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 국립 중앙직업훈련원, 현대자동차, 현대중장비, 현대정공 /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장성택
국립 중앙직업훈련원, 현대자동차, 현대중장비, 현대정공 /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저 장인(丈人) 맞아요. 지난해 딸이 결혼했거든. 하하.”

2월 18일 오전 서울 회현동 BMW코리아 본사. ‘이 시대 장인(匠人)과 만남’이라는 인터뷰 취지를 전하자 장성택(58) BMW코리아 상무가 기다렸다는 듯 ‘아재 개그’를 던졌다. 그가 언어유희에 능하다는 이야길 듣긴 했으나 시작부터 이럴 줄은 몰랐다. 명함을 건네고 자리에 앉자 후속타가 날아왔다. “아, 설마 저를 북한의 그분(2013년 처형된 장성택 전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지칭)과 혼동하시는 건 아니죠?”

입은 연거푸 농담을 쏟아냈지만, 테이블 위 장 상무의 손에는 매사 진지했던 그의 삶이 녹아 있었다. 기름때가 새겨놓은 듯한 굵은 손 주름과 살짝 일그러진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양호한 편에 속해요. 살면서 손톱 빠진 게 최소 10번은 될 겁니다. 공구에 맞거나 기계 사이에 끼여서. 차 만지는 사람은 다 똑같아요.” 자동차 정비 이야기를 시작하자 장 상무의 눈빛이 180도 달라졌다. 평생의 업(業)을 대하는 장인의 마음가짐이 보였다.

장 상무는 전국에 10여 명뿐인 자동차 정비 직종 ‘명장’이다. 수입 차 업계에서는 첫 번째 명장이다. 대한민국 명장은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22개 분야 96개 직종을 대상으로 15년 이상 경력의 산업 현장 종사자 중 최고의 숙련 기술을 보유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영예다. 기술인에게는 가문의 영광으로 통한다.

자동차가 너무 궁금해 트럭 밑에 기어들어 가 낮잠을 즐겼던 소년 장성택. 그런 그가 국내 최고의 자동차 정비 전문가로 인정받기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장 상무와 자동차의 50년 연애사를 따라가 봤다.


어떤 환경에서 자랐나.
“경주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모든 관심이 장남에게 쏠리던 시절이라 어려서부터 많은 일을 스스로 했다. 밥 차려 먹는 건 기본이고 밭농사와 김장도 어릴 때부터 직접 했다.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손재주가 좋은 편이기도 했다. 중학교 올라가면서 중고 자전거를 얻었는데, 그 자전거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면서 놀았다. 망가지면 직접 고쳐서 탔다.”

그 손재주가 자동차 사랑으로 이어졌나.
“소달구지만 보고 살던 어느 날, 동네에 자동차가 돌아다니기 시작하더라. 공사장을 오가는 큰 트럭이었다. 모든 주민이 낯선 괴물에 관심을 보였는데 내가 특히 심했다. 사랑에 빠졌다고 해야 하나. 그 트럭을 얼마나 좋아했냐면, 바퀴에 진흙이 묻어 있으면 입고 있던 바지를 벗어 닦아주곤 했다. 트럭 아래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다가 운전자에게 들켜 혼난 적도 있다. 나중에는 친해져 그 운전자가 조수석에 태워주기도 했다. 트럭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이 좋았다.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차를 본격적으로 접한 건 언제부터인가.
“배를 타던 작은아버지의 권유로 포항수산고(현 포항해양과학고)에 입학했다. 배 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하더라. 그때까지는 자동차를 좋아만 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서 자동차 탐구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꿈이 구체화됐다. 당시 수산고는 고3 2학기 때부터 배 타는 실습을 했는데, 자동차에 꽂혀버린 나는 집 부엌 옆에 달린 작은 방에 칩거하면서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영남대에 합격했지만, 집안 형편을 고려해 국립 중앙직업훈련원(현 폴리텍Ⅱ대학) 내연기관과를 택했다.”

대학 생활은 어땠나.
“입학하던 해(1980년)에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학교가 잠시 문을 닫았다. 자동차를 너무 만지고 싶어 인천 지역 공업사를 무작정 찾아다녔다. 대부분의 공업사 사장이 날 기특하게 여겨 정비 노하우를 알려주더라. 학교로 돌아가서는 코티나·브리샤·포니 등 당시 출시된 차량을 분해·조립하며 실력을 키웠다. 밤에는 선배가 운영하던 자동차 정비소에서 정비 자격증 준비하는 사람들과 공부하고, 주말에는 농촌에서 경운기 고쳐주는 봉사를 했다. 자동차에만 푹 빠져 살았다.”

그런 노력 덕에 현대차에 들어갔나 보다.
“곧바로 간 건 아니다. 군대 다녀온 후 울산중장비직업전문학교 등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86년 현대차 사내 직업 훈련 교사로 입사했다. 당시 자동차 정비 기능사 1급을 땄는데, 그때만 해도 그 자격증 소지자가 경주 전체를 통틀어 3명뿐이었다.”

사내 직업 훈련 교사로 입사했는데, 경력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틈틈이 영어 공부를 했다. 미국에서 목회일 하는 매형과 국제결혼 한 누나의 영향을 받았다. 누나는 항상 영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도 재밌어 열심히 배웠다. 덕분에 영어를 꽤 할 줄 아는 상태로 입사했고, ‘스텔라’ 모델의 수출과 함께 주재원 파견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장 상무는 1987년 사우디아라비아를 시작으로 피지·싱가포르·태국·말레이시아 등 현대차가 진출한 해외 시장 곳곳을 누볐다. 사우디에서는 스텔라의 고속 구간 소음 문제를, 싱가포르에서는 우측 핸들 차량의 클러치 소음 문제를 해결해 판매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주재원 생활을 하는 동안 실적으로 이어진 품질 개선 건은 15건에 이른다. 귀국 후에는 현대중장비로 넘어가 1년가량 일하면서 기술연수센터를 설립했다. 현대정공 정비교육센터 설립에도 참여했다.

BMW와는 어떻게 연이 닿았나.
“1995년 BMW가 한국 지사를 설립하면서 테크니컬 트레이너(기술 교육자)를 찾았다. 현대차 시절 동료의 소개로 면접을 봤는데, 영업 인력에 앞서 기술 교육자부터 뽑는 BMW 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해 3월부터 6월까지 총 세 차례 면접 보고 입사를 확정했다. 마지막 세 번째 면접 때 만난 사람이 김효준 현 BMW코리아 회장이다. 들어와서는 인천에 트레이닝센터를 만들고 직원을 교육했다. 초반 5년 동안은 나 혼자 했다. 지금은 교육자가 20여 명 정도다.”

2014년 8월 영종도에서 문을 연 BMW드라이빙센터가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독일과 미국 단 두 나라에만 있던 BMW드라이빙센터를 중국이나 일본도 아닌 한국에 유치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2006년부터 김 회장을 도와 8년간 끈질기게 본사를 설득해 얻은 성과다. 내가 센터장직을 맡고 있는데, 지금까지 90만 명이 드라이빙센터를 방문했다.”

앞으로 계획이 궁금하다.
“동종 업계 후배들 발전에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주려고 한다. 내가 실수한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후배들이 나를 뛰어넘어야 하는데, 그 기간을 단축하려면 잘했던 것보다는 시행착오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떤 바보 같은 짓을 했고 그래서 얼마나 많은 비용과 시간을 허비했는지, 그런 부분을 알려주고 싶다.”

인터뷰를 끝낸 장 상무가 대뜸 음료수를 내밀며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엔진오일 한 잔 들고 가세요.” 그에게 아재 개그는 자동차만 바라보며 치열하게 달려온 날들에 대한 유쾌한 위로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편의점에서 사 먹으려고 했는데.” 아재 개그로 받아쳤다.

전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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