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 벙기, 카길, 루이드레퓌스, 몬산토(현 바이엘), 다우듀폰, 켐차이나의 본사 및 시설물 전경. 사진 각 사·블룸버그
왼쪽부터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 벙기, 카길, 루이드레퓌스, 몬산토(현 바이엘), 다우듀폰, 켐차이나의 본사 및 시설물 전경. 사진 각 사·블룸버그

‘에이비시디(ABCD).’

세계 식량 시장을 상징하는 단어로 통용된다. 글로벌 곡물 유통 기업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rcher Daniels Midland Company), 벙기(Bunge), 카길(Cargill), 루이드레퓌스(Louis Dreyfus)를 가리킨다. 이른바 ‘팡(FAANG·Facebook, Amazon, Apple, Netflix, Google)’이 글로벌 정보기술(IT) 업계를 압축해서 표현한다면 ABCD는 세계 식량 업계를 대변한다. 실제 세계 곡물 시장은 4대 메이저 기업 ‘ABCD’가 약 80%를 장악하고 있다. 특히 카길의 점유율이 40%에 달한다.

한우와 한돈에 먹이는 곡물 사료 등이 대부분 ABCD 곡물 유통회사(이하 곡물 메이저)에 의존하고 있다. 또 예를 들어 치킨을 튀기는 식용유를 만드는 재료인 옥수수의 경우 국내에서 소비되는 모든 수요를 자급하기가 불가능하다. 곡물 메이저를 통해 원재료를 받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가끔 식용유 공급 부족으로 치킨을 중심으로 외식비 인상 논란이 발생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사료용 곡물을 포함한 식량자급률은 22%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구체적으로 2019년에 쌀을 포함한 옥수수, 밀, 대두의 수요량은 2046만t이며 국내 생산량은 393만t에 불과해(쌀은 374만t) 1653만t을 외국에서 수입했다. 우리나라는 이처럼 사실상 식량부족 국가임에도 주식인 쌀(벼)을 자급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민은 식량부족 문제에 대해 체감도가 낮다.

곡물 메이저는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유통해서 돈을 번다. 일례로 1등 기업 카길은 1865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회사다. 2019년 매출만 1135억달러(약 140조원)에 달한다. 같은 기간 1902년 설립된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의 매출은 약 80조원, 1818년 설립된 벙기의 매출은 약 50조원이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2019년 전문가 대상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5%가 ‘식량 위기 발생 시 현재와 같은 시스템으로는 대응이 어렵다’고 응답했다. 사실상 한국은 실질적인 ‘식량 잠식’ 상태나 다름없는 것이다.

특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이런 위기감은 더 커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국제 곡물 시장의 불안정성도 높아졌다. 쌀 주요 수출국인 베트남, 인도, 태국 등과 밀 주요 수출국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도 일시적으로 곡물 수출을 중지한 바 있다. 곡물 수입국뿐만 아니라 수출국인 미국, 호주, 캐나다에서도 밀을 비롯한 식료품의 사재기 현상이 발생했다. 만성적 식량부족 국가인 필리핀,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는 정부가 나서서 식량 비축 계획을 수립했다. 2007~2008년 국제 곡물 파동시기에도 러시아, 중국, 아르헨티나, 인도, 브라질 등 곡물 주요 수출국들은 곡물에 대해 수출금지, 수출할당 및 수출세 인상 등의 방식으로 자국의 식량 비축을 위해 수출을 규제한 바 있지만, 이번 사태는 장기화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에 따른 식량 생산 감소로 인한 곡물 파동과 같은 돌발적 식량 위기상황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리고 식량 위기가 장기화하면 만성적 식량 수입국인 우리나라의 경우 식량 수급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더욱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최지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이코노미스트는 “비상시 식량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국내 곡물 증산 기반 확대도 중요하지만, 자급률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국가 곡물 조달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 곡물 조달시스템이란 해외 곡물 메이저 등에 의존하는 곡물 수입방식에서 탈피해 국내 민간기업과 공공기관이 합동으로 곡물 유통사업에 진출해 곡물 수입의 일정 부분을 독자적으로 도입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곡물은 해외에 생산기반이 있다고 지금과 같은 비상시에 쉽게 수입할 수 없다. 생산 이후 저장, 수송 등 관련 인프라와 수출터미널 확보가 전제돼야 한다. 우리 소유 곡물 터미널이 없다면 원하는 시기에 필요한 물량을 조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곡물 터미널의 중요성 때문에 2010~2011년에 정부와 민간기업 컨소시엄으로 사업을 추진했으나 경험 부족과 진입장벽 등으로 성사되지 못한 바 있다.


바이엘, 다우듀폰, 켐차이나가 과점한 종자 시장

미래 먹을거리로 꼽히는 종자도 잠식 정도가 심각하다. 식품 종자는 식량의 소프트웨어 솔루션으로 통한다. 한 번 개발하면 품종 보호 등록 후 20~25년간 지식재산권 보호를 받으며 전 세계 농가 및 기업으로부터 거대한 로열티 수입을 올릴 수 있다. 세계 종자 시장은 바이엘(몬산토 인수), 다우듀폰, 켐차이나 등 톱 3 공룡이 80%를 과점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전 세계 종자 시장 규모는 2016년 기준 700억달러(약 82조원)로 축산과 수산을 제외한 농산용으로만 한정하더라도 370억달러(약 43조원)에 달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종자 시장 규모는 5억달러(약 5900억원)로 전 세계 시장 점유율이 1.3%에 불과하다. 국제적으로 경쟁력있는 종자 기업도 없다.

실제 우리가 지역 특산물이라고 알고 있는 작물 상당수가 외국산이다. 한국의 종자 자급률은 현재 40% 수준에 불과하다. 일례로 한국인의 입맛을 당기는 매운맛의 주인공 청양고추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에 걸쳐, 당시 국내 대표적 종묘회사였던 중앙종묘에서 개발한 고추의 상표명이다.

그러나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접어들면서, 글로벌 종자회사인 세미니스가 한국의 중앙종묘를 인수·합병하면서 청양고추의 개발사가 흡수됐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청양고추를 먹을 때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종자회사인 바이엘(세미니스를 인수한 몬산토를 인수)에 로열티를 지불하게 된 것이다.

특히 최근 들어 기상 이변이 속출하고, 신흥경제국들의 도시화와 소득향상 등 세계 곡물 시장의 불안정 기조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종자의 중요성이 더욱 대두된다. 종자 연구·개발(R&D)과 종자 산업 육성이 긴요한 정책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종자 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는 2012년 이른바 ‘골든 시드 프로젝트(GSP)’를 시행했으나 성과는 미미하다. 이 프로젝트는 2012년부터 2019년까지 2678억6000만원의 예산을 투입해 농촌진흥청이 식량 종자와 가축 종자 분야를 담당하고 농림축산식품부와 산림청은 채소와 원예 종자, 해양수산부가 수산 종자를 각각 담당하는 종자 육성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핵심적인 벼 수출 실적은 이 기간에 0원이었다. 돼지 역시 30만달러 수출 목표액을 책정했으나 실제 수출은 없었다.

김종섭 경상대 명예교수는 “앞으로는 식량 자급률뿐만 아니라 식량 자생력도 중요해질 것”이라며 “종자 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고 식량안보를 튼실하게 하려면 전문 인력의 양성과 R&D에 대한 훨씬 과감하고도 적극적인 투자가 절실하다”라고 했다.

김문관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