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고려대 행정학 학사·석사,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고려대 총장, 현 SK 이사회 의장 / 사진 김흥구 객원기자
염재호
고려대 행정학 학사·석사,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고려대 총장, 현 SK 이사회 의장 / 사진 김흥구 객원기자

5월 1일 서울 종로구 동대문역에서 내려 낙산성곽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15분쯤 걷자 작은 성곽문이 보였고 계단 길을 따라 내려가니 파란 대문의 하얀 집이 있었다. 지난해 2월 고려대 총장직에서 퇴임한 염재호 전 총장의 연구실을 찾았다.

염 전 총장은 문명사의 대전환기를 맞은 21세기의 시대상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가 학교에서 가르치던 학생들이 과거의 이념이 아닌 미래의 시대를 살아가길 원해서다. 저서 ‘개척하는 지성: 21세기 뉴노멀 사회의 도전’이 그 결과물이다.

염 전 총장은 21세기에 나타난 변화상뿐만 아니라 역사의 반복에도 주목한다. 그의 오랜 고민은 ‘포퓰리즘의 부상’이다. 역사적으로 대중의 ‘불안감’을 이용한 포퓰리스트가 등장하면 세계는 위기를 맞는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이 전 세계적 주류 현상이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 전통적 리더와는 다른 모습의 다소 과격하고 선동적인 리더가 집권했다. 마사 누스바움 시카고대 교수는 저서 ‘두려움의 군주제’에서 ‘불안감’을 포퓰리스트 발생의 기원으로 삼았다. 위기가 닥친 시점에 금방이라도 해결책을 내놓을 것만 같은 포퓰리스트가 주목받는다는 것이다. 사회 체제가 변화하면서 기존 전문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불신이 깔려 있다.”

전문가나 지식인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포퓰리스트는 그간 엘리트로 통칭되는 지식인이 이익을 독점했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든다. 문제는 포퓰리스트 또한 사회 문제의 개선책을 세우기보다 지식인을 ‘악의 축’으로 몰아가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다. 위기의 원인을 엘리트에게 돌리는 방식이다.”

위기가 닥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위기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기술 진보가 급격하게 나타나면 산업구조는 변화한다. 이는 소득 양극화와 대량 실업으로 이어져서 사회 전반에 불안감을 퍼뜨린다. 이번 위기는 21세기 초 정보통신 기술 발달로 금융 자본주의가 성행한 결과물이다. 이런 위기는 역사적으로 반복됐다.”

20세기 초에도 대량생산 체제로 산업구조가 변화했고 대규모 실업이 발생했다. 미국과 유럽에선 자국 산업 보호를 명목으로 보호무역주의를 주창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처럼 당시에도 정치 지도자의 어리석은 문제 해결 방식 때문에 세계 경제가 대공황에 빠졌다. 포퓰리즘적 정치 선동으로 문제의 근본 원인을 다른 사회적 이유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한국도 세계적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가.
“한국에서도 청년 실업에 시달리는 20~30대와 은퇴를 앞둔 수도권 50대가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서구권에서는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득세하고 있지만 한국에선 좌파 포퓰리스트가 등장했다. 국가의 역할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것인데, 좌파 포퓰리스트는 점점 유혹에 빠져서 시장을 모두 통제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불안감을 공략한 선심성 정책도 남발한다.”

어떤 부분에서 문제의식을 느끼나.
“주 52시간 근무제도가 대표적이다. 현재 청년들은 기술 발전으로 주 20시간을 근무할 세대다. 리더의 역할은 어차피 도래할 흐름을 과거의 틀로 풀어보려는 조치보다 시대적 문제점의 근본 해결책을 고민해야 한다. 호봉제를 개혁해야 청년 실업과 이른 퇴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같은 단기적 조치에 그쳐선 안 된다. 어차피 비정규직이 일상화하는 산업구조로 변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비정규직으로 살아도 지장 없는 사회 체제를 고민해야 한다.”

그럼에도 총선에선 여당이 이겼다.
“아무도 국가를 위한 비전을 내놓지 않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이 차악을 선택했다고 본다. 그나마 정부와 집권당은 현금성 복지나 주 52시간 근무제도와 같은 단기적인 대책이라도 내놓았다. 보수 정당은 비판만 하고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신 친북, 친중을 무조건 비판만 하는 낡은 프레임에 갇혀 있다. 지금 국민이 갖고 있는 불안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뒤처진 전략이다.”

포퓰리즘은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조치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시민사회 권한 강화와 포퓰리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물론 시민사회의 담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적 야망을 품은 소수가 시민단체를 이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민단체에서 비판적 지도자로 이름을 알린 다음 정치권에 진출하는 잘못된 관행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시민사회가 성숙해지려면.
“한국은 연역적 원칙주의 사고의 틀을 따른다. 모든 문제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조국 사태만 봐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잘못한 부분은 인정하고 용서할 건 용서하면서 적정선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양극단으로 계파가 나뉘어서 갈등이 일어났다. 세상엔 완전한 선인도, 완전한 악인도 없다. 인간은 누구라도 틀릴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너도 맞을 수 있지’라는 태도로 모든 사안을 살펴보고 결론을 내는 귀납적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물론 민주화 이후 이제 겨우 30년인데 쉬운 길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는 정권 초기 공론화위원회를 추진하면서 정책수립과정부터 소통과 토론에 기반한 숙의민주주의를 시도했다.
“당시 오랜 경험과 지식을 축적한 전문가를 배제하고 결론을 내린 것이 패착이라고 본다. 결국 대학 입시 정책 관련 공론화위가 선택한 안은 시행되고 있지 않다. 시민사회는 전문가를 감시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하지만, 의사결정까지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직 연역적 사고방식이 만연한 사회에서 시민사회가 내린 결론이 ‘절대 진리’로 받아들여지면 위험하다.”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자기 확신을 100% 갖기보다, 자신을 80% 믿고 20%는 열어두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양극단으로 사람을 가르기보다 상대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수 있는 시그널을 보내는 리더가 필요하다. 내 식구를 챙기기보다 정말 국가를 위해 비전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이낙연 전 총리는 고도의 정치적 술사인지 모르지만 ‘나 미워하지 마세요,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도 미워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정답은 없습니다’라는 입장을 견지하더라. 그다음 중요한 덕목은 솔직함이다. 지금도 정치권에서 여러 의혹이 제기되는데 인정하는 법이 없다. 과거 힘 있던 사람이 독점적으로 가졌던 정보 권력은 무너졌다. 요즘같이 소셜미디어 발달로 권력의 종말이 나타나는 시기엔 언젠가 모든 사실이 드러난다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그간 ‘헬조선’ 담론이 퍼졌는데 코로나19를 계기로 한국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치안과 의료 체계에 감탄하고 가곤 한다. 이번 코로나19 방역 능력을 통해 한국의 빠른 문제 해결 시스템도 확인했다. 포퓰리스트는 사회적 불안을 강조하며 정치적 이익을 도모한다. 이젠 비전을 제시할 리더가 필요하다.”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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