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의 자산 가치는 올해 6월 29일(현지시각) 기준으로 1610억달러(192조2800억원)에 달한다. 사진 블룸버그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의 자산 가치는 올해 6월 29일(현지시각) 기준으로 1610억달러(192조2800억원)에 달한다. 사진 블룸버그

‘52%’

세계 최고의 기업이 10여 년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확률이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PwC가 지난 5월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2009년 글로벌 ‘톱 100 기업’ 중 올해 4월 말 기준으로 이 목록에 살아남은 기업은 52개사(社)에 불과했다. 세계 경제위기와 지정학적 리스크,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 급변하는 기업 환경으로 글로벌 기업의 생존이 불투명해졌다.

절대적인 ‘부(富)’도 사라졌다. 부의 지도는 시시각각 재편 중이다. 불과 10년 사이에 부의 판도가 뒤바뀌었다. 2010년만 해도 세계 최고의 부자는 멕시코의 카를로스 슬림 텔멕스 텔레콤 회장이었다. 당시 그의 자산 가치는 535억달러(약 64조2300억원)로 추정된다. 빌 게이츠(530억달러·약 63조6300억원)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워런 버핏(470억달러·약 56조4200억원)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등 익숙한 이름이 그 뒤를 이었다.

무케시 암바니(290억달러·약 34조8100억원)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 회장, 락시미 미탈(287억달러·약 34조4500억원) 아르셀로미탈 회장, 로렌스 엘리슨(280억달러·약 33조6100억원) 오라클 최고경영자(CEO), 베르나르 아르노(275억달러·약 33조100억원) LVMH 회장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업체의 수장들이 상위 10위에 포함됐다.

불과 10년이 흐른 올해 세계 최고 부자는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다. 블룸버그 빌리어내어 인덱스에 따르면, 6월 29일(현지시각) 기준으로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의 자산 가치는 1610억달러(192조2800억원)로 추정된다. 2010년 당시 카를로스 슬림 자산의 3배를 웃돌며, 10년 전 자신의 자산보다 10배 넘게 증가했다. 미국 전자상거래 업체인 아마존을 창업하며 ‘될성부른 떡잎’으로 통했지만, 이제는 ‘베조노믹스’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킬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0년 동안 ‘슈퍼 리치(Super Rich) 톱 10’ 지위를 유지한 사람은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베르나르 아르노, 무케시 암바니 정도에 불과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부자인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는 10년 전 이 명단에서 이름조차 찾기 어려웠다. 래리 페이지 구글 공동 창업자와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 창업자 역시 10년 전에는 20위 밖이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2010년부터 올해(6월 29일 기준)까지 10년 넘게 ‘슈퍼 리치 톱 3’ 안에 포함됐다. 사진 블룸버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2010년부터 올해(6월 29일 기준)까지 10년 넘게 ‘슈퍼 리치 톱 3’ 안에 포함됐다. 사진 블룸버그

코로나19로 명암 갈린 테크·제조업

코로나19로 슈퍼 리치의 재편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국가 간 교역이 멈추고 생산과 소비에 치명상을 입으면서 전통적인 제조 산업의 타격이 컸다.

올해 초부터 6월 29일까지 자산 감소폭이 가장 컸던 10명의 부자는 대부분 리테일(소매)이나, 산업재 등 전통 제조업과 연관됐다. 항공주 투자 실패 등으로 198억달러(약 23조7700억원)의 손실을 본 워런 버핏의 뒤를 이어 190억달러(약 22조8100억원)의 자산이 증발한 아만시오 오르테가는 패션 브랜드인 ‘자라’를 보유한 인디텍스의 창업자다. 173억달러(약 20조7700억원)의 손실을 본 베르나르 아르노는 루이비통과 지방시 등의 명품 브랜드가 속한 LVMH의 수장이다. 이 밖에도 카를로스 슬림, 찰스 코크 코크인더스트리 회장 등도 큰 손해를 봤다.

반면 온라인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테크놀로지(이하 테크) 기업은 오히려 이용자가 늘어나며 이득을 봤다. 슈퍼 리치 톱 10 중 테크 기업 수장들의 자산은 올해 초와 비교해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제프 베이조스는 올해 초부터 6월 29일까지 약 6개월간 자산 가치가 무려 464억달러(약 55조7000억원) 늘었다. 중국 전자상거래 업체 핀둬둬의 황정(黃崢) 창업자는 자산가치가 246억달러(약 29조5300억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는 193억달러(약 23조1700억원) 증가했다. 올해 자산 증가 폭이 가장 큰 10명의 부자 중 렌 블라바트닉 워너뮤직 소유주를 제외한 9명이 모두 테크 기업가였다.


김범수 카카오이사회 의장의 자산 가치(6월 19일 기준)는 3조2947억원으로, 국내 주식 부호 6위에 올랐다. 사진 카카오
김범수 카카오이사회 의장의 자산 가치(6월 19일 기준)는 3조2947억원으로, 국내 주식 부호 6위에 올랐다. 사진 카카오

中 경제 둔화에 밀려난 서경배, 서정진은 ‘톱 3’ 등극

부의 재편이 글로벌 시장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한국도 이런 현상이 매우 두드러지게 진행되고 있다. ‘재벌’이라는 단어가 한국어 발음표기(chaebol) 그대로 외국 어학 사전에 등재돼 대기업 중심의 구조가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한국도 부의 재편이 거스를 수 없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2016년만 해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뒤를 이어 국내 주식 부호 2위에 올랐던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은 올해 6월 19일 기준으로 5위까지 밀려났다. 중국 경제가 곤두박질친 영향으로 아모레퍼시픽 주가도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아모레퍼시픽 주가는 2018년 한때 35만원을 돌파했지만, 최근에는 반 토막 수준인 17만원 안팎을 기록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중국 시장 매출 비중이 40%대로 매우 높은 편이다. 서 회장은 아모레퍼시픽 지분 10.72%를 소유하고 있다.

서 회장이 밀려난 사이 그사이를 파고든 사람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이다. 최근 약진이 두드러지는 정보기술(IT)과 바이오 중심 기업의 수장이다. 주식 부호 6위에 등극한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은 한때 현대차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수석부회장 등 현대차 부자(父子)의 지분 가치를 따라잡기도 했다. 재계에선 이를 자동차·조선·철강·석유화학 등 전통 산업과 IT 산업의 지위가 바뀐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했다. 여기에는 산업뿐 아니라 신흥 부자들과 전통의 부자들이 점점 교체될 것이란 의미도 담겼다.

단순히 톱 5에서만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니다. 재계 정보 업체 재벌닷컴에 따르면, 2016년 주식 부호 4위였던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올해 7위로 밀려났고 6위였던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은 12위까지 뒤처졌다.

2016년 주식 부호 ‘톱 20’ 중 아직 이 명단에 포함돼 있는 사람은 이건희, 서경배, 이재용, 정몽구, 최태원, 정의선,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등 12명에 불과하다. 홍석조 BGF리테일 회장과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등은 아예 2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눈여겨볼 만한 점은 6위에 오른 김범수 의장에 이어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이 9위, 방준혁 넷마블 이사회 의장이 10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재벌 출신이 아니라 창업을 통해 기업을 일군 경영자다. 허재명 일진머티리얼즈 사장과 이준호 NHN엔터테인먼트 회장 등은 불과 4년 전만 하더라도 재계에선 낯선 이름이었는데, 주식 부호 톱 20에 이름을 올렸다. 일진머티리얼즈는 전기차 배터리로 사용되는 2차전지의 핵심 소재를 담당하는 업체다.


‘눈 깜짝’ 하면 산업계 트렌드 변화

부의 지형이 재편되는 건 곧 산업계가 재편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른바 ‘뜨는 기업’이 전통적인 제조업에서 테크, 바이오로 바뀌고 있다. 한국거래소를 통해 1995년부터 2020년까지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 시가총액(이하 시총) 20위 기업들을 살펴본 결과, 1995년 유가증권시장에서 시총 1~20위 기업 중 올해 5월 기준으로 톱 20에 든 기업은 삼성전자가 유일했다. 유가증권시장의 경우 1995년부터, 코스닥시장은 1996년부터 관련 데이터가 집계됐는데, 모두 5월 말을 기준으로 자료를 집계했다.

1995년 당시 시총 20위에 포함됐던 한국전력, 포스코, 대우중공업, 한국이동통신, 유공, 조흥·한일은행 등은 인수·합병(M&A) 등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거나 시총 20위 밖으로 밀려났다. 25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 기간에 꾸준히 덩치를 유지한 회사는 드물었다. 산업계 변화가 그만큼 거셌던 셈이다.

코스닥시장은 변화가 더욱 크다. 1996년 당시 시총 20위권 기업들은 현대중공업, 기업은행, 동화은행, 현대산업개발, 동남·대동·평화은행, 쌍용건설, 우방 등 제조업이나 금융업을 영위한 회사였다. 하지만 현재 시총 20위권 기업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제조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셀트리온헬스케어가 시총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뒤를 HLB, 알테오젠, 셀트리온제약, 씨젠, 펄어비스, CJ E&M, 에코프로비엠 등이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 바이오·IT 업체다. 2015년만 하더라도 동서, 산성엘엔에스, SK브로드밴드, 콜마비앤에이치, OCI머티리얼즈, 원익IPS 등 전통의 제조업들이 시총 20위 안에 다수 포진해있었는데, 5년 만에 시총 상위권이 뒤바뀐 셈이다.


plus point

거침없는 신사업에 벤처 투자까지… 달라진 재벌

이제는 재벌이라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를 기존 방식 그대로 경영하진 않는다. 미국과 유럽 등에서 선진 경영학을 배우고, 수많은 기업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재벌 3·4세들은 신사업이나 사업 확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며 회사의 변신을 시도한다.

구광모 LG 회장은 LG그룹을 자동차 전장 사업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LG전자는 오스트리아 차량용 조명 회사 ZKW를 인수했고, LG화학은 미국 자동차용 접착제 회사 유니실을 인수했다. 배터리와 전장 부품, 차량용 디스플레이 등을 중심으로 미래 자동차 사업에 ‘올인’하고 있다. 스마트폰 실패로 기울어져 가는 회사라고 평가받았던 LG그룹에 대한 시장 관계자들의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허창수 GS그룹 명예회장의 장남인 허윤홍 GS건설 신사업 부문 대표는 지난해 말 사장으로 승진하고 나서 인도 태양광 발전, 2차전지 재활용 사업, 모듈러 주택 등의 신사업을 발굴하고 있다. 단순히 해외에 산업 기반 시설을 건설하고, 아파트를 지어 파는 기존의 사업 방식으로는 더는 성장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예 초기 기업을 지원하는 벤처 투자자로 나선 재벌 3·4세도 있다. 될 만한 떡잎을 고르는 안목부터 갖추겠다는 것이다.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의 아들인 정경선 HGI 대표는 서울 성수동에 ‘헤이그라운드’를 세워 관련 사업을 펼치고 있다. 헤이그라운드는 소셜 벤처와 사회적 기업이 모여 불평등이나 일자리, 고용 등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재들이 모인 공유 오피스다.

구본웅 포메이션그룹 대표는 미국에서 스타트업 기업에 투자했던 경험을 살려 벤처캐피털(벤처기업을 발굴해 투자하는 회사)을 운영하고 있다. 구 대표는 구자홍 LS니꼬동제련 회장의 장남이다.


plus point

한국, 자수성가 부자의 ‘진격’

6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제를 공부하는 국회의원 모임에 참석한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오른쪽 첫 번째). 사진 연합뉴스
6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제를 공부하는 국회의원 모임에 참석한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오른쪽 첫 번째). 사진 연합뉴스

한국의 주식 부호 명단에서 최근 두드러지게 달라진 점은 자수성가형 부자들이 늘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선대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은 재벌 2·3세들이 상위권을 독식했다면, IT·바이오 업체 창업으로 성공을 맛본 부자들이 이 자리를 파고들고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영향으로 회사 가치가 크게 불어난 영향이다.

올해 6월 19일 기준으로 주식 부호 3위에 오른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의 지분 가치는 5조7380억원에 이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3조8061억원)과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3조4056억원)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기업 수장들의 자산을 크게 웃돌고 있다. 서 회장은 대우자동차 출신 동료와 셀트리온의 전신인 넥솔을 창업하고 이후 합병을 통해 2002년 셀트리온을 창업했다. 바이오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램시마, 트룩시마, 허쥬마 등 항체의약품 바이오시밀러(복제약) 개발에 성공하며 종합 제약사의 꿈을 이뤘다.

국내 주식 부호 6위에 오른 김범수 카카오이사회 의장(3조2947억원)은 불과 10여 년 만에 한국 대표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인 카카오를 일궜다. 2010년 3월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선보인 이후 카카오페이, 카카오택시, 카카오뱅크 등의 서비스를 내놨다. 카카오는 지난해 자산 총액 10조원을 돌파하며 공정거래위원회 대기업집단(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지정됐다. 순수 IT 기업으로는 최초 사례다.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매출액 3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2조2522억원)과 방준혁 넷마블 이사회 의장(2조149억원) 역시 스스로 기업을 일궈 국내 주식 부호 9위와 10위에 이름을 올린 창업가다. 1997년 설립된 엔씨소프트는 ‘리니지’라는 대표 게임을 통해 매출 2조원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넷마블의 경우 전신인 CJ넷마블 합병 후 중국 텐센트의 투자를 받아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고, 모바일 게임 개발·유통 등을 통해 2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진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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