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 서울 천호동에서 열린 송가인 팬카페 어게인의 정모 현장에서 팬들이 직접 만들어온 굿즈(goods·상품)를 들어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2월 19일 서울 천호동에서 열린 송가인 팬카페 어게인의 정모 현장에서 팬들이 직접 만들어온 굿즈(goods·상품)를 들어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어느 한날 똑같은 시간에 만나 서로에게 끌려버린 맘. 좋아 좋아한다면 죄라도 되나요. 이제 나는 어쩔 수 없네”(송가인 정규 앨범 타이틀곡 ‘가인이어라’ 中)

추위가 한층 누그러든 2월 19일 오후 6시 서울 천호동에 있는 한 식당.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오자 이 약속된 장소에선 경쾌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부터 중년층, 20~30대 젊은층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이 몰려들었다. 서로 얼싸안고 안부를 묻고 반갑다며 얼굴을 쓰다듬고. 거대한 가족 모임을 연상케 했지만, 이곳은 가수 송가인 팬카페 ‘어게인(Again)’의 정모 현장이었다.

어게인은 이날을 위해 식당을 통째로 빌렸다. 송가인을 모델로 기용한 식당이다. 100여 명에 달하는 서인경(서울·인천·경기 지역 모임) 회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정기 행사였다. 식당 벽면에는 큼지막한 송가인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테이블 위 술은 열외 없이 잎새주(모델 송가인)가 놓여 있었다. 식당 한쪽에 설치된 앰프에서는 쉴 새 없이 송가인의 노래가 흘러나와 특별한 안주 없이도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생면부지의 이들은 오로지 송가인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세대를 불문하고 한데 모여 끊임없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식당 입구 쪽 테이블에는 시계, 마우스패드, 달력, 머그잔, 휴대용 배터리, 각질 제거 타월, 헤드밴드, 교통카드까지 송가인 얼굴과 사인이 새겨진 용품이 즐비했다. 모두 팬들이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여 만든 굿즈(goods·상품)였다. 이 굿즈는 정모 행사가 끝나갈 무렵 추첨을 통해 팬들에게 증정됐다.

식사하는 동안에도 회원들은 각자의 스마트폰에서 송가인 노래를 계속 재생하고 있었다. “집에서 내가 아이패드로 24시간 ‘스밍’을 해요. ‘아지톡’에서는 온도를 99도까지 올려서 왕관을 썼고요.” 올해 일흔인 장상석씨(임대업)는 글씨 크기를 최대로 키운 스마트폰을 기자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그는 “지난해 ‘내일은 미스트롯(이하‘미스트롯’)’을 통해 가수님(송가인)을 알게 된 후 30년 넘게 복용해왔던 우울증 약을 끊게 됐는데 요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문제로 공연이 중단돼 너무 힘들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스밍은 음원 스트리밍(streaming) 서비스의 준말이다. 스트리밍 횟수가 많을수록 음원 차트 순위를 올릴 수 있다. 아지톡은 음원 서비스 멜론에서 만든 소통 채널로 가수와 관련한 활동 내용을 많이 올리는 사람에게 왕관을 부여한다. 어게인의 저력은 이 음원 사이트에서 잘 볼 수 있다. 어게인을 통해 스트리밍된 송가인 음원은 3100만 회를 넘었고, 아지톡 채널 순위(활동량)에서 송가인은 방탄소년단(BTS)을 제치고 1위에 이름을 올렸다(2월 23일 기준).

어게인의 전체 회원은 5만4500여 명. 주요 연령층은 40~50대이지만 8세 어린이부터 80세 노인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서울·경기·인천, 대전·세종·충청, 대구·경북, 부산·울산·경남, 광주·전라, 강원, 제주, 해외 등 8개 지역별로 장을 두고 정기적으로 회원 간 교류 행사를 열고 함께 공연을 보러 간다. 체계적인 회칙을 두고 가수에게 피해주는 행동을 한 회원을 징계하기도 한다.


어게인 모임은 송가인이 모델인 잎새주만을 마신다. 2월 19일 정모 행사도 송가인이 모델로 기용된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개최됐다.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어게인 모임은 송가인이 모델인 잎새주만을 마신다. 2월 19일 정모 행사도 송가인이 모델로 기용된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개최됐다.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노래에서 희망을 찾은 인생

이들에게 송가인은 가수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일상의 활력소가 됐다는 사람부터 인생의 희망을 발견한 이들까지 다양하다. 우연한 계기로 덕통사고(교통사고를 당한 듯 갑작스레 뭔가에 매료돼 덕질(좋아하는 분야에 심취하는 일)을 하게 됐다는 뜻)를 당했다는 윤지영(가명·37세 공무원)씨는 “TV를 잘 보지도 않는데 ‘미스트롯’을 우연히 보다가 가수님(송가인)을 보고 완전히 빠져들었다”며 “월급의 반 이상을 콘서트를 보는 데 쓰고 있고,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분위기의 공무원 사회에 트로트의 매력을 전파하고 있다”고 했다.

송윤호 어게인 서인경 회장은 “신앙이 깊은 사람 중에 병이 치유됐다는 얘기가 있지 않나. 가수님을 통해 그런 기적을 본 사람이 적지 않다. 팬 중에 말기 암 환자분이 계시는데 가수님을 알고 나선 무대를 계속 보기 위해 살아야 한다며 강한 회복 의지를 보였고 이분의 건강이 호전돼 병원 측에서 깜짝 놀랐었다”고 했다.

현장에서 만난 이인상(64세·사업)씨는 “전자부품 회사를 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쫄딱 망했고,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며 “설날, 추석에도 쉬지 않고 손이 새까매지도록 아내와 죽어라 일만 해왔는데 드디어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낙이 생긴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가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한 가수가 아닌 희망이다”라고 했다.

어게인은 ‘어른들의 팬덤’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스마트폰 사용 방법을 잘 모르는 장년층의 눈높이에 맞춰 공연 때마다 천막을 치고 스밍 방법을 설명한다. 카페 게시글을 클릭하면 스밍으로 쉽게 연결되도록 링크도 만들어놨다. 한편으로는 조악하고 품질 낮은 굿즈 제작이나 영리 활동을 막기 위해 굿즈 관련 상표권, 저작권을 관리하고 있다. 송가인과 그 팬카페 활동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행위를 막기 위해 고문 변호사를 두고 있다. 송가인의 팬인 변호사가 고문 역할을 자원했다. 어게인은 또 소모임 내 불미스러운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소모임 보고 제도를 만들고 팬카페를 비영리단체로 등록해 후원금을 관리하고 있다. 함께 등산하러 다니며 쓰레기를 줍고, 행사가 끝난 후엔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쓰레기를 치운다. 최근에는 코로나19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해 성금도 모으고 있다. 어른들의 정제된 팬심은 단순히 가수를 소비하는 문화에서 벗어나 가수를 진정 보듬고 아끼며 영속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다.

김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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