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일 김상조(왼쪽 네 번째) 공정거래위원장(현 청와대 정책실장)이 5대 그룹 관계자들과 간담회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2017년 11월 2일 김상조(왼쪽 네 번째) 공정거래위원장(현 청와대 정책실장)이 5대 그룹 관계자들과 간담회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2019년 11월 1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 삼성전자는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이렇다 할 축하 행사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삼성전자 수뇌부가 연루된 재판이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길어진 탓이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글로벌 시장에서 브랜드 가치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업체 ‘인터브랜드’가 최근 발표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 자료에서 삼성전자는 세계 5위로 꼽혔다. 이런 기업이 정경유착 의혹과 지배구조 문제 등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로 대표되는 ‘재벌(財閥)’은 한국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핵심 키워드다. 한국어 발음 그대로 ‘재벌(chaebol)’은 권위 있는 옥스퍼드 사전에도 등재됐다. 재벌은 거대 자본을 가진 경영진이 가족·친척 등 동족(同族)을 주축으로 이룬 혈연적 기업체를 의미한다. 범(汎)삼성가(삼성그룹·신세계그룹·CJ그룹), 범현대가(현대그룹·현대자동차그룹·현대중공업그룹·현대백화점그룹), 범LG가(LG그룹·GS그룹·LS그룹·LIG그룹), 범SK가(SK그룹) 등이 대표적인 재벌이다. 재벌은 혼맥과 혈연으로 맺어지고 부와 권력의 세습이 강하게 이뤄지는 등 중세적인 특징을 지닌다. 미국의 대표적인 비교행정론 학자인 프레드 W. 릭스는 개발도상국 경제 체제의 특징을 혈연과 정실주의(개인적 친분 중시)라고 정의했다. 그는 개발도상국 경제 체제는 선진국 모델을 수입해 왔지만, 토착문화에 의해 변형된 중간적인 단계, 특히 특정 인맥이 없으면 진입할 수 없는 ‘사랑방 모형’으로 분석된다고 설명했다. 현재 한국의 경제적 규모가 개발도상국 수준은 아니지만, 이 분석은 어느 정도 한국의 현실에 들어맞는다.

재벌의 탄생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던 1972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당시 제1차 오일쇼크의 전조로 전 세계의 경제 성장이 멈췄다. 승승장구하던 미국, 일본, 북유럽 국가들의 성장률도 하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기업들은 이때를 계기로 계열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1972년 8월 3일 박 전 대통령이 발표한 ‘사채동결조치(8·3조치)’ 때문이었다. 8·3조치는 글로벌 기업들과 달리 제대로 된 금융시장이 없어 자유롭게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웠던 기업들이 무더기로 도산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실시됐다. 이 조치에 따라 기업들이 사채업자들에게 빌렸던 막대한 자금에 대한 계약 관계는 즉각 모두 무효가 됐다. 그리고 빚더미에서 벗어난 기업들은 계열사를 늘리고 덩치를 키웠다. 이처럼 재벌은 사실상 정부 정책에 의해 탄생하고 성장했다.

역사적으로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전까지 재벌에 대한 비판은 정부의 특혜를 받아서 성공했기 때문에 역량이 부족한 ‘우물 안 개구리’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그룹 같은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크게 성공하면서 이런 비판은 점차 사라졌다.

글로벌 시장에서 재벌이 성공을 거두자 이후 이들에 대한 비난의 초점은 지배구조로 바뀌었다. 대기업 오너 가문이 순환 출자를 통해 ‘쥐꼬리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소위 ‘황제 경영’을 한다는 비난이 주를 이뤘다. 문재인 정부도 공약인 공정 경제 실현을 위해 재벌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과거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에서 이른바 ‘재벌 저격수’로 활동한 김상조 한성대 교수를 공정거래위원장에 이어 청와대 정책실장에 발탁했다.


진화하는 한국 기업 지배구조

기업인들은 본능적으로 내가 사업을 잘해서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한국의 경우 뿌리 깊은 혈연주의가 기업 승계 작업에 반영돼 있다”고 설명한다. 가족 기업이 크게 성공해서 상장사가 되고, 글로벌 기업이 돼도 근본적인 형태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오너 경영인들에게 쏠리는 ‘부의 집중’과 ‘대물림’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등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면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박상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위원장은 “재벌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경영 승계 과정에서의 잡음 등 여러 가지 불법적인 일을 저질러 왔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대신지배구조연구소 관계자는 “삼성전자 같은 기업들이 지금처럼 도약하는 데 오너 경영의 장점인 빠른 결단과 추진력이 밑바탕이 됐다”며 “한국 정서와 맞는 기업 형태를 구축해 성공했고, 그 방식이 지금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기업 지배구조에 정답은 없다. 해외에도 대를 잇는 가족 형태의 대기업은 적지 않다. 유럽의 폴크스바겐·포르셰·LVMH·루크오일·엑소르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형태가 약간은 다르지만, 미국의 거대 기술 기업인 아마존·구글·페이스북도 소수의 대주주가 지배한다. 정구현 연세대 명예교수는 “기업 지배구조에는 정답이 없다. 과거 역사에서 유래하며 정치·사회적 변화를 거치면서 진화한다”며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 역시 진화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식 전문경영인 체제는 단기 성과주의에 대한 집착과 경영진에 대한 과도한 보상 같은 문제점이 있다. 중요한 의사 결정 과정에서 오너 경영 체제보다 속도가 느리기도 하다. 반면 오너 경영 체제는 장기적 안목으로 기업 경영이 가능하고 주인 의식이 확실하기 때문에 인수·합병(M&A) 등 과감한 미래 모험 투자도 가능하다. 그러나 도덕적 해이와 갑질 발생 가능성, 소액주주와 이해 상충 등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장세진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는 “오너 경영은 후계자의 능력이 전문경영인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에 문제가 생긴다”라며 “장기적으로 총수 일가가 소유권을 갖고,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역할 분담을 검토해야 한다”라고 했다.

김문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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