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스웨덴 찰머스공대 대학원 공학박사, 부산대 명예공학박사,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 겸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 위원장 / 사진 김흥구 객원기자
신동식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스웨덴 찰머스공대 대학원 공학박사, 부산대 명예공학박사,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 겸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 위원장 / 사진 김흥구 객원기자

“그런데 내가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인터뷰 요청에 전화기 너머 목소리의 주인공은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배 만드는 이야기 듣고 싶다 하니 시간을 내야지.”

일주일 후 만난 여든여덟 백발의 노인은 나이를 뛰어넘는 에너지를 뿜어냈다. 한국 조선 산업의 마스터플랜 입안을 주도한 노장답게 산업의 볼품 없던 시작과 찬란한 역사, 미래를 지치지 않고 이야기했다. 20대 청년의 꿈과 열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2월 18일 서울 논현동에서 신동식(88) 한국해사기술 명예회장을 만났다. 그는 1960년대 초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과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 위원장(장관급)을 맡아 조선업의 틀을 잡은 인물이다. 그가 공직을 떠나 1969년 세운 한국해사기술은 선박 설계·감리를 하는 첫 민간 조선 기술 용역 업체다. 국내 유일 쇄빙선 ‘아라온호’, 심해 탐사선 등 선박 2000여 척 설계에 참여했다. 올해 창업 51주년을 맞은 회사는 장남 신홍섭 대표가 가업을 승계해 이끌고 있다.

신 명예회장은 현역 최고령 조선인(造船人)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6·25전쟁이 나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마주한 광경이 그의 가슴에 꿈을 심어줬다. “부두에서 미군 수송선 하역을 돕는 일을 했어. 수십 척 군함이 우르르 들어와 문이 열리는데 탱크·트럭이 나오고 군인들이 쏟아졌어. 그렇게 큰 배는 처음 봤어. 이거구나 싶었지. 전쟁통 거지 소년이 언젠간 나도 이런 것을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게 된 순간이었어.”

1951년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에 입학했다. 신생 학과인 데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교수도, 교재도 없었다. 18명의 동기는 도쿄대 교과서를 구해 한 단원씩 맡아 서로를 가르쳤다. 졸업해도 전공을 살릴 곳은 없었다. “할 수 없이 여고 물리 선생이 됐지만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뿐이었지. 조선이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어. 친구 몇 명과 세계 대형 조선소에 무작정 편지를 썼지. ‘우리는 한국 청년인데 모형이든 사진이든 괜찮으니 보내 달라’고. 무시당할 줄 알았는데 웬걸, 자료가 엄청나게 많이 왔어.”

더는 포기할 수 없었다. 당시 세계 최고였던 스웨덴 코쿰스 조선소에 편지를 썼다. 선진 조선 기술을 배우고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그는 “연애편지를 쓴 셈”이라며 웃었다. 거짓말처럼 답장이 왔다. 왕복 비행기표와 아파트 렌트비, 월급을 받는 조건이었다.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홍콩, 방콕, 랑군, 파리를 거쳐 도착까지 꼬박 1주일이 걸렸다.

꿈의 나라 스웨덴에서는 새로운 고생길이 열렸다. 어렵게 공부한 그에겐 실습 경험은커녕 이론도 부족했다. 설계 능력이 안 됐다. 일단 고교 졸업생이 가는 직업훈련소로 갔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오후 11시까지 공부와 실습, 시험을 반복했다. “아이고 내가 이 지옥에 왜 왔나 했어. 그걸 견뎌냈어. 언젠가는 내 밑거름이 되리라는 각오로 버텼지.” 신 명예회장은 이를 ‘단조(鍛造)의 세월’로 표현했다. “나중에 내가 논문 쓰고 박사 했지만 진짜 공부는 그때 다 했어. 철판 자르고 용접하고 전선 잘라 파이프 붙이는 거, 완전한 기술자가 된 거지.”


꿈 가진 청년이 견딘 ‘단조의 시간’

설계실에 돌아오니 그제야 도면이 눈에 들어왔다. 부족한 부분도 알게 됐다. “가진 게 없잖아. 돈도, 백도 아무것도 없는데 신용을 얻어야지. 제일 먼저 출근해서 남이 안 하는 일을 도맡았어. 어렵고 지루하다고 꺼리는 일들 말이야.” 컴퓨터가 없던 시절, 수기로 수천 번 계산해야 하는 작업마다 손을 들었다. “밤새워 했어. 시간 지켜 딱딱 갖다 줬지. 신용을 얻었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그제야 필요한 사람이 됐지.”

신 명예회장은 그 이후 선박 설계에서 누구나 선망하던 자리에 오르기까지를 “운이 좋았다”고 표현했다. ‘바다를 지배한 나라’ 영국으로 가고 싶어 영국 선박 설계 회사로 이직했고, 이곳에서 멘토가 돼 준 보스의 추천으로 로이드선급협회 검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계 선박 설계와 건조 과정을 감독하는 기관인데, 이곳 검사관 승인이 있어야 배를 건조하고 운항할 수 있다. 마침 세계 건조 기술 기준이 바뀌는 상황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 조선소를 다니며 대접받던 1961년 무렵, 그는 나라의 부름을 받는다. 알고 지내던 대사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의 측근으로 가면서 점찍어뒀던 그를 부른 것이다. “거절했지. 그런데 한 달 내내 전보가 오는 거야. 한 번은 가봐야겠다 싶었어.” 스물두 살에 떠난 고국 땅을 서른이 돼서야 다시 밟았다. 그러나 그가 목격한 한국 땅은 조선업이 발붙일 틈이 없어 보였다. “일본이 버리고 간 조선소였는데 기계는 녹이 슬고 풀이 허리까지 자라있었지. 처음 한 일이 풀 베는 일이었어. 세계 1위 한국 조선의 시작이 풀 베기였다는 거지. 하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당시 한국은 배를 만들 능력도, 일거리도 없었다. 실망해 미국선급협회(ABS)로 떠난 그를 박 의장이 대통령이 돼 다시 찾았다. 1965년 박 전 대통령을 호텔 방에서 만났다. “삼면이 바다인데 고기를 잡든지 배를 만들든지 해야 할 거 아니냐, 같이 돌아가자 하더라고. 가슴이 벅찼어. 감투를 줘서가 아니야. 내가 역사를 창조하고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아무것도 아닌 젊은이를 앉혀놓고 나라 장래를 의논할 정도면 백년대계를 위해 뭔가 할 의지가 있는 사람이겠구나 하는 감동이었지.”

두 달 뒤 한국에 도착한 그를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자리에 앉혔다. “말이 돼? 난 엔지니어야. 경제 전문가를 앉혀도 모자랄 판에 말이야. 그 길로 집무실에 들어가 따지는데 대통령이 그랬어. 경제 전문가는 고용 증대, 물가·환율 안정 등 좋은 이야기만 하더래. 그런데 굶어 죽어가는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쌀 증산을 위한 비료, 유리·합판, 정유 공장이라는 거야. ‘너는 미국, 영국에서 다 경험해왔지 않냐. 내게 필요한 사람은 나가서 기술 꿔오고 돈 꿔올 사람’이라고 했어. 그때부터 일 년 중 200일 넘게 외국을 다녔어.”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초대형 조선소 건설 계획을 포함한 조선 산업 마스터플랜이다. ‘인구가 증가하면 해상 물량이 늘어나고, 정교한 거대 선박이 필요하다’는 말로 대통령을 설득했다. “모두 비웃었지만, 대통령이 받아들였어. 그게 34년 한국 조선업 1위를 이끈 기초였지.”

올해는 신 명예회장이 조선업에 몸담은 지 꼭 71년이 되는 해다. 아직도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 등 조선 산업을 일으키려는 나라에서 연락이 온다. 3년 전에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인도 조선 산업 시찰도 했다. “시찰을 마치고 그들이 소감을 묻더군. 그래서 답했어. 인도는 인재, 자본, 산업시설 등 1960년대 내가 발버둥 칠 때 못 가져본 것을 다 갖고 있다고. 그런데 내가 가졌던 하나가 없다고 했어. 하겠다는 의지와 애국심 말이야. 지금 세계 1위 한국 조선을 만든 바탕은 정신력과 애국심이 전부야. 나 같은 고집쟁이도 있었고.”

한국 조선업의 대부인 그는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기술력은 세계 최고지만 앞으로 입지는 더 좁아질 거야. 중국의 조선 공학 박사 학위 소지자가 5만~7만 명에 달하는데, 한국은 2000명이 안 돼. 독자 원천 기술을 개발해야만 해. 정부의 의지와 지원도 필요하지. 할 일이 많아. 그런데 이제 나는 많이 늙었어. 의지를 갖고 할 사람이 필요해.” 건강이 좋지 않아 힘에 부친다고 말했지만, 신 명예회장은 최근까지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 두 시간씩 선 채로 강연을 했다. 두 시간 반 동안 꼿꼿하게 앉아 또렷하게 기억을 되살려내는 그에게서 한국 조선 장인의 총기가 번뜩였다.

송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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