일본에서는 심각한 고독사 문제로 인해 이미 자신의 죽음을 생전에 준비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이는 임종 체험, 초고령 여행, 신변 정리, 묘지 견학, 생전 장례식 등 ‘슈카쓰(終活·임종 준비 활동)’ 산업으로 이어졌다. 일본 시장조사 업체 야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일본의 슈카쓰 관련 시장 규모는 연간 5조엔(약 54조원)에 이른다.

‘엔딩’ 준비의 하나로 상속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일찍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엄청난 상속세를 물게 되는 현행 세법 체계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또 유산이 자녀 간 다툼의 불씨가 되지 않도록 금융기관에 위탁하는 ‘신탁형 상속’도 주목받고 있다.

엔딩 크레딧을 작성하는 이유 중에는 가족과 친지가 겪어야 할 슬픔을 달래려는 목적도 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시기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엔딩은 남겨진 이들에게 깊은 상실감을 준다.

애도 상담 전문가인 고선규 마인드웍스 대표가 소중한 이를 잃은 사별자를 위해 편지를 썼다. 당신의 엔딩 크레딧을 작성하기 위한 가이드라인도 담았다.

최상현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