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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 오후 2시, 전라북도 김제시 새만금간척지 광활시험지에 있는 비닐하우스. 비닐하우스 문을 열자마자 안경에 김이 서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장마가 휩쓸고 간 터라 바깥 온도는 26℃에 불과했지만, 비닐하우스 내부 온도는 40℃에 육박한 탓이다. 529㎡(약 160평) 크기의 비닐하우스 안에는 초록색 모가 흙이 불룩 튀어나온 이랑 사이 푹 파진 고랑마다 심겨 있었다. 흙을 한 손으로 움켜쥐니 백사장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바다를 둘러막고 물을 빼내서 땅을 만든 곳이다 보니 사막과 토양이 유사해서 시험에 적합합니다.” 이충근 국립식량과학원 박사가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실행하기 위한 벼농사법을 현지와 유사한 토양 환경과 온도에서 시도해보기 위한 국내 시험실이다. 이 박사는 지난해 5월부터 이곳에서 UAE에 전달할 벼 재배 기술을 시험했다.

물이 부족한 사막 국가에 적합한 방식을 찾기 위해 일반적으로 밭작물을 파종하는 이랑이 아닌, 물을 머금기 쉬운 고랑에 모를 심었다. 이 박사는 지난 5월 수확에 성공한 한국표 벼 ‘아세미’를 보다 경제적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현지에 알려주기 위해 조만간 UAE를 찾을 예정이다.

UAE는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한국의 1.6배인 95㎏에 육박하는 국가다. 그러나 세계은행(WB)에 따르면 쌀을 포함한 식품 수입 의존도는 90%를 넘는다. 무엇이 UAE가 한국에서 쌀 품종을 받고, 벼 재배 기술을 전수받게 했을까.

UAE를 포함한 중동, 아프리카 등 국가는 10여 년 전부터 불안정한 글로벌 식량 공급망의 위험성을 깨닫고 식량 자급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세계 인구의 급격한 증가, 기후 변화, 도시화로 인한 토양 생산성 감소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2007년 곡물 등 식량 가격이 세계적으로 두 배 가까이 폭등한 탓이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중동 국가는 높은 구매력에도 기초 농산물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2010년에는 세계 최대 밀 생산국인 러시아가 폭염과 가뭄 등으로 밀 생산이 감소해 수출을 금지했으며, 이는 굶주린 시민의 ‘아랍의 봄’ 시위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UAE는 2015년 세계식량안보회담을 개최하고 수단, 파키스탄 등에 농업 부문 해외 투자를 하는 등 식량 자급을 위해 노력해왔다. 2018년에는 한·UAE 정상회담에서 한국에 농업 기술 협력 사업을 요청했으며, 이 사업의 결과 한국 쌀 아세미 수확이 UAE 사막에서 성공적으로 열매를 맺으려 하는 것이다.

쌀 자급률이 사실상 0%에 불과하다고 평가받는 UAE에서 한국이 벼 수확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농업 연구·개발(R&D) 기술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청은 적응 재배 기술을 통해 26개 벼 품종을 UAE 온도·토양과 유사한 시험실에서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 생육하며 6종 이내로 추려냈다. 더운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인공기상동에서 여러 변수를 두며 시험해 확인한 것이다.

또한 양·수분 관리 기술을 통해 UAE 현지에서는 사막이라 유독 높은 알칼리성의 정도 ‘pH 농도’를 중화하며 재배에 성공했다. UAE의 토양은 약 pH8.5로, 벼농사에 최적으로 판단되는 여건인 pH5.5~6.5를 초과했다.

강한 알칼리 때문에 양분을 흡수하지 못해 벼 잎이 노랗게 변하는 황화현상이 일어났으나, 적절한 양의 관개용수를 공급해 pH 농도를 낮춰 벼 재배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이다. 이 박사는 “미국, 중국 등 여러 국가가 UAE에서 쌀 재배를 시도했지만, UAE 정부에서 실질적으로 재배 성공을 인정한 곳은 한국이 최초”라고 강조했다.


국립식량과학원 내 인공기상동에서 UAE 기준 10월(왼쪽)과 1월 말 온도에서 재배 시험 중인 벼. 사진 이소연 기자
국립식량과학원 내 인공기상동에서 UAE 기준 10월(왼쪽)과 1월 말 온도에서 재배 시험 중인 벼. 사진 이소연 기자

코로나19가 키운 식량 안보 위기의식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전 세계 식량 공급망이 교란되면서, 앞으로 UAE처럼 식량 자급을 위해 외부에서 농업 기술을 이식받고자 하는 국가는 더 많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발생으로 주요 곡물 수출국들은 앞서 자국 내 식량 자원 확보를 위해 ‘식량 국경’을 걸어 잠갔다.

세계 최대 쌀 수출국 중 하나인 베트남, 캄보디아 등 다수 국가는 지난 3, 4월 일시적으로 쌀 수출을 전면 금지했고,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인 러시아 역시 모든 곡물 수출을 임시 제한하기도 했다. 현재 수출은 재개된 상태지만, 세계적으로 촘촘히 얽힌 곡물 공급망이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은 각국은 발등에 불이 붙었다. 게다가 코로나19의 위세는 꺾이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중국의 국책 연구기관인 중국 사회과학원은 2025년까지 중국이 1억t이 넘는 곡물 부족 사태에 직면할 것으로 경고했다. 시진핑 국가주석도 8월 11일 “코로나19로 인해 경각심을 갖고 식량 안보 위기의식에 대응해야 한다”며 곡물 안보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했다.

이정란 농촌진흥청 국제기술협력과 박사는 “코로나19로 식량 안보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식품 수출에만 의존하던 아프리카 적도기니 등 국가까지 농촌진흥청에 농업 기술 원조를 요청한 상태”라며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이들은 단순히 곡물을 원조받는 것 이상으로 장기적인 R&D 인프라 구축을 원한다”라고 했다.


전라북도 김제시 새만금간척지 광활시험지 내 비닐하우스 벼 농사 시험 현장. 사진 이소연 기자
전라북도 김제시 새만금간척지 광활시험지 내 비닐하우스 벼 농사 시험 현장. 사진 이소연 기자

‘송곳 위의 균형’ 한국 식량 안보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식량 안보는 잘 유지되고 있을까.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영국의 경제 분석 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한 ‘2019 글로벌 식량안보지수(GFSI)’에서 한국은 74.8점(100점 만점)으로 조사 대상 113개국 중 29위로 나타났다.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해외 각국에서는 ‘식료품 사재기 광풍’이 몰아치며 마트 가판대가 텅 빌 정도였지만, 우리는 식료품을 구매하는 데 거의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간혹 연이은 태풍으로 배춧값이 포기당 1만원까지 올라 ‘금추’가 되거나, 아프리카돼지열병과 같은 가축 감염병 파동으로 육류 가격이 출렁이는 등 일시적인 소요는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먹고사는 문제’에 위기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내실을 들여다보면 우리 식량 안보가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송곳 위의 균형’이다. 쌀을 제외한 대부분의 곡류를 수입에 의존하고, 특히 축산 분야는 해외 기업에서 공급하는 사료 곡물이 끊기면 가축을 굶겨 죽여야 하는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매년 1500만t에 이르는 곡물 수입량 대부분이 자체 수급망이 아닌 해외 민간 기업의 수급망을 통해 유통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밥상이 무사한 것은 국제 곡물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다국적 메이저 기업들이 식량 밸류체인(가치사슬)을 잘 지키고 납기를 맞춰준 덕분이라는 얘기다. 코로나19와 같은 국제적인 위기로 식량 밸류체인이 붕괴한다면, 풍성했던 우리 밥상에 남겨질 것은 과장을 조금 보태 쌀밥과 배추절임 정도뿐일 것이다.

지역 특산품으로 유명한 청양고추, 무안양파도 실은 ‘우리 농산물’이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흥농종묘·중앙종묘 등 국내 주요 종자 기업이 외국 자본에 넘어간 뒤부터 ‘우리 씨앗’은 ‘남의 씨앗’이 됐다. 업계에 따르면, 매운 고추 시장에서 수입산 종자 점유율은 70%에 달하고, 양파의 경우에는 일본산 종자가 80%를 넘는다. 2019년 국내 종자 수입액은 1억2500만달러(약 1483억원)에 달했다. 비닐하우스와 유리온실 등 농업 생산 설비도 핵심 부품은 수입산 의존도가 높다. 지난해 일본 수출 규제로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취약점을 드러낸 국내 반도체 산업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은 상황이다.


전라북도 김제시 새만금간척지 광활시험지 내 비닐하우스의 모래 같은 토양. 사진 이소연 기자
전라북도 김제시 새만금간척지 광활시험지 내 비닐하우스의 모래 같은 토양. 사진 이소연 기자

식량 산업 자생력 제고하는 정책 펼쳐야

일각에서는 “지금이라도 식량 자급률을 높이고, 농업에 대한 보호와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이코노미조선’이 만난 전문가들은 “그동안 식량 안보를 명목으로 강력한 농업 보호 정책을 유지해온 것이 오히려 국내 식량 산업 경쟁력을 퇴보시키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고 쓴소리를 했다. 정부가 쌀 직불제, 농산물 수매 등으로 농업 소득 보장 정책을 펼친 것이 고령 농업인에게 은퇴하지 않을 동기를 제공했고, 이는 농촌이 영세·고령 농가 위주로 정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농업을 ‘산업이 아닌 생업’으로 간주하는 정책은 기업의 진입 유인을 떨어뜨려 시장 성장과 기술 혁신을 저해했다. 외환위기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빼앗긴 종자를 되찾지 못한 이유도, 정부가 농민 소득을 위해 종잣값을 낮게 유지한 탓에 종자 시장의 매력도 자체가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된 우리 농업이 1차 산업에 머물러 있는 사이, 우물 밖에선 전 세계가 농업에 첨단기술을 더해 ‘4차 농업 혁명’을 향해 질주했다.

식량 자급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여건에서 팬데믹이 글로벌 식량 밸류체인을 흔드는 상황이다. 식량의 미래를 위해 ‘식량 산업 자생력’을 제고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우리가 직접 해외 식량을 거래해 이윤을 남기는 사업을 해야 하고, 우리 종자를 수출해 ‘한국인의 밥상’이 세계 곳곳의 농지에서 자라나게 해야 한다는 얘기다. 농촌진흥청의 UAE 아세미 수출 사례처럼, 식량이 아닌 식량 솔루션을 사고파는 시대가 코앞까지 왔다. 시대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자가당착에 빠진 우리 농업을 우물 안에서 건져내, 첨단기술을 적극 적용하고 어느 나라에서나 탐낼 ‘모범 사례’로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다.


plus point

[Interview] 김상남 국립식량과학원장
“UAE 벼농사법 수출, 인프라 구축 등 경제 효과 커”

완주(전북)=이소연 기자

김상남 서울대 농업교육학 학·석사, 전 농촌진흥청 대변인
김상남
서울대 농업교육학 학·석사, 전 농촌진흥청 대변인

“한국의 농업 기술력을 세계로 수출하고 싶다.”
김상남 국립식량과학원장은 8월 11일 전라북도 완주군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에서 ‘이코노미조선’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김 원장은 이어 “최근 아랍에미리트(UAE) 벼농사법 실증 사례를 통해 한국의 농업 기술과 종자의 우수성이 입증된 만큼, 더 많은 나라에서 한국 농업을 찾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UAE 등 해외 협력의 예상 경제 효과는.
“물론 수출이다. 정부는 현지에서 상용화할 수 있는 경제 기술, 여러 곡물 등 종자 시험 후 우수성이 입증된다면 향후 수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일차적으로는 한국에서 개발한 품종, 종자를 수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한국의 농기계·기술력·인력을 활용해 대형 농업 관련 시설을 정비하고, 토목공사를 하는 등 외부 기반을 구축하는 데에서 훨씬 큰 경제적 효과가 창출될 것이다. 최근 현지에서 벼 재배에 성공하면서 보리·밀 등 여러 작물로도 사업을 넓혀달라는 UAE 측의 요구가 있었다. 아프리카 세네갈에서도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벼 품종인 ‘이스리’ 재배 면적이 늘어나고 있으며, 세네갈 대표 품종인 ‘사헬’보다 두 배 높은 수확량을 확보한 상태다. 이렇듯 다양한 대륙·국가에서 한국 농업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해서 한국이 해외 농업 분야에서 도약할 기회를 마련하겠다.”

쌀 외에도 해외에 수출 가능한 것은.
“한국 기술로 밀 품종을 꾸준히 개발해 해외에 수출할 계획을 하고 있다. 국외 많은 사람이 가진 밀 알레르기를 저감할 수 있는 밀 종자인 ‘오프리’와 빵 가공 적성이 좋은 ‘황금밀’ 등 우수 밀 품종의 보급을 확대할 예정이다.”

국내 시장을 겨냥한 기술은.
“식습관이 바뀌면서 수입 의존도가 높은 밀, 동물 사료의 소비는 증가했지만, 쌀 소비는 감소했다. 이 때문에 쌀 자급률이 상대적으로 높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식량 자급률은 낮다. 국립식량과학원은 바뀐 식습관에 알맞게 쌀 빵, 쌀 맥주 등 여러 가공 제품 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CJ, 하이트진로 등의 기업과 협업하고 있다. 또 건강·기능성 쌀 품종을 육성하기 위해 다양한 바이오 기업과도 협업하고 있다.”

김제(전북)=이소연·최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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